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금희의 여행, 아오지에서 서울까지 7000km
- 글 : 최금희
- 그림 : 임양
- 펴낸곳 : 민들레(2007. 8. 28.)
- 책값 : 9000원
(1) 숱하게 죽을 고비 넘기고 찾아온 남녘땅에서
<통일로 가는 길>(1999), <사람답게 살고 싶소>(1999), <북한사람들이 말하는 북한 이야기>(2000), <1999 민족의 희망찾기>(1999),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1999), <고난의 강행군>(1999), <정말이지 살아남는 것이 목표입니다>(1997) 같은 책들이 한동안 꾸준히 나왔으나, 요즈음은 소식이 뜸합니다. 눈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북녘을 떠나는 사람이 수없이 늘고 남녘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나날이 늘지만, 이들 이야기가 책으로 엮이는 일은 드물 뿐더러 속깊은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더욱 드뭅니다.
오히려 새로운 이야기가 꾸준히 나와야 하고, 북녘 사람과 삶터와 사회를 거의 모르는 남녘 우리들로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찾아서 읽어야 할 테지만, 세상은 거꾸로 흐릅니다.
..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왜 그러니?” “아니다.” “왜? 한국 애들과 싸웠니?” “아니! 내가 왜 그들과 싸우나? 통일도 바라지 않는 애들인데.” “뭐?” “학교에서 선생님이 통일을 원하는 사람 손들라고 했는데 두 명밖에 없더라. 나머지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더라.” “왜?” “통일 되면 한국이 못 산다고, 그리고 북한사람들 무섭다고…….” 그들은 만나 보지도 못한 북한사람을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탈북자인 우린 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었고,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 (213쪽)
‘먹고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1950년대나 1960년대나 1970년대나 1980년대나 1990년대나 2000년대나 ‘먹고살기 바쁜데 그딴 데에 무슨 눈길을 둬’ 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기 때문일까요.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하면서 이웃사람하고 콩알 한쪽 나누는 마음을 가꾸는 문화나 삶을 우리 스스로 내동댕이쳤기 때문인가요. ‘그리 넉넉하다고 할 수 없어도 온 식구 끼니 제때 챙길 수 있으니 즐겁다’는 마음으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인가요. 천만 원을 벌면 일억이 보이고, 일억을 벌면 십억이 보이며 십억을 벌면 백억이 보여서 자꾸자꾸 돈버는 일에만 마음이 끌리기 때문인가요.
오늘날 남녘 삶터는 지난날과 견주어 ‘먹고살기에 대단히 나아졌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한뎃잠을 자야 하는 분도 꽤 있고, 일자리 못 얻는 분도 퍽 많으며, 일자리를 얻어도 비정규직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디에 돈을 쓰고 마음을 빼앗기고 몸을 움직이는가를 헤아려 본다면. 한 번쯤 걸음을 멈추고 옆과 뒤를 돌아볼 수 있다면.
.. 내가 생각했던 한국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머리속에 그리던 동포의 느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우리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말투, 생활, 사고방식, 모두가 너무 낯설었기에 자연히 경계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조사실에 먼저 다녀온 언니는 울고 있었습니다. “언니야, 왜 우니?” “금희야, 저것들 사람 아니다. 진짜로 화가 난다.” “왜?” “글쎄, 어머니 아버지가 가짜란다.” … 나는 언니를 울린 그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 피부에 매서운 눈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한국에 대한 환상이 이미 깨어진 나는 그 사람을 쏘아보듯 바라보았습니다. 경계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사람은 씨익 웃으면서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이름은?” “최금희입니다.” “나이는?” “열여덟 살입니다.” “부모님은?” “최○○, 이○○입니다.” “진짜 네 부모 맞아?”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따졌습니다. “선생님은 눈이 없습니까? 선생님 자식에게도 이런 식으로 묻겠습니까?” … 한 사람으로 존중받길 원했는데 무리였나 봅니다 .. (206∼207쪽)
