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신화>로) 검찰에 기소될 때 빼고는 기자분들이 이렇게 많이 와주신 것은 처음인 것 같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학습만화만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지난 8일 낮 12시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이하 <만화 세계사>)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는 때 이른 폭염에도 20명 가까운 기자들이 방을 가득 채운 것을 보고 만화가 이현세(54)씨는 그렇게 너스레로 인사말을 건넸다.
이현세가 또 다시 학습만화를 펴냈다. 그는 이미 10권으로 <만화 한국사 바로 보기>(이하 <만화 한국사>)를 펴냈다. 이번에는 모두 15권에 선사시대부터 오늘까지의 세계사를 담을 계획이다. 완간 예정 시기는 내년 연말. 그 가운데 먼저 '문명의 새벽' '고대국가와 세계종교' 2권을 선보였다.
한국사엔 없던 '현대', 세계사엔 등장한다"<만화 한국사>를 할 때와 같은데요, 가능한 평민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표현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와 남, 이런 개념을 떠나서 인류 공동체의 눈으로, 열린 시선으로 많은 민족들이 어떻게 문화를 만들어왔고, 또 얼마나 많은 문화들이 우리의 잘못으로 파괴돼 왔는지를 보여주고 싶어요. 또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나 상황 속에 숨겨진 동기나 본질을 드러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그는 특히 "강대국 위주에서 벗어나 이슬람·남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 문명 등에 좀 더 신경을 써 균형을 맞출 것"이라고 했다.
<만화 한국사>는 8·15 광복을 맞으면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 현대사를 다루지 않고 있다. 반면 <만화 세계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의 재편을 거쳐 오늘의 세계 모습까지 담을 예정이다.
- 현대사를 다룰 때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중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작품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데요?"어쨌든 편견을 넘어 균형잡힌 시각으로 현대사를 보려고 하는데 굉장히 힘들 거 같습니다. 감수하는 분들이 어떤 분들이냐가 중요한데 마지막 15편은 어떻게 해야될지 아직 모르겠네요.
<만화 한국사> 10권이 해방에서 끝난 이유도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 문제, 6·25 문제를 얼마나 편견없이 갈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이 없어서 끝낸 거거든요. 그래도 (<만화 세계사>에서) 현대사를 다뤄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아이들한테 현재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에 대한 동기와 상황은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본 거죠."
- 그 가운데 하나가 '현재 미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을 민주의의 보루로 볼 것인가, 제국으로 볼 것인가 하는…."그럼 미국은 제국민주주의라고 보나요(웃음)? 저는 어쨌든 미국은 '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최강 로마제국 아닙니까. 그래서 그 부분이 외려 재밌을 것도 같고 약간 흥분도 됩니다. 그러나 이현세 개인의 주장만 가지고 밀어붙이는 역사서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학습만화니까, 우리 아이들한테 그것을 어느 정도에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중요하겠죠."
이현세의 굴욕? "사인회 가면 태권V나 드래곤볼 그려달라고..."- <만화 세계사> 작업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지요? 역사책은 많이 읽었나요?"역사책을 읽는 것보다는 제 마음가짐부터 훈련시키는 것이 먼저였죠. 제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교육이나 세계관 자체가 왜곡되기도 했고, 선입관을 많이 가져 왔으니까 저 스스로 편견을 벗어나는 마음가짐을 만드는 게 먼저였던 것 같습니다."
- 학습만화를 그릴 때와 성인만화를 그릴 때의 마음가짐이 다른가요?"아무래도 많이 다르죠. 성인만화를 할 때면 제 마음 속의 갈등을 증폭시켜 세상을 향해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어하죠. 굉장히 충동적이고 직관적인 편이죠. 그런데 학습만화를 하면 책이 나갔을 때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게 되죠. 대사 한 마디를 쓸 때도 'ㅊ'이나 'ㅋ'처럼 거친 단어보다 'ㅇ'이나 'ㅁ'처럼 부드러운 단어를 쓰게 되죠. 성인만화를 한 뒤에 (학습만화를 그리려면) 하루 정도는 쉬어야 됩니다. 대사들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무거워지거나 거칠어질 수 있거든요."
