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농촌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농업전문가도 아니라서 책 이야기를 통해 농촌문제를 환기하고 싶었다."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생각의 나무) 저자 정진국씨는 강연회 내내 농촌문제를 언급했다. 가장 시급한 농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당장 10년 내에 엄청난 문제가 생겨, 상황이 매우 급박한데 비해 우리는 너무 태연자약하고 있다는 토로다.
책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가 꼭 그랬다. '책'이라는 매력적인 테마와 함께 유럽여행을 꿈꾸는 독자는 첫 페이지부터 심각한 문장과 만난다.
"러시아까지 가세한 강대국 투기꾼들이 부동산을 공략하면서 우선 책방들이 희생됐다. 물론 컴퓨터와 휴대폰 등 디지털 제품 가게도 책을 몰아내는 데에 한몫했다. 농촌은 농촌대로 작은 마을이 통째로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 도시에서라면 다른 것이 빈 것을 채우지만, 농촌에서는 이마저 여의치 못하다."(7쪽, 책머리)
지난 18일 영풍문고 개점 16주년을 맞아 도서포털 리더스가이드와 생각의 나무, 영풍문고가 공동으로 주최한 <저자와의 만남>에 정진국씨가 초대됐다.
오후 5시에는 사인회가 열렸고, 7시에는 강연회가 이어졌다. 강연회에는 30여명의 독자들이 참여해 관심을 보였고, 빔프로젝트로 저자가 찍은 사진을 직접 상연하는 등 다채로운 기획이 펼쳐졌다.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는 저자가 경향신문에 2007년 8월 24일부터 2008년 3월 7일까지 24회에 걸쳐 연재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신문 연재 당시의 기획취지를 보아도 자본에 대한 문화의 고사 위기를 우려하는 분위기가 읽힌다.
"대형 서점과 인터넷의 거센 조류에 밀려났던 중고·중소 서적상들이 중심이 된 책마을 조성은 지방문화의 활력을 도모하는 정치실험이자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동참을 요구하는 사회운동, 나아가 다국적 거대자본에 대항하는 반세계화운동이다." (경향신문 2007년 8월 24일, 편집자주)
이쯤 되면 이 책의 정체가 드러난다. 우리 나라의 상황에 비춰본다면, 거대자본과 권력, 부자언론이 영합해 언론시장을 하나씩 잠식해 가는 상황에서 뜻있는 인사들이 자유언론의 완충지대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유럽의 지사들이 거대 자본에 맞서 농촌과 서점, 나아가서는 문화를 지키기 위해 '섬'을 만들려는 오랜 노력의 흔적이 담겨 있다.
강연을 하기 전에 영풍문고 로비에서 저자 사인회가 있었다. 저자의 사인을 받기 위해 독자들이 줄을 서고 있다.
외국인이 세운상가 재개발 소식 먼저 알려줘
사회주의가 안정적으로 정착됐다는 프랑스, 북유럽 할 것 없이 전부 '폭탄'을 맞았다. 러시아 마피아가 주도하는 거대 자본이 유럽의 도시들을 마음대로 분탕질하고 있는데 당할 재간이 없다. 하지만 문화를 사랑하는 유럽의 지식인들은 문화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농촌과 손을 맞잡고 책마을을 탄생시켰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7월 17일 정씨는 얼마 전 외국인 친구들에게 '대재앙'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메일을 받았다고 한다. 메일을 보낸 친구는 자기 친구가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로 있는데, 종로3가 세운상가 재개발 한다는 소식을 전해주더란다. 12월에는 확정이 된다는 공문을 거쳐서 이제 종묘 일대, 다시 말해 서울에 남은 거의 유일한 문화단지가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외국인 친구는 하나의 구를 공원으로 만들어도 숨을 쉴까 말까인데 이를 파괴하려는 시장이라는 사람은 참 희한하고, 거기에 또 가만히 있는 국민들은 또 무어냐며 비난했다고 한다. 우리도 모르는, 정확히 말하면 관심 갖지 않았던 사실을 외국인이 더 상세히 알고 있는 엉뚱한 사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나라에 근사한 책마을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때문에 저자는 "우리나라에 책마을을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았고 애당초부터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고 저술 취지를 밝혔다. 그는 우리나라의 책마을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이유를 몇 가지 지적했다.