오래된 저잣거리로 푸성과나 열매를 사러 가면,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은 으레 한두 줌 더 집어줍니다. 우리는 아직 500원어치를 따로 살 수 있습니다. 젊은 부부를 걱정해서 더 얹어주는 분들이 ‘잘살면 얼마나 잘살’며, ‘많이 벌면 얼마나 많이 번다’며 그렇게 마음을 써 주실까요. 우리는 저잣거리에 나들이를 가서 여태껏 한 번도 흥정을 해 보지 않습니다. 흥정을 해야 할 까닭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 식구는 ‘배부르게’ 사는지 모릅니다. 은행에 다문(?) 몇 백만 원이라도 돈을 모아 놓으며 뒷날을 걱정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 젊은 나이에 막일판에라도 가서 돈 좀 벌어 놓으라는 소리도 듣습니다만, 이런 소리를 한귀로 흘립니다. 꼭 벌 만큼만 벌고, 우리가 우리 몸으로 겪거나 부딪히는 세상을 느끼고 싶으며, 곧 태어날 아이한테 온마음 쏟아서 함께하고 싶습니다. 아이를 병원에서 낳고 병원에서 몸풀이할 돈을 버느라 뼈를 깎기보다는, 집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서 몸풀이를 하도록 이웃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여쭙고 앞선 이들 책을 찾아 읽으며 스스로 배우며 집을 손질해 놓으려 합니다. 아이를 보육원에 넣거나 밥어미를 두어 돌보게 하고 두 사람이 밖으로 돈벌러 나가기보다는, 우리가 우리 아이와 하루 내내 함께 지내면서 ‘벌지도 않지만 쓰지도 않는’ 삶으로 아이한테 어머니와 아버지 사랑을 듬뿍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더 맛난(?) 밥집을 자가용 몰고 찾아다니면서 바깥밥을 사먹는 일이 그럴싸할는지 모릅니다만, 우리들은 우리 깜냥껏 번 돈으로 저잣거리에서 날푸성귀 장만해서 꼭 두 사람 먹을 만큼만 밥을 해서 버려지는 쓰레기 하나 없이 맛나게 밥그릇을 비우려고 합니다.
.. 한국 가는 길은 점점 불투명해지기만 했습니다. 선교사님을 만날 때마다 부모님은 한국에 갈 방법이 없겠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선교사님이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금희, 성경 공부 잘해?” “네.” “금희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래?” “돈 많이 벌고 싶습니다.” “돈보다 선교가 좋은 거야. 여기서 성경 공부 잘해서, 북한에 가서 전도해야지.” 한국에 가는 것보다 북한에 가서 선교하는 게 먼저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이국땅에서 고생하며 공부도 제대로 못하는 자식들 걱정에 날이 갈수록 몸도 마음도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 (158쪽)
대중교통을 거의 안 타고 자전거를 타는 뜻도 여기에 있습니다. 찻삯을 아끼는 일은 ‘자전거 타기에 뒤따르는 덤’일 뿐입니다. 몸이 튼튼해지는 일 또한 ‘자전거 타기에 얹혀지는 선물’일 따름입니다. 자전거 타기를 하면서 내 몸을 느낍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고 골목을 걷다가 계단에서는 어깨에 짊어지고 낑낑 오르면서 내 삶터를 느낍니다.
자전거를 세우고 구멍가게에 들러 보리술 한 병 사서 마시며 길바닥에 앉아 있으면서 하늘도 올려다보고, 지나다니며 저를 쳐다보는 사람을 마주보며 싱긋 웃고 인사도 하지만 저 또한 그이들을 구경합니다. 찻길을 싱싱 달리기보다는 거님길에서 아기들 아장걸음에 맞추어 아주 느리게 달리곤 합니다.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슬슬 달리곤 합니다. 때때로 큰자전거 뒤에 짐수레를 붙여 짐을 나르기도 합니다. 이때만큼은 찻길 하나를 떠억 하니 차지하면서 신나게 달립니다.
우리 앞집에서 일하는 헌책방 아주머니는, 요사이 자전거 짐칸에 푯말 둘을 묶어서 시청 앞으로 가십니다. “배다리, 우리가 지켜야 할 인천의 역사입니다”라는 글을 적은 동그란 푯말을 들고 서서, 우리 사는 이 골목마을 무너뜨리는 ‘산업도로 반대한다’는 뜻을 시청에서 일하는 공무원들한테 알리려고 하십니다.