- 다른 역사 학습만화들도 보셨나요? 그들의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장점들은 다 재밌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 머리로 짜내더라도 실제 사건보다는 덜 드라마틱하잖아요, 전쟁도 그렇고 범죄도 그렇고. 그리고 단점이라기보다는 고증에 어려움이 있으니까 전부 (인물을) 이등신·삼등신으로 그린다는 거죠. 저는 과거를 재현하면서 영화처럼 현장감을 주고 싶었습니다. 감수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말 재갈의 모양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죠."
<만화 한국사>나 <만화 세계사>나 박진감 넘치는 화면이나 세밀한 극화체 그림에서 '역시 이현세'라는 탄성을 자아낸다. 인물·복식·건축 등부터 각 시대 생활상까지 고증을 거쳐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묘사한 점도 높이 살 만 하다.
잘못된 부분은 출간 뒤에도 계속 고쳐가고 있다. <만화 한국사> 때도 출간 뒤 초등학생의 지적으로 윤봉길 의사의 폭탄 그림을 도시락에서 물통으로 수정하기도 했다.
<만화 한국사>는 지난해 연말로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그는 "내 책이 특별히 아이들과 정서가 맞다기보다는 책을 사주는 부모님들이 과거 제 팬들이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 어린이 팬들도 늘었나요?"<만화 한국사> 나오기 전까지는 사인회 가면 아이들이 '로보트태권V'나 '드래곤볼'을 그려달라고 그러지 까치·엄지는 절대 얘기하지 않았어요. 까치·엄지를 모르니까요. 작년부터는 <만화 한국사> 덕분에 까치·엄지를 그려달라고 그러죠. 조용히 생각해보면 지금은 이현세를 리모델링하고 있는 중입니다. 분명히 명성은 있는데 어느 날 나와보니 제 자리가 없더라구요. 아동만화에서도 청소년만화에서도 성인만화에서도…."
<만화 한국사>와 <만화 세계사> 모두 이현세 만화의 대표적 캐릭터인 까치와 엄지·동탁·두산 등 네 명의 어린이가 역사 체험을 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는 "그들이 딱딱한 만화를 부드럽게 해주기도 하지만 과거 역사에 대해 현대인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대변해주는 역할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이현세 만화라는 걸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슬쩍 자신의 바람을 내비쳤다.
"앞으로 예순을 넘어 일흔이 되면 어린이들에게 만화로 동화를 들려주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그 때를 위해서라도 까치와 엄지를 통해 어린 독자들과 소통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등장시킨 거죠."점심을 곁들인 간담회였기에 배는 채웠지만 여전히 허기가 진 느낌이었다. 80년대 청춘 시절을 함께했던 까치와 엄지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고, 자신을 리모델링하고 있는 만화가 이현세의 걸어온 길과 가고 싶은 길이 궁금했다. 따로 약속을 잡고 약 1주일 뒤 서울 개포동에 있는 그의 개인작업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빨갱이 삼촌'을 둔 초등학생의 삶인터뷰를 앞두고 그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았더니 태어난 때와 곳이 자료마다 제각각이었다. 출생연도는 1954년과 1956년, 그리고 출생지역도 포항·울진·경주로 다양했다. 심지어 그가 회장을 지내기도 한 한국만화가협회 홈페이지에조차 출생연월이 '1954년 포항 출생'과 '1956년 5월 5일(음) 생'으로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그는 데뷔작품도 <시모노세키의 까치>가 아니라 <저 강은 알고 있다>라고 확인해줬다).
그저 사실 확인을 위해 물었을 뿐인데 그의 아픈 가정사를 건드리는 질문이 되고 말았다. 그의 큰아버지는 전쟁통에 사망했고, 그의 작은아버지는 북한군으로 월북했다. 그가 태어난 해는 휴전 다음해였다.
"정확하게는 1954년 포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연고는 없구요, 6살 때 사라호 태풍 이후 경주에 나와 쭉 경주에서 자랐죠. 울진은 본적인데 그 때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거죠. (전쟁 이후) 울진에서 빨갱이 사냥이 심해져 친했던 친척·친구들이 다 손가락질하니까, 아버지께서 가족들을 데리고 포항으로 나온 거죠. 포항(흥해)에서 농사지으며 정착하시려다가 사라호 태풍과 그 다음해 2년을 계속 둑이 터져 개간한 논밭이 다 없어지는 바람에 살기가 어려워졌죠. 게다가 그해 겨울에 내가 애들이랑 놀다가 남의 집을 홀랑 태워먹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막노동이라도 해서 살기 위해서 경주로 나왔죠. 아버지는 그렇게 나오셔 철도역 수리공장에서 근무하시다가 제가 9살 때 누전사고로 돌아가셨죠. 대신 저는 경주에 나오면서 자동차·기차·만화·영화라는 신천지를 알게 됐구요."