첫째는 당사자들의 의지 문제이다. 우리나라는 유럽의 농촌 공동체 일원들과 고서점가 관계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협심하고 정부가 이를 후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거꾸로 위에서 구상을 엉성하게 해서 억지로 짜맞추고 공금의 시혜를 받는 방식이다.
지방 문화 축제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성공한 사례 거의 없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유럽도 실패한 사례가 적지 않은데, 처음에는 인기가 좋았지만 혜택만 누리고 떠나버리는 문제점이 오랜 과제다.
둘째는 현실적인 문제다. 즉 책마을을 만든다면 당장 이런 것들을 사가겠느냐 하는 불안함이다.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설득과 촘촘한 기획이 필요한데, 이것을 주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현실적인 불안함에 더 힘을 보태고 있다.
셋째는 세상 사람들이 출판분야를 바람직한 업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출판계의 근로조건만 봐도 알 수 있다. 항상 책과 씨름하기 때문에 야근을 밥먹듯 하고 건강문제가 심각하지만, 출판사에 제대로 된 노조가 없고 파업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런데도 세상은 출판 일을 하면 막연히 멋진 직업, 괜찮은 직업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책마을에 대한 엄청난 구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나눴다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1, 2급 번역작품들이 쏟아져 나와야
우리는 외국의 소식이나 외국사람들의 눈으로 본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서 무척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사건 관련 외신이라도 뜨게 되면 조회수가 엄청나게 늘어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4강에 올랐을 때 외국 언론의 기사를 살펴보기 위해 사람들은 밤을 새곤 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부작용도 많다. 몇몇 언론사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유리한 부분만을 번역해 여론을 왜곡하는 잔꾀를 쓰는 등 외국 상황에 밝은 사람이 없다보니 웃지 못할 헤프닝도 많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외국의 문헌정보가 우리에게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번역의 문제점이야 새삼 거론할 필요 없지만, 고급 정보의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저자가 든 몇 가지 예 중에서 미국과 반 고흐의 예는 충격적이다. 미국 건국을 형성한 두 축은 청교도와 케이커 교도라고 할 수 있는데, 커이커 교도의 경우 할리우드에서 병폐적인 집단으로 다루기 일쑤였다. 그래서 중요한 문화가 할리우드화 돼 왜곡 현상이 매우 심각하다는 주장이다.
반 고흐는 대표적인 왜곡 사례다. 국내에 소개된 텍스트를 종합해 보면 반 고흐는 사랑스럽고 섬세하고 감상이 아름답고 순결한 순교자로 소개된다. 정씨는 일부러 반 고흐의 실체를 부각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반 고흐에 대한 인상을 환기시켰다.
그에 의하면 반 고흐는 여동생을 추근대며 결혼하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고, 애 딸린 창녀와 동거를 해 부모의 속을 다 태워놓기도 했다. 용돈을 받으면 그 날로 다 마셔버리면서도 자존심은 있는지 시종 고압적인 자세로 가족을 대했다고 한다.
반 고흐를 나쁘게 말할 수만은 없지만, 반 고흐의 실체를 공정하게 알림으로써 왜곡된 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저자가 강연 중간중간에 말한 대로 '우울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지만, 참석자들은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저자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 중에서는 번역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출판에 깊숙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애초에 1시간 반 정도로 계획된 일정은 사진 설명과 질의문답이 길어지면서 예정 시간보다 1시간을 넘겨서야 끝낼 수 있었다.
저자가 책을 완성시키면서도 끝내 아쉬워했던 부분은 지면 사정 때문에 담지 못했던 '사정'이다. 독자들의 리뷰를 일일이 확인했다는 저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못했는데, 그것을 독자들이 잘 지적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로 강연회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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