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에 걸쳐 방콕 시내를 둘러본 다음, 3일째에는 방콕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인 아유타야에 갔다. 아유타야는 북부의 수코타이 왕국이 남하하여 세운 왕조로서 12세기경 그 일대에서 가장 강성한 국력을 자랑하던 앙코르왕국을 일거에 무너뜨린 제국이다.
지금도 타이가 이웃 캄보디아에 대해 은근한 우월감을 감추지 않는 것도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유일하게 독립국가를 유지했다는 근대사의 성적도 있지만 캄보디아가 자랑하는 앙코르제국을 무너뜨렸다는 과거사의 성적표까지 포함한 연유이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법.
강자를 꺾은 강자 역시 또 다른 강자에게 챔피언 벨트를 넘겨줘야 하는 것이 싸움의 법칙. 강력한 위용을 자랑하던 아유타야제국 또한 이웃 버마의 몬족에게 초토화되고 400여 년 전 지금의 방콕지역으로 이주한다.(아유타야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자세히 하기로 하자)
역사의 상흔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아유타야는 폐허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폐허감이 번쩍번쩍하고 휘황찬란하게 장식해놓은 방콕의 사원보다 훨씬 인상 깊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득실대는 번잡함 없이 여유롭고 한가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러한 가운데 누릴 수 있는 고즈넉함은 또 얼마 만에 누려보는 마음의 보석인가. 나는 이 보석을 정성스레 목에 걸고 유적을 돌아보았다.
이역만리 이국의 사원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찬란한 영화를 누린 아유타야제국도,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을 제왕의 영욕도, 세월의 무심과 역사의 허무 속에서 덧없이 스러져 갔구나. 이들이 이럴진대 하물며 나 같은 소인이 더 이상 바랄 게 무엇 있고, 더 이상 가질 게 무엇 있단 말인가.
삶의 무상감이라기보다는 업의 윤회를 거스를 수 없는 개인의 운명과 그 운명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 보았다. 폐허의 탑 위에서 코리아에서 온 일개 필부는 그렇게 소회를 남겨 놓았으나 다른 나라의 어떤 사람은 이곳에서 제국의 웅혼함을 엿보고 생의 의지를 충만하게 채워서 갈지도 모른다. 지구촌의 어떤 사람들이 무슨 감회를 이곳에 뿌려놓고 갈까 사뭇 궁금해지기도 하는 아유타야의 유적지이다.
이틀에 걸쳐 아유타야를 둘러 본 다음, 밤기차를 타고 북부의 중심도시 치앙마이로 갔다. 그곳 역시 많은 여행객들로 붐볐다. 이곳 관광의 중심은 자연을 놀이로 삼는 정글 트래킹이나 래프팅이 주종을 이루었다. 나는 이번 여행의 목적이 단순한 즐김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이들 놀이관광을 외면하고 고산족 마을을 탐방했다.
그러나 박제화되고 상업화된 그들의 생활에서는 내가 기대했던 느낌이나 사유의 덤을 얻진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아유타야의 유적지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곳과 비슷한 분위기를 간직하면서 더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수코타이와 롭부리라는 곳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치앙마이로 돌아온 후 수코타이로 일정을 잡았다.
같이 툭툭을 타게 된 러시아 여인 엘레나
배낭을 짊어지고 치앙마이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다섯 시경. 매표소에서 수코타이행 티켓을 끊으려고 하니 당일 표가 매진이 됐다고 한다. 그날은 주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수코타이가 대도시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왜 표가 없는지 조금은 의아했다. 매표원들이 영어를 하지 못해 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어긋난 계획 때문에 망연하게 서 있는데, 대합실 입구에서 서양사람 치고는 조그마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의 행색이 이상하다 못해 약간의 거부감이 들 지경이다. 여자가 배낭을 앞뒤로 멘 것까지는 이곳에서야 예사로운 모습이니까 그러려니 하더라도 차림이 좀 엉뚱했다.
머리는 스님들처럼 박박 깎았고 옷은 상대방의 시선이 민망할 정도로 가슴이 푹 파인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팔과 다리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우리네 문화적 시선으로는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겉모습이다.
그녀 역시 수코타이행 창구로 오더니 표가 없다는 매표원의 답을 듣자 조금도 의아해 하지 않고 돌아서는 것 아닌가. 나는 왜 표가 없는지 그 이유라도 알고 싶어 그녀에게 다다가 말을 건넸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다음날이 국왕의 생신날이라 오늘부터 연휴가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동이 많아 자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시내로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차역으로 가보기로 했다. 툭툭을 타려고 나서는데 이번에는 어떤 여자가 "헬로우" 하고 나에게 말을 건다. 돌아보니 서양여자인데 이 여자 역시 배낭을 앞뒤로 메고 있다. 차림은 아까의 여자와 달리 평범했다. 그녀가 나에게 기차역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나 역시 기차역에 갈 예정이니 같이 가자고 했다. 물론 차비는 반반이다.