잠시 당황했지만 애초 준비한 질문을 이어갔다. 1982년에 발표한 <공포의 외인구단>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만화가 이현세의 이름을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작품이자, 성인만화와 청소년만화의 장벽을 허물며 1980년대 한국만화의 르네상스 시기를 연 작품이기도 하다. 1986년엔 이장호 감독의 연출로 영화(원제의 '공포'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란 제목으로 개봉됐다)로도 제작돼 그해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고, 정수라가 부른 주제곡 '난 너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한 만화평론가의 평가처럼 <공포의 외인구단>은 "1980년대 한국대중문화의 아이콘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에도 <2009 외인구단>이란 제목으로 드라마 제작이 진행되고 있기까지 하다.
그는 <공포의 외인구단> 성공요인에 대해 가장 먼저 "그 때는 만화를 코흘리개의 노릿개거리 정도로 우습게 취급하고 있었는데, 가족만화를 표방하고는 있었지만 복선구조도 있고 성인들의 정서를 담아낸 게 큰 방향을 일으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80년 봄이 없어지면서 다시 다가온 암울한" 시대상, 보수적인 연애관에서 인스턴트 사랑으로 넘어가던 시기의 반작용으로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갈망, 그리고 욕망을 위한 프로스포츠(야구)의 탄생 등을 성공요인으로 꼽았다.
그리고는 <공포의 외인구단>의 세 가지 헤드카피를 설명했다. 먼저 당시 암울한 세상을 견디던 젊은 남자 독자들에게 힘을 불러넣어준 '강한 것은 아름답다'. 또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듣고 싶었을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할 수 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화 속 손병호 감독이 지옥훈련을 떠나는 6인의 외인구단에게 약속하는 대목에서 나오는 '최소한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카피.
"그렇게 따지면 중고생들이 가지고 있는 연애지상주의에, 대학생들의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또 직장 초년생들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수 없을까라는 세 가지 욕구가 합쳐져서 동생이 빌려온 책을 누나가 보고 또 엄마 아빠가 보고 그랬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공포의 외인구단>도 그렇고 당시 작품에 대해 '극단적 허무주의'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습니다."일견은 맞다고 생각하는 게, 초등학교 들어가서부터 제 자신의 감정과 신분을 숨기는 걸 알아버렸으니까요. 초등학교 1학년인데도 '나는 들키면 죽으니까 조심해야 돼' 그런 생각 속에 자랐으니까 어느 정도 영향을 줬겠죠. 작가가 되고 또 철이 들면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지구라는 별에 대해 생각할 때도 그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죠. 또 모든 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허무주의가 어느 정도 바닥에서 흐르고 있었다고 봐야겠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사람에 대해서 선진국에 대해서 정치인에 대해서 지도자에 대해서 또 학문이라든지 예술에 대해서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고 있진 않죠."
- 어디엔가 쓰신 글에선 어려운 환경에서도 만화가가 되고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밝히셨던데,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그게 역설적인 건데요. 내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오늘 하루하루에 충실한 거죠. 당뇨가 걸려도 걸릴 때가 되니까 걸린 거겠지 그러고 오늘 제대로 술을 먹는…(웃음). 우리 할아버지·아버지 다 30대에 돌아가셨거든요. 어릴 때부터 상처가 많아서 자기 상처를 치유하는 데 능하다고 그럴까요. 제가 가지고 있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은 포기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죠."
