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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후 7시 20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KBS 본관 앞은 어수선했다. '이명박 정부 방송장악·네티즌 탄압 중단촉구 제 사회단체 기자회견'이 마무리 되고 촛불문화제가 분주히 준비되고 있었다. 평소 촛불시민들이 앉아 있었던 본관 앞 계단은 '민중의 곰팡이' 전경들이 차지하고 앉았고, 도로 건너편엔 전경버스 4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촛불시민의 대오를 통제하려던 KBS 안전관리팀 직원들은 시민들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 와중에 안전관리팀 직원 한 명이 119 구급차에 실려 가는 소동도 벌어졌다. 경찰측 방송차는 "KBS가 시설보호요청을 해왔다"라며 불법집회를 해산하지 않을 시에는 "부득이하게 공권력을 행사할 것이다"라는 선무방송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의연한 촛불들
촛불이 시작된 지 이날로 74일. 200여 명 가까이 되는 시민들은 경찰의 위협에도 요지부동, 초연했다. 어수선함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공연과 자유발언이 평화롭게 이어지고, 발언이 끝날 때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어 화답했다.
우리는 촛불문화제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오늘도 변함없이 촛불을 밝힌 시민들을 인터뷰했다. 다소 식상한 질문들을 던지며 수줍게 '오마이뉴스 인턴기자'임을 밝혔다. 굳이 인턴기자라는 낱말을 또박또박 힘줘 말했다.
그 이름에 숨어있는 '처음'을 이해해달라는 뜻이었다. 시민들은 이 '어설픈 기자'들을 오히려 격려해주며 "오마이뉴스 짱!"을 외치기도 했다. 아, 이 물색없는 뿌듯함이란….
60여 차례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김동찬(69)씨는 4·19 혁명에 참여한 경험을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는 경찰의 물대포와 과잉진압에 대해서 "옛날 전두환 때도 아무 시민이나 연행하지 않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공영방송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조·중·동과 다를 바 없이 된다"며 늙고 병약하지만 모인 젊은이들과 함께 "몸으로 막아 내겠다"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수원에서 달려온 가톨릭대 신학과 만학도 김경숙(50)씨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책임감"으로 집회에 참여한다고 했다. "촛불이 좀더 많이 타올라야 한다"며 "이웃주민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사람만큼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지만 옳고 그름을 알기 위해서는 현장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집회 틈틈이 길게 이어져 오는 촛불과 공영방송 사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아래는 나름 '전문 시위꾼'을 자청하는 장일호(26) 인턴기자와 '두어 번 조용히' 집회에 참여해 본 적 있는 정지은(22) 인턴기자의 대화 내용이다.
일호 = "촛불집회가 길어지니까 나도 다 지친다(웃음). 누구말대로 촛불을 놓고 싶어도 못 놓게 만드는 정권인 것 같아."
지은 = "응, 근데 언니는 이런 집회 자주 나와 봤어? 나오면 같이 구호도 외치고 어울리고 그런 편이야?"
일호 = "어, 지금도 같이 촛불 들고 구호 외치면서 소리도 좀 질러주고 사람들하고 같이 놀아야 하는데 취재수첩 들고 있으려니 영 어색하고 몸이 근질거려(웃음)."
지은 = "난 집회 같은 건 통틀어서 학교에서 한 두 번 나와 본 게 다야. 나와도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있다 가는 편이었지."
"촛불시민에게 감동받았어"
일호 = "근데 ‘공영방송 사수’에 촛불을 든다는 거에 대해서 넌 어떻게 생각해?"
지은 = "왠지 마음이 짠해. 사실 시위에 참가하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공영방송 사수’라는 문제가 수도 민영화나 건강보험 민영화처럼 당장 자기 삶에 실질적인 손해를 입히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이렇게 다들 자기 시간 들여서 언론 자유를 위해서 시위하다니 감동받았어. 언니는?"
일호 = "글쎄. 공영방송을 사수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지. PD수첩이나, YTN도 그렇고. 요즘 이명박 정부의 그야말로 ‘언론장악’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거야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거니까.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건 아니지만 난 이상하게 마음 한 쪽이 자꾸 무거워."
지은 = " 어떤게 언니 마음을 무겁게 하는데?"
일호 = "그러니까, 이를테면 비정규직 문제 같은 거. 사안의 중요성을 느끼는 거야 각자가 다르겠지만, 나한테는 그게 더 크게 느껴져.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얼마나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 이슈화하려고 노력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그다지 사수하고 싶은 마음도 안들기도 하고(웃음).
여기 모인 사람들한테도 아쉬움이 생기곤 해. 확률이 낮다는 광우병을 내 문제라고 생각하는 감수성과 예민함이라면, 공영방송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말야. 850만명이 넘는 비정규직에 대해서도 내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 같은 거랄까. 실제로 비정규직은 많은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런데 사람들이 잘 인식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인식하려고 하지 않는 건지, 난 그게 참 궁금해."
촛불의 마음이 더 필요한 곳을 생각하다
지은 = "그래, 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사회에 촛불이 필요한 곳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일호 = "얼마 전에 이랜드 김경욱 노조위원장님이 그러시더라. 이랜드가 장기투쟁사업장이잖아. 그건 알지? 근데 그 분이 ‘촛불에 절망했다’는 말을 했었어. 그 말이 나는 참 마음 아프더라."
지은 = "얼마나 상심이 컸으면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속상하다."
일호 = " 어차피 이명박 대통령 임기 내에는 촛불 내리기 힘들 것 같은데(웃음), 촛불들이 여유를 갖고 길게 보고, 또 그러면서 정말 촛불이 필요한 곳에 찾아가서 함께 연대하고 마음을 나눴으면 좋겠어."
지은 = "응, 촛불이 정말 필요한 곳에서도 함께 들어질 수 있도록 우리가 좋은 기사 많이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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