흔히들 배낭객들을 같은 배낭객들을 보면 동류의식이 솟아나곤 한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자연스런 감정일 것이다. 어딜가면 싸고 좋은 게스트하우스가 있다던가, 어디는 명성만큼 제 몫을 하지 못한다거나 따위의 각자가 체험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택시를 같이 타면 요금을 절약할 수 있는 등의 장점도 있을 뿐만 아니라 현지인에 비해 비교적 안전하기도 한 것이다.
그녀는 짜기가 소금 이상이었다. 정해진 가격 없이 일일이 흥정을 해야 하는 이곳의 툭툭은 일면 재미있는 측면도 있지만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많다. 아무래도 여행객보다는 현지 기사들이 한 수 위이기 때문이다. 나도 배낭여행 며칠 만에 베테랑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바가지는 안 쓸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흥정은 대개 외국인을 대상으로 부르는 가격의 이분의 일내지 삼분의 일 수준으로 타결되곤 했다. 그녀와 내가 터미널 바깥으로 나가자 툭툭 기사들이 호객을 했다. 기차역까지 얼마냐니까 백 바트라고 했다. 우리가 비싸다는 표정을 지으니까 오십, 사십 바트까지 내려갔다. 사십 바트면 각자가 이십 바트, 나는 그 정도면 적어도 바가지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삼십 바트를 불렀다. 기사가 안 된다고 하자 그녀는 단호하게 돌아섰다. 그녀는 나에게 삼십 바트까지 깎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십 바트가 시장가격이자 마지노선였던 모양이었다. 몇 번 더 시도를 해보았지만 다른 기사들도 그 이하에는 가지 않겠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래도 그녀는 떼쓰는 아이처럼 삼십바트를 고집했다.
나는 은근슬쩍 짜증이 솟기 시작했다. 지나친 흥정으로 시간만 잡아먹다 기차를 놓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사십 바트를 주고서라도 빨리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내 그녀도 수락했다. 오케이, 삼십 바트에 가기로 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지나가는 툭툭을 세웠다.
내가 사십을 부르려니까 그녀가 또 써티밧! 오케이? 하고 외친다. 이 여자 또 왜이래?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의외로 기사의 입에서 예스 사인이 떨어졌다. 그녀는 보란 듯이 나에게 씽긋 웃어보였다. 나 역시 서양사람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의 성공을 축하해주었다.
툭툭 안에서 나는 십오 바트가 아닌 이십 바트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가 거스름을 내주려는 것을 말렸다. 어차피 혼자서라도 사십 바트를 지불할 용의가 있었는데 당신 때문에 이십 바트를 절약했으니 나로서는 이 가격에 만족한다. 거기다 또 오 바트까지 덤으로 생겼지만 그 덤은 당신의 노력이니만큼 당신이 가져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녀는 고맙다고 하면서 순순히 받았다.
치앙마이 역까지 갔으나 예상했던 대로 기차표 역시 구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차피 아무런 일정도 잡을 수가 없으니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하자 그녀도 쾌히 승낙했다. 우리는 배낭객답게 노점에 가까운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통성명을 했다. 그녀는 러시아에서 왔고 이름은 엘레나라고 했다. 북부의 매홍손이라는 곳에서 버스로 7시간이 걸려 조금 전 치앙마이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그녀는 오늘밤 침대열차로 방콕에 갈 예정이었는데 차표가 없어서 다시 야간버스라도 알아보아야겠다고 한다.
그녀는 서른이 되는 기념으로 세계일주를 계획했다고 했다. 시베리아의 이루크추크를 출발하여 몽골과 중국대륙을 관통한 다음 윈난성에서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왔다고 했다. 앞으로의 일정은 말레이반도를 따라 싱가폴까지 간 다음, 인도네시아로 갔다가 거기서 호주대륙으로 건너가고 그 다음에 남미대륙으로 갈 계획이라고 했다. 기간은 일 년 정도로 예상하고 현재 삼 개월 동안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여행담과 계획을 듣고 나자 그녀가 그렇게 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용기와 모험정신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그리고 당신의 여행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약간의 기부금을 내고 싶다고 하며, 지갑에서 우리나라 돈 만 원짜리 하나를 꺼냈다. 십 달러가 조금 안 되긴 하지만 유용하게 써달라고 하자 그녀는 고맙게 받았다.