"어느 순간부터 '까치'가 내 말을 듣지 않게 됐죠"
그의 어린 시절 얘기가 계속 이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약간 슬픈 정서, 약간 화가 나는 정서를 좋아했죠. 초등학교 때 제일 좋아했던 장소가 집 다락이었죠. 다락창으로 비 온 뒤 동네의 골목길에서 노을지는 산까지 바라보는 걸 좋아했어요. 노래도 밝은 것보다는 <반달>처럼 약간 아릿한 걸 좋아했구요. 그게 그 때부터 스스로 나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던 거 같아요. 애비 없는 자식이고 가난했고, 또 집안 내력 때문에 학교를 가더라도 움츠리고 조심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경험들이 기본적인 비극구조로서 나를 카타르시스 시키는 게 강했겠죠. (작품을) 깔깔깔 해피엔딩보다는 확 절벽에서 뛰어내리면서 끝냈던 건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 만족했던 거죠. 그래 모든 건 언젠가 끝이 있는 거야, 끝이 있기 때문에 오늘 최선을 다하고 살아야 돼, 그런 성향이 생긴 거죠."- 만화가 이현세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까치 오혜성'이 상처를 간직한 어두운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도 그런 어린 시절의 경험이 투영됐기 때문인가요?"거의 모든 작가들이 그렇다고 저는 봅니다. 자기 모습과 똑같이 그리든 자기 모습과 반대로 그리든 어쨌든 기준은 자기거든요. 까치가 어느 정도 제 모습이라면, 마동탁은 제가 가장 싫어하는 걸 줬지만 또 한 구석에선 제가 가장 바라는 모습일 수도 있거든요. 제가 저한테서 제일 보기 싫어하는 건 행동력이 없다는 거예요. 대신 혜성이한테는 행동력을 줬죠. 작가 이현세는 항상 가슴 속에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있음에도 폭발을 못 시켰지만 주인공 까치를 통해서 대신 폭발시키는 거죠. 그래서 불행한 게 또 하나가 있는데…."
또 가족 얘기를 하려나 싶었는데 그가 들려주는 얘기는 다소 엉뚱했고, 한편으론 공감이 됐다.
"아주 소시민적인 얘기를 그리고 싶어도 초반에 까치가 강렬하게 자리를 잡다 보니까 까치가 그냥 동사무소 직원으로서 연애를 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얘기를 꺼내버리면 '이건 이현세 만화가 아니야' 그렇게 돼버려요. 까치는 내가 만든 주인공이지만 어느 순간 내 말을 안 듣는 거죠. 그래서 그 뒤로 수많은 캐릭터를 만들었는데도 전부 힘을 못쓰는 거예요. 까치란 캐릭터는 내가 만든 거지만 내가 이기진 못했죠."이현세는 마초?- 그렇듯 까치나 동탁 같은 남자 캐릭터의 성격은 능동적인데 반해 그 둘 사이에서 '트로피적인 존재'로서 방황하는 엄지 같은 여성 캐릭터는 청순가련형이고 수동적으로 그려집니다. "여성비하까지는 아닌데 남성우월주의는 있는 거 같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누님들 사이에서 외동으로 자라면서 집은 가난했지만 집안에서의 존재는 뚜렷했죠. 누님뿐 아니라 어머니도 제가 자고 있으면 제 발목을 못 넘어갔으니까요. 그래서 본질적으로 남성우월주의·마초, 그런 건 제 속에 있을 겁니다. 또 하나는, 여자 주인공에게 존재이유를 주고 끌고 가려고 해도 능력이 없어서 못 그렸어요. 어떤 상황에서 남자는 어떻게 대처할까가 머리 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여자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할머니나 어머니 두 분(그는 큰아버지가 전쟁통에 사망해 젖을 떼자마자 큰집에 양자로 보내졌다) 모두 일찍 과부가 되셨으니 집안에서 얼마나 엄격하겠어요. 여자로서 존재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할머니로서 어머니로서만 존재했던 거죠. 그런 여자들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여자로서의 욕구·본질을 볼 수가 없었죠. 그걸 커서 알려고 하니까 굉장히 힘들었죠."
그는 현재 아내와 사이에 두 딸과 한 아들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여성관이 바뀌었을까.
"바뀌긴 바뀌었는데 그렇다고 본질이 흔들리는 것 같지는 않구요. 여자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이해는 하는데, 살아가는 저 자신은 그렇게 변한 거 같지 않아요. 옛날에 비해 이성은 충분히 그리로 가있는데 본성은 아직 그대로인 거 같아요."
- <만화 한국사>는 해방이 되면서 끝났습니다. 해방 이후 현대사를 추가로 그릴 의향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올해가 건국 60년이잖아요. 60년간 잘했든 못했든, 또 위험하고 균형감각을 맞추기 굉장히 힘든 부분이지만 그래도 (현대사를) 다뤄야 하지 않나 싶은 거죠. '광주' 영화(<화려한 휴가>)를 보고 나오면서 젊은 청춘남녀들이 '정말 실제였으면 어쩔 뻔 했어' 이런 얘기들을 한다니 섬뜩한 거죠. 불과 몇십년 앞의 일이 이렇게 잊혀지는데 그 앞의 일이야 말할 수도 없는 거잖아요."
