샤이니, 다비치, 슈퍼주니어, 태양, 선데이 브런치….
지난 주말 TV에서 하는 한 인기가요 프로그램에서 본 가수들이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든 것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바쁘게 살고 있는 것일까. 도무지 아는 가수가 없었다. 다들 처음 보는 얼굴, 처음 보는 노래들뿐이었다. 그 와중에 나온 엄정화 누나가 어찌나 반갑던지….
빅뱅이란 그룹은 언젠가 들어봤지만 태양이라는 가수가 빅뱅의 멤버라는 것을 몰랐던 나는 옆에서 함께 TV를 보던 여동생에게 '노인네'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왠지 억울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이들은 그새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TV 카메라가 방청객을 비췄다. 수많은 팬클럽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열광했다. 가히 붉은악마를 능가하는 일사불란한 응원이었다. "이 더운 날 저기 가있을 시간에 책이나 한 장 더 보지, 아니면 낮잠을 자던가…"라고 말하면 역시 노인네 같아 보일까.
하긴, 내가 얼마 전까지도 밤잠을 설쳐가며 유로 2008을 보고 환호하는 것과 저들이 방송국으로 달려가 좋아하는 가수를 보며 환호하는 것이 뭐가 다를까. 이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예전에 친구가 들려준 얘기가 생각났다.
후줄근한 티셔츠가 20만원?몇 달 전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기분 좋게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토요일이라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나왔다는 그 친구는 마치 찜질방에서나 나눠줄 것 같은 후줄근한 티셔츠에 반바지 그리고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다들 그 친구의 성의 없는 옷차림을 비난(?)했다. "야, 너 우리 만난다고 그렇게 입고 나온 거냐? 여자 만날 때도 설마 그렇게 입고 나가는 건 아니겠지?" 설상가상으로 티셔츠에는 인기 아이돌 그룹 이름까지 찍혀있었다.
"잉? 야! 네 나이가 몇인데 그런 티를 입고 다니는 거야? 보는 우리가 다 민망하다."
"모르는 소리 하지마라. 이 티가 얼마짜리인줄 알아? 20만 원짜리야 20만 원."
"그게 20만원이라고? 말도 안 돼! 무슨 명품이라도 되냐?"
말도 안 된다는 반응들이 쏟아지자 그 친구는 티셔츠의 '흥미진진한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예전에 당일치기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이 아이돌 그룹 콘서트에서 질서를 정리하는 스태프 일이었다. 그 티셔츠는 바로 행사 주최 측에서 진행요원들에게 나눠준 직원용 티셔츠였던 것이다.
문제는 콘서트가 끝난 후였다. 행사장 주변을 정리하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데 팬클럽으로 보이는 여중생 3~4명이 다가와 말을 걸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친구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자기들에게 팔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
친구가 입고 있던 티셔츠는 모든 관객들이 구입할 수 있는 기념품이 아니라 오로지 직원들에게만 나눠주는 '비매품' 티셔츠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 그룹을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관심이 가는 물건이었겠지만 친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요청에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어린 팬클럽 동생들이여, 그냥 즐겨라 친구는 "그냥 행사직원들에게 나눠준 공짜 티셔츠"라며 돈 주고 살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팬클럽 여동생들의 요구는 절실했다. 친구가 계속 난색을 표하자 돈을 더 달라는 것으로 알아들은 그들은 갑자기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 무려 20만원이라는 거금을 내겠다고 까지 한 것이다. 순간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나도 살짝 뒤통수를 맞은 듯 가벼운 충격을 느꼈다.
그날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은 일당의 몇 배나 되는 큰 돈이었다. 그러나 당황스러움이 최고조에 달한 친구는 끝내 티셔츠 파는 것을 거부했고 어쩔 수 없이 팬클럽 여동생들은 아쉬움에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인기가수들을 향한 소녀 팬클럽들의 열정이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로 내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물론 친구에게는 큰 의미가 없던 티셔츠였으니 그냥 선물로 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엔 너무 당황해서 경황이 없었고 또 당장 갈아입을 옷도 없었기에 그렇게 못했다고 한다.
우리가 "야, 정말 아깝다! 그냥 팔지 그랬냐. 20만원이 어디 동네 애 이름이냐?"라며 안타까운 반응을 보이자 정작 그 친구는 우리를 점잖게 꾸짖듯 말했다.
"임마, 20만원이 동네 애 이름이 아니니깐 안 판거야. 무모한 생각인지 뻔히 아는데 차마 어린 애들한테 팔 수가 없더라고.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깝기는 해. 그냥 팔 걸 그랬나? 하하!"
나 역시 그 얘기를 들으니 티셔츠를 팔지 않은 것이 아깝기는 했지만, 만약 20만원을 받고 팔았다고 해도 마음은 무척 불편했을 것이다. 그 팬클럽 여동생들의 부모님께서 꼭 필요한데 쓰라고 주신 소중한 용돈이 아니었겠는가.
그렇게 해서 친구의 평범한 공짜 티셔츠는 순식간에 20만 원 짜리 명품 티셔츠로 '격상'되었다. 이 자리를 통해 그 팬클럽 여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20만원을 주고 티셔츠를 사지 않아도 그 가수를 좋아할 수 있다고, 즐겁게 음악을 듣고, 공연장에 직접 찾아가 박수쳐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내가 말해놓고도 너무 고리타분한 말은 아닌지 살짝 걱정이 되는 것을 보니, 이제 어린 아이는 아닌가보다.
이 말을 들은 어린 팬클럽 동생들이 "그게 바로 세대 차이라는 거예요!"라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