만 원짜리를 손에 쥔 그녀는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다. 육백 년 전의 왕인데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문자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문자를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데에 호기심을 보였다.
나는 싱가포르 공항에 가면 한국계 은행이 있으니 그곳에서 달러로 환전하면 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만원을 지갑이 아닌 수첩의 갈피에 잘 접어 넣고 있었다. 그러더니 자기는 러시아 지폐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동전이라도 받아달라면서 러시아 동전 하나를 주었다.
코리안은 처음 만났는데 모두가 당신처럼 친절하냐기에 물론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더니 코리안은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던데 진짜냐고 물었다. 세계 속에서 한국인 이퀄 개고기로 등치되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불확실한 정보 속에서 도식화된 편견으로 타지역 사람들을 바라보기 일쑤다. 가령 아프리카 사람들은 무조건 맨발이고, 프랑스 사람들은 허구헌 날 배터지게 먹고, 스페인 사람들은 맨날 춤만 추는 식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한국사람이라고 모두가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아니며 더군다나 개고기가 주식은 아니라고 했다. 나의 경우에도 개고기는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 역시 러시아 사람들이라고 모두가 보드카에 취해 사는 것은 아니라고 했고 자기 역시 술을 즐기지 않는 다고 했다.
우리는 남국의 어느 한 도시에서 지구촌 사람들의 문화상대주의 및 집단의 문화와 개인의 취향이 다를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음식이 다 비워지고도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더하며 삼십분 정도 더 있다 일어났다. 그리고 기부는 기부고 계산은 계산인지라 저녁은 배낭객의 룰대로 더치페이했다.
저녁을 먹은 다음 그녀는 다시 버스터미널로 가서 야간버스를 타고 방콕으로 가겠다고 했다. 버스에서 쪼그려 앉아 밤을 지샌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힘들겠다는 위로의 말을 건네자, 그녀는 어차피 고생을 각오한 여행이라고 했다. 방콕에서 숙소는 정했냐니까 매홍손에서 만난 프랑스 남자에게서 게스트하우스를 소개 받았다고 한다(그녀에게 게스트하우스 명함을 보여달라고 한 뒤 적어놓았다가 며칠 뒤 나도 거기 머물렀다).
나는 남에서 북으로 올라왔는데 그녀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간다. 이 넓은 세상에서 그녀와 나는 무슨 인연으로 남국의 어느 도시에서 이렇게 만났다 헤어지는 것일까. 여행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인생의 신비이다. 나는 이제 800킬로미터를 여행을 했는데 그녀는 벌써 8000킬로미터를 여행했다. 그것은 단순한 공간적 거리가 아니라 심리적 거리이자 인내의 거리이기도 하다. 끙, 하는 기합을 넣으며 무거운 배낭을 둘러메는 그녀를 보자 지금까지 내가 너무 소심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박머리 여자 쉐이커, 팔로마
다음날 오전 버스 터미널에 가니 어제의 그 박박머리 여자도 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수코타이행 버스는 오전에 한 차례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같이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전날에 비해 한산하였다. 몇몇 배낭객도 보였다.
그녀는 내가 앉은 좌석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녀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스페인에서 왔고 이름은 팔로마라고 한다. 버스가 출발하자 소음 때문에 대화가 중단되었다. 그녀는 배낭에서 책을 꺼내더니 내내 독서삼매에 빠져든다. 어라, 겉모습과 다르게 제법 학구파 같은 폼도 잡네. 속으로 생각했다.
지루한 다섯 시간의 여행 끝에 수코타이에 도착했다. 수코타이는 800년 전 수코타이 왕국의 사원이 있는 역사공원이 유명하다. 버스에서 내리자 그녀는 마치 자기 고향에나 온 듯이 거침없이 행동했다. 나와 두리번거리고 있는 다른 두 명의 백인남녀에게 역사공원을 갈 거면 같이 가자고 했다. 물론 거절할 이유는 없다. 교통비를 사분의 일로 줄일 수 있으니까.
그녀는 영문판 론니플래닛(여행안내서)을 들고서는 책에서 추천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으니 여러분들도 가고 싶으면 자기를 따라 오라고 했다. 두 명의 남녀는 독일에서 온 커플이었다. 그녀는 그들과 얘기할 때는 독일말로 하였다. 나와 얘기할 때는 영어였는데 이제 독일말까지?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십 분 정도 달려 역사공원 입구에 도착하자 나나 독일남녀나 두 말 없이 그녀가 가는 곳을 따라 갔다. 왠지 그래야만 될 거 같아서였다. 그녀 말대로 멋진 게스트하우스가 있었고 가격도 적당했다.