- 현대사를 그리자면 아무래도 좌우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을 텐데,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의 콤플렉스를 떨쳐버렸는지요?"아직 아주 자유롭진 않구요. 자랄 때 너무 상흔이 깊었기 때문에 쉽게 극복될 문제는 아니겠죠. 가능하면 회색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없어질 수는 없죠. 결국 이 작업을 함으로써 제 나름대로 나를 정리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또 학습만화로 작업을 하니까 훨씬 더 냉정해져야겠죠. 감수하시는 분들도 있을 테고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80년대 만화에 스포츠만화와 일본 배경이 많았던 까닭1980년대 초반 나는 대학생이었다. 어쭙잖게 학생운동을 한다며 돌아다니던 시절 공안의 눈길을 피해 친구들과 약속 장소로 잡곤 했던 곳이 만화방이라 불리던 대본소였다.
그 때 친구를 기다리며 뒤적였던 만화책 가운데 이현세의 만화로 <공포의 외인구단>은 물론 <돌바다> <생과 사> <국경의 갈가마귀> 등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때의 추억을 털어놓자 그는 "대본소가 운동권 학생들의 집결소가 되면서 어떤 현상이든 놓고 토론하기를 즐기던 학생들이 한국만화에 대해서도 토론했고, 그 때문에 한국만화의 성인시장이 열린 측면도 있다"면서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줬다.
"그때는 만화를 그리기에 앞서 시놉시스와 줄거리를 심의받아야 돼요. <돌바다>도 처음 심의에서 폐기 처분을 받았죠. 원래는 깡패조직과 지방유지의 탄압에 맞서 아버지와 아들이 도전하고 결국 복수하는 얘기인데 이게 불가능해졌죠. 그래서 원래 배경은 한국인데 일본으로 바꿔 귀화한 사람과 한국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의 충돌로 돌려버렸죠. 당시 심의에선 형제간 멱살을 잡아도 안 되고, 부모한테 대들어도 안 되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침실에 누워서 자는 장면도 안 됐으니까요. 윤리라는 잣대로 그렇게 갔는데, 그 위에 있는 게 효(孝)고, 또 그 위에 있는 게 충(忠)이었거든요. 이상무 만화도 그렇고, 그래서 가족간 갈등을 그리더라도 전부 일본으로 가는 거예요. 제일 많이 써먹은 게 귀화한 아버지와 형, 그리고 조선인으로 남고자 하는 동생, 이들을 야구로 붙이든 권투로 붙이든 가정 내 일어날 수 있는 갈등구조를 그렇게 표현하는 거죠. 그래서 그 당시 스포츠 만화가 많았고, 일본 배경이 많았던 거죠."
1990년대 들어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했지만 만화에 대한 심의는 여전했다. 1996년 11월엔 '만화심의 철폐를 위한 대책위원회'(그도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주도로 만화가들이 거리에 나서 시위를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음해 7월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유해매체' 1700여종을 발표했고, 그 가운데는 이두호의 <객주>, 허영만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지 않는다>, 이희재의 <성질수난> 등의 작품들이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그는 <천국의 신화>의 '음란성과 폭력성'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됐고,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기까지 했다. 출판사는 벌금을 내고 물러섰지만 그는 맞섰다. 6년간의 지루한 법정공방 끝에 2003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43살에 시작한 재판이 49살에 끝났고, 그는 그 시절을 "잃어버린 40대"로 기억했다.
- 이제 당시에 품었던 울분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요?"처음에는 재판이 끝나면 검사에 대한 얘기를 만화로 그리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재판이) 끝나니까 사그라지더라고요. 지금 분노는 어느 정도 가라앉혔지만 40대를 생각하면 약간은 허무하죠. 그린 만화도 없고 재판 받으러 다닌 것 밖에는 40대 기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까 책도 안 읽히고 친구들하고 골프나 치고 술이나 진탕 마시고, 6년 동안 결국 얻은 게 심장병·당뇨죠.
