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은 많은 것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내 발로 땀흘려서 가고, 힘들면 쉬고. 20분에 한 대꼴로 오는 국철를 조바심 내며 기다리지 않아 좋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자전거 출퇴근. 다섯 해가 지나 이제는 어지간히 중독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토요일 바쁘지 않은 출근길. 간만에 카메라를 들고 나왔습니다. 시작은 언제나처럼 집을 나서 뚝섬 유원지로 한강 진입. 조금 가다보면 성산대교 18㎞ 이정표. 앞에는 성수대교가 버티고 있습니다.
성수대교. 아침 출근길에 무너진 다리는 32명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성장 제일주의와 안전 불감증이 빚어낸 참극이 현장. 그것이 14년 전 일입니다.
붉은 칠, 붉은 조명. 강열하고 아름다워 이제는 야경 감상의 명소입니다. 비오는 날 늦은 밤 퇴근길. 조금은 으스스 할 때도 있지요. 그 밑으로 서울숲으로 통하는 토끼굴이 있습니다. 가파른 길이니 자전거는 내려서 가시길.
서울숲 입구를 끼고 돌다보면 중랑천 합류 지점. 압구정과 옥수동이 보이고 동호대교·한남대교·잠수교까지 보입니다. 겨울이면 철새들이 모여들고 봄이면 응봉산 개나리가 온 산을 수 놓습니다. 요사이는 늦은 저녁 벤치에 앉아서 지는 노을을 보면 장관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한강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로 추천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중량천을 넘어 옥수동 역을 보면서 달립니다. 국철과 나란히 달리는 길.
한강 기찻길 옆에 한창인 쑥부쟁이와 능소화한강에는 초봄에서 늦가을까지 꽃이 핍니다. 지금은 쑥부쟁이와 능소화가 한창입니다. 꽃에 얽힌 이야기와 느낌이 반대되는 꽃입니다.
쑥부쟁이는 민초 같은 꽃. 낭군에게 배신당한 처자가 열한 명이나 되는 가난뱅이 동생들이 뜯어 먹고 살라고 죽어서 환생한 꽃이랍니다. 우리나라 어디에나 피는 꽃. 촛불의 행렬 같은 쑥부쟁이가 한강에 가득합니다.
능소화. 왕에게 버림받은 왕의 여자 빈이 왕을 그리다 죽어 환생한 꽃이라 합니다. 양반꽃이라고도 불리는 이 꽃은 신분사회에서는 천민들은 키울 수도 없는 꽃이었습니다. 그 꽃이 한강 기찻길 옆(국철길)에 한창입니다. 쑥부쟁이와 다르게 한송이 한송이가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위로 자랄 수 없는 꽃. 왕의 여자 빈의 운명 같습니다.
한남역을 지나면 오래된 느티나무가 나옵니다. 보호목. 수령이 550년 되었다고 합니다. 그 나무 밑에서는 매일같이 굿을 합니다. 어떤 때는 한강에 촛불이 띄워 놓고 술을 붓는 사람도 봅니다. 무엇이 그렇게 빌게 많고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이 많은지. 저 사람은 무엇을 빌고 무슨 기도를 하는지. 영험은 있는지.
종교라는 것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착각에서 시작됐다는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는 신의 말씀이라고 제멋대로 해석하고 제멋대로 선과 악을 갈라놓은 유명 종교인들보다, 밤새 낮은 징소리를 울리며 망자의 한풀이를 하는 무술인이 더 다정하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겨울 저녁 아무도 없는 한강, 홀로 가는 자전거 퇴근길. 그 징소리에서 묻어나는 사람 냄새가 좋습니다. 그리고 위안을 얻습니다.
반포대교. 그 밑은 잠수교. 거기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휴식공간이 있습니다. 자주 지나치는 사람들은 수인사를 하기도 하지요. 한강을 차로 건너는 사람들은 잠수교를 볼 기회가 자주 없지만 나름 운치있는 다리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즐겨 찾는 장소이기도 하지요.
원래 평평한 다리였는데 유람선을 다니게 하기 위해 다리 중간을 올렸다 합니다. 사진 마니아들은 '낙타봉'이라고 합니다. 수년 전 나도 남들처럼 멋진 사진을 찍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한나절을 카메라와 씨름했습니다. 도저히 각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천장에 걸리고 기둥에 막히고. 그래서 사진 동호회에 물었죠. 답메일이 왔더군요.
"난간 철망 펜스에 처진 현수막을 들어 보세요." 다음날 지나가는 길에 현수막을 들어보니 누군가가(사진 미니아겠지요) 철망 펜스를 카메라가 들어갈 정도의 사각형으로 잘라 놓았더군요. 공공 시설 파괴, 이런 생각보다는 그 열정이 참 놀라웠습니다. 요사이는 현수막이 쳐져 있지 않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좋은 자전거 출퇴근이수 지역을 지납니다. 거북선 나룻터가 나옵니다. 거북선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통영시에 기증해서 지금은 없습니다. 왼쪽으로 한강철교가 보이고 그 너머 63빌딩도 보입니다. 오른쪽에는 용산에서 전망 좋은 아파트 지구입니다.
그런데 현수막 시위가 난리입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 없으나 주민들이 반대하는 아파트를 헐고 소위 '명품 아파트'를 짓자는 서울시에 항의하는 것 같습니다. 재개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주거는 쾌적함이나 고급스러움보다 안정성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발밑을 지나가는 달팽이를 봅니다. 위험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달팽이 같은 느린 존재에게는 안전망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미친 듯 성장만을 이야기하는 사회. 달팽이 같이 사는 사람들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이제 내려서야 할 때입니다. 성산대교 7㎞ 이정표. 이정표만으로도 11㎞를 달렸네요. 원효대교를 지나면 육교를 건너 조금 더 가면 넘어 직장입니다. 집에서 직장까지 13㎞. 왕복 26㎞가 되는 거리입니다. 딱 운동하기 좋은 거리. 바람만 등 뒤에서 불어주면 40분이면 도착합니다. 오히려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걷고 하는 것보다는 빠른 시간입니다.
자전거 출퇴근 한 번 실행해 보시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도 하면서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