짐을 풀고 난 다음 식당에 가자 그녀가 앉아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일어 합석을 해도 괜찮겠냐고 하자 그녀는 ‘노 프로블럼’ 하며 흔쾌히 승낙한다. 나이는 스물여섯 살이고, 현재 한 달째 동남아 여행 중이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 달 가량을 더 여행할 계획이란다. 가장 궁금했던 사항인데 직업은 뭐냐니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칵테일 매니저란다. 바르셀로나의 술집에서 칵테일을 제조한다고 하였다. 나는 첫인상과는 달리 차안에서 본 그녀의 독서 모습과 능란한 외국어 실력에 내심 예술가 정도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칵테일매니저가 무얼 하는지 내가 모르는 걸로 생각했는지 앞에 있는 맥주병을 잡고 아래위로 흔들며 입으로 슛슛 소리를 내며 칵테일 만드는 시늉을 한다. 내가 바텐더? 하자 그녀는 오, 노우. 하더니 '셰이커'라고 했다. 바텐더는 단순하게 손님들을 상대하면서 술을 팔 뿐이고 셰이커는 말 그대로 흔들어서 칵테일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는 셰이커보다 한 단계 높은 매니저라고 했다.
대화를 하다 보니 그녀의 남자친구는 변호사란다. 그는 바빠서 같이 오지 못했단다.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만 뿌리 깊은 우리네 편견으로는 그녀의 직업과 남자 친구의 직업이 잘 매치되지 않았다. 그녀는 칵테일 매니저라는 일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오히려 자부심까지 가졌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대부분 주어진 일을 정해진 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차원이 낮은 일이라고 했다. 반면 칵테일은 자기만의 창조적인 세계가 있다고 한다. 무한한 맛과 향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라고 했다.(It's very very my pleasure~: 'very'를 두 번이나 강조했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마실 것을 섞어보고 싶어 여행도 자주하는 편이라고 했다.
사회적 권위나 타인의 인정으로만 평가하는 우리네 직업관. 내 안의 낡은 편견을 그녀는 셰이커답게 마구 흔들어 버렸다. 그런 다음 나의 편견과 그녀의 가치관을 섞어낸 달콤쌉싸름한 칵테일이 내 안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새로운 일에 대한 마음가짐이 필요했던 나는 이 조그마한 서양여자에게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과 약간은 넓어진 시야를 얻었다.
점심을 마치자 그녀에게 사원엔 언제 가냐니까. 느긋하게 쉬다가 선선한 저녁 무렵에 가겠다고 한다. 그러더니 나에겐 언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다음날 롭부리에 가야하기 때문에 지금 일어서야 한다니까 그녀는 오늘 하루 만에 수코타이를 다 보겠다고요? 하며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만든다. 그러면서 여행을 왜 그렇게 급하게 하느냐고 했다. 일정 때문에 그렇다고 하자 "당신은 여행이 아니라 마치 일하러 온 것 같군요" 한다.
그 말을 듣자 나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경쟁적으로 살아 왔구나 싶었다. 그래서 여행도 경쟁하듯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음미한 게 없었다. 경쟁을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인데 어느새 여행도 경쟁적으로 하고 있다.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여행을 위한 여행을 한 것이다. 여행의 목적과 방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그녀의 코멘트가 수코타이의 유적처럼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수코타이의 유적지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나올 무렵, 팔로마가 DSLR 커다란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였다. 비록 무너진 유적지지만 나는 감히 올라서지 못하고 주변에서만 맴돌았는데 그녀는 거리낌없이 올라가 사진을 찍고 있다. 그 행동이 천방지축이라기 보다는 거침없는 열정으로 읽힌 것은 내가 그녀에게서 얻은 또 하나의 편견 때문일 것이다. 요모조모 프레임을 맞추며 사진에 열중하는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다, 나는 살짝 사진 한 장을 찍고 그냥 지나쳤다. 빙그레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않고.
치앙마이에서 만난 씩씩한 두 여인. 러시아와 스페인에서 온 이 두 여인을 통해 나는 짧은 여행이 아닌 긴 인생이라는 여정 전체를 조망해 보았다. 세계일주라는 큰 스케일을 위해 작은 돈도 아끼는 러시아 여인, 자신의 일과 생활에 당당하고 여유로운 스페인 아가씨.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보는 것이 아니라 만남에 있다는 걸 깨우쳐 준 그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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