가장 화가 나는 건 뭐냐면 <천국의 신화>를 준비하고 그렸을 40대 초반에는 세상을 투쟁의 역사로 봤어요. 자연도 인간도 제국도 투쟁에 의해서 살아남는 거로 몰고 갔는데 50대에 들어 그린 '대단군' 이후를 보면 모든 걸 순리로 끌고 가거든요. 제가 바뀐 거죠. <천국의 신화>는 1부와 2부가 제목은 같지만 전혀 다른 얘기가 돼버린 거예요. 저도 불행하고 <천국의 신화>라는 만화 자체도 불행한 거죠. 또 2부를 그릴 때는 신명이 없었어요. 단지 책임감 때문에 끌고간 거죠. 제가 봐도 격정과 환희와 열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화가 나는 거죠."
- 이후 작업을 할 때 스스로 상상력이 위축된 것을 느끼진 않는지요?"조금은 있죠. 그 이후 뭔가 하려면 약간… 종교를 가계를 얘기할 때는 부담이 있죠. 또 지금 고구려를 욕한다? 제가 볼 때 불가능해요. 우리 사회가 그런 주제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게 된 건 불행이죠. 결국은 한국에서 판타지가 날개를 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력이 아니라 학력위조가 핸디캡 됐다"그는 또한 지난해 여름 학력위조 파문 때도 마음의 고통을 겪었다. 당시 연재하던 골프만화 <버디> 3권의 책(부제 '핸디캡') 서문에서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돼 처음 하는 인터뷰에서 대학을 중퇴했다고 거짓말을 했다"며 "이 때부터 학력은 25년간 벗어날 수 없는 핸디캡이 됐다"고 밝혔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실하게 확인했죠. 작년에 <버디> 만화를 하면서 골프 용어로 컷오프·헤자드·핸디캡으로 들어갔는데, 평생을 쭉 핸디캡을 가지고 왔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고등학교 나온 게 핸디캡이 아니라 그걸 숨긴 거 자체가 핸디캡이 됐죠. 이걸 극복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기자들 불러서 얘기하는 것도 웃기고, 책을 내면서 서문에서 얘기하고 조용히 넘어가려고 그랬는데 신정아 사건이 딱 터져버린 거예요. '그래 세상에 공짜는 없지, 무던하게 넘어가려고 한 내가 잘못이지'라고 생각했죠."그러면서 당시 인터뷰 때 학력을 틀리게 말한 까닭을 털어놓았다. "첫 인터뷰를 앞두고 어마어마한 긴장감으로 일주일 동안 잠이 안 오는 거예요. 당시만 해도 5월 어린이날이 되면 아줌마들이 여의도에서 불량만화라고 해서 만권씩 10만권씩 불태울 때니까,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하면 '역시 만화나 그리는 것들이 그렇지' 그럴까 싶어서 대학 중퇴로 올려놨는데…."
- 얘기를 듣다보니 그동안 많은 상처와 곡절을 넘어오신 듯 싶습니다. 그렇듯 상처가 깊었기에 오히려 더욱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그럴 수도 있죠. 제가 상처가 많아서인지 해도 해도 하고 싶은 얘기가 또 생겨요. 세상을 보는 눈이나 소재도 굉장히 가변적이죠. 그러니까 완성도가 없고, 옥에 티가 제일 많은 작가죠. 대신 만화라는 매체를 가지고 이현세를 좋아하는 독자들한테 정말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를 제공할 수는 있죠. 제일 존경하는 분이 이두호 선생님인데 어떻게 사극을 그것도 조선시대만 가지고 저렇게 평생을 할 수 있을까 싶어요. 집 마당을 그리든 봇짐장수를 그리든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있거든요. 이두호 선생님 같은 분은 만화계에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어가시는 분이고, 이현세란 작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화로 표현하는 이야기꾼으로서 존재가치가 있겠죠. 그러니 이두호 선생님은 안티가 없이 무한한 사랑과 존경을 받을 거고, 저는 무한한 안티 속에서 계속 돈을 벌면서 잘 사는 이야기꾼으로 남아있겠죠."
- 그래서 돈은 많이 벌었나요?"많이 벌지 않았을까요. (오잉?) 문제는 돈 관리를 못하고 사업한다고 다 털어먹어서 그렇지, 사업을 안 하고 그 돈으로 부동산을 샀으면 돈에 치어 죽었겠죠. 어린 시절 남자어른 없이 자랐기에 권력·명예·사업 이런 쪽에는 재능이 없는 거 같아요. 다만 상업적 감각이라고 그래야 하나요, 특별히 시대를 읽으려고 노력한 것도 아닌데 발상하는 걸 그대로 그렸을 때 현실에 잘 맞는 거 같습니다. 결국 철들어서 보니까 작가 마인드와 사업 마인드가 정말 선택을 해야 할 자리에 딱 가면 서로 상반되더군요."
"술과 담배가 내 만화를 그려왔다"그는 간담회 때 기자들에게 건배를 청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와인을 마시지 않았다. 술과 담배 탓에 "남아있는 잇몸이 하나도 없어 6년째 임플란트 시술을 받고 있다"며 "거의 사이보그 수준"이라고 했다.
한 때 하룻밤에 폭탄주 20잔을 마시고, 하루에 담배 4갑을 피웠다. 그는 한 칼럼에서 "돌이켜보면 내가 만화를 그린 게 아니고 술과 담배가 내 만화를 그려왔다"고 밝힌 적도 있다. 심장병과 당뇨로 그렇듯 즐기던 담배를 끊은 지 3년가량 됐다. '요즘은 생각나지 않냐'고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생각나는 건 아닌데 여전히 그립긴 하죠. 작가라는 직업은 작업할 때는 혼자 해야 하잖아요. 작업이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외로울 때도 있으니까 뭔가 위안거리가 있어야죠. 그럴 때 달래주는 게 때로는 자상한 아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장기나 바둑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다른 잡기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술 먹으면서 피우고 작업하면서 피우고, 밥 먹기 전에도 식탁에 앉아 피울 정도로 중독이었죠. 결국 스스로 끊은 게 아니라 몸이 나빠져 어쩔 수 없이 끊었지만."그러면서 덧붙이는 얘기. "우스개 삼아 얘기하는 게 만약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면 충돌 직전 무엇을 가장 억울해 할까,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나올 걸' 그러지 않을까요, 어차피 끝이 있는 건데."
- 작업시간은 어떻게 되는지요?"한번 작업하면 하루 10시간 이상 하죠. 학교 강의(그는 현재 세종대 영상만화과 교수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교육센터 교수를 맡고 있다)도 이틀은 가야 하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골프도 치고, 일주일에 3일 정도 집중해서 작업을 합니다. 정말 몰입하면 10시간을 그려도 엉덩이가 하나도 안 배겨요. 그리고 4일은 앉아서 하는 것은 전혀 안 합니다. 당연히 컴퓨터도 싫어하죠."
- 그럼 젊은 만화가들처럼 컴퓨터로 작업은 안 하는지요?"왜요. 다만 기본은 더 아날로그적으로 가려고 노력합니다. 이제까지 원화는 인쇄를 위한 초고에 불과했는데 제 원화를 상품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죠. 그러려면 훨씬 더 작업이 정교해져야겠죠. 어느 부분에서 디지털의 도움을 받느냐면 채색에서 받는 거죠."
채색은 그가 하지 않는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색약이다. 그 때문에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흑백의 점과 선으로 사각의 컷 안에 세상을 담는 만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저는 색약이라 제게 보이는 칼라와 일반인들이 보는 칼라가 어느 정도 같을까 의심하는 사람이니까 직접 채색을 할 수는 없죠. 의논은 하지만요."
세대 교체의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만화계그는 지난해까지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지냈다. "3년간 봉사하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지금은 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죠(웃음)." 최근 한국만화 산업에 대해 물었다. 그는 무엇보다 "현재 한국만화는 세대 교체 과정을 겪고 있다"고 했다.
"오프라인 세대는 온라인 만화를 이해는 하지만 그 감성은 없어요. 인터넷세대 젊은 만화가는 이해하는 게 아니라 공감을 하거든요. 오프라인 작가는 한 잡지에 들어가려면 한 작가를 밀어나야 돼요. 그렇지만 온라인은 스페이스가 무한대죠. 대신 오프라인 만화가는 선택돼서 들어가면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원고료를 출판사에서 책임지는데 온라인은 그렇지 않고 빈익빈 부익부가 확 갈라지는 거죠. 심각한 문제는 오프라인세대가 살아남을 길이 없다는 거예요. 제작만 그런 게 아니라 유통도 그렇고 전 사회가 그런 식으로 가니까요. 지금 만화책 사보려고 해야 사볼 데가 없잖아요. 오프라인세대들은 몇몇 사람만 빼고 역사 속으로 밀려나게 되는 거죠."그는 이 대목에서 "토털 콘텐츠의 원천 콘텐츠, 나아가 시발점으로서 만화의 가치"에 주목했다.
"지금 젊은 만화가들은 만화 자체의 인세만으로 먹고 살려고 그리지는 않죠. 만화가 토털 콘텐츠의 시발점에 서게 되면 만화책이 1000부 팔리든 1만부 팔리든 상관없는 거죠. 그걸 가지고 영화나 게임이나 드라마나 다 해나가야 하니까 인세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최고의 만화를 그릴 수 있는 거죠."- 그럼 한국만화의 미래는 밝다고 보시는지요?"한국만화의 미래는 밝다고 봅니다. 다만 만화 하나에만 매달리는 작가는 훨씬 힘들 수 있죠. 토털 콘텐츠를 이해하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성장이 제일 중요하겠죠. 이제는 하나의 콘텐츠가 터지면 만화가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가 먹고 살 수도 있게 되거든요. (그런 점에서) 우리와는 달리 만화를 하나의 문화로서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온 젊은 후배들에게 미래의 희망이 있는 거죠."
- 스토리의 중요성을 얘기했는데 지난해 불거졌던 스토리작가들과 저작권 분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아직 해결이 안 된채 그대로 있죠. 한 번은 정리를 하고 지나가야 되는데 지금부터 인정해주느냐, 옛날 것을 다 소급해서 인정해주느냐가 문제입니다. 저로선 만화가와 스토리작가 사이에 개인적으로 도의적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보지만, 저만 해도 약 20명의 스토리작가와 일해왔기 때문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결국 싫든 좋든 법정에서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줘야 하는 거죠."
만화로 동화를 들려주는 할아버지 작가의 꿈지난해 만화잡지 <카툰>이 창간 기념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그는 한국만화가 중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로 꼽혔다. 또한 '작품성이 뛰어난 만화가' '그림을 잘 그리는 만화가'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그 얘기를 꺼내자 그는 웃음부터 떠뜨렸다.
"하하, 그거 되게 웃겼어요. 동시에 가장 좋아하는 만화주인공엔 까치가 10위 안에도 들어있지 않아요. 허상일 뿐이죠. 지금 이현세 만화는 애들도 보지 않고 청소년도 보지 않고,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더이상 만화를 보지 않는다는 얘기거든요. 사실 학습만화는 창작만화 하는 사람이 생계의 위험이 오지 않으면 그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편견이죠. 그런데 오죽하면 그걸 했겠어요.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30, 40대이고 아이들이 10살 내외니까 그 사람들이 선택해서 읽혀줄 수 있는 만화를 그려야겠다 해서 학습만화를 선택한 거죠."그가 학습만화를 선택하고, 기자간담회 때도 밝혔듯이 자신을 '리모델링'을 하고 있는 것은 "아직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고, 그러려면 다시 독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고 싶은 얘기는? 일단 현재 연재중인 <버디Ⅱ>와 <만화 세계사>를 끝내고 나면, 자신이 자라난 경주, 천년제국 신라 서라벌의 마지막 날을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그 때도 결혼 날짜 잡아놓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애들 공부시키기 위해 다운타운에 들어와 리어카를 끄는 촌부도 있을 것이고, 수많은 군상이 있지 않았겠어요. 가능한 한 평민의 눈으로 하루를 그리면서… 제 상상력이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죠. 다만 생각하고 있는 건 제국보다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중심이라고 봐야겠죠. 그 만화로 경주에 테마파크가 생겼으면 좋겠고, 외국인에게 한국 고대국가의 모습을 선명하게 각인시키고 싶은 거죠."
그는 기자간담회 때 나이가 들어 "아이들에게 만화로 동화를 들려주는 할아버지 작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혹시 어린 시절 상처 입었던 자신의 영혼을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정화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물었다. 답변은 의외로 소박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동화 문화가 전멸된 나라잖아요. 뭐 제목처럼 노인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 나라니까. 그런 면에서 늙어서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하나의 욕망·바람이죠. 또 하나는, 그때가 돼서 손자․손녀한테 멋지고 즐거운 얘기를 들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죠. 될지 안될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어려워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그림을 곁들인 동화가 아이들한테 전달될 수 있다면 정말 원더풀이 되는 거죠."그의 소망이 꼭 이뤄지고, 더불어 다시는 그와 같은 어린 시절을 겪는 아이들이 없는, 정말 '원더풀한 세상'이 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