.. (대사관 앞에서)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카메라를 든 아저씨 두 명이 우리 쪽으로 왔습니다. 그러더니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대고 우리 모습을 찍는 것입니다. 뭇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괴로웠는데 동물원의 동물 찍듯 우리 가족을 찍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울면서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고, 나는 머리를 무릎에 묻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습니다. … 우리가 어떤 기분일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그저 먹이를 찾던 하이에나의 먹잇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메라를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러워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찍지 마요! 찍지 마요!” .. (154쪽)
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문득문득 느낍니다. ‘그래, 요사이는 꽃제비 이야기를 다루는 책도 나오지 않고, 새터민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내면서 남북이 한겨레로 어우러지자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정작 알고 보면, 남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사랑하고 보듬자고 하는 목소리 또한 안 들리잖어? 수수하게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는 책은 보이지도 않잖어?’
‘머나먼 유럽을 그리워하는 책은 나오고, 미국과 남미를 가로지르는 자전거여행을 한다는 책은 나오며, 일본 문화를 둘러본 이야기책은 꾸준하게 나오지만, 정작 우리 사는 이 땅을 두 발로 튼튼히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책은 하나도 안 나오잖아. 게다가, 한국땅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구경꾼 아닌 한겨레’로 느낀 마음을 담아내는 이야기책도 안 나오고.’
(2) 떠날 수밖에 없던 북녘땅에서
지난주 일요일 낮, 인천 논현동 아파트마을로 자원봉사를 갔습니다. 이날 이곳에서는 ‘새터민 노래잔치’가 열렸고, 노래잔치를 잘 치를 수 있도록 돕는 일꾼으로 저녁까지 움직였습니다. 자원봉사자가 적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새터민한테 도움이 될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싶어서 함께 가는 분 차를 얻어타고 갔습니다.
새터민을 한곳에 모아 놓은 마을 가운데 하나인 인천 논현동은 대중교통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퍽 외딴 아파트마을입니다. 여기에서 시내로 나가기에 만만치 않구나 싶은 한편으로, 자가용을 모는 사람한테는 딱히 어려움이 없을 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새터민을 이 동네 한쪽에 주욱 몰아놓고 살게 하는 일이 이분들을 남녘땅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될까 싶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그리고 왜 아파트에서만 살게 해야 하는지, 여느 다세대주택이라든지 골목집에서 다른 주민하고 어울리도록 할 때가 낫지 않느냐 싶은 생각이 듭니다.
.. 나는 아버지의 눈을 보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장군님 버려 두고 어떻게 갑니까?” “아버지, 굶어죽어도 사회주의 지킵시다!” 작은언니까지 가세했습니다. 아버지는 답답한 듯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너희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일단 건너가서 보여주마. 내가 먼저 건너갈 테니 내 뒤를 따라와라.” .. (136쪽)
노래잔치에 나오는 새터민들은 모두들 남녘나라에서 사랑받는 대중노래를 부릅니다. 초등학교를 다님직한 어린 계집아이들은 ‘섹시’와 ‘남자친구’라는 말이 되풀이 나오는 어느 여자 노래패 노래를 춤까지 곁들이면서 부릅니다. 말씨에 함경도나 평안도 높낮이가 남아 있습니다만, 쓰는 말투는 남녘사람하고 다를 바 없습니다. 아이들 말씨에서는 북녘 말씨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이들 옷차림이나 어른들 옷차림은 자원봉사를 온 사람들 옷차림과 견주어 퍽 고급스럽게 보입니다. 아파트마을 아이들이 타는 자전거는 제가 타는 자전거(20만원)보다 비싼 녀석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우리 여느 이웃이 입는 옷, 우리 여느 이웃이 쓰는 물건이 퍽 초라하거나 후줄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빨리 ‘남녘사람들 물질주의에 쉽게 빠져드는구나’ 싶어 고개를 젓습니다. 똑같은 새터민인 <금희의 여행>을 쓴 최금희네 아버지는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하나원 나와서 가장 먼저 책장을 만들어 주”었고, “책을 산다고 하면 서슴없이 돈을 주시지만 옷을 산다고 하면 입던 옷을 입으라고 하”였다고 하며, “가끔 외식을 해도 될 텐데 아버지는 ‘그 돈이면 집에서 맛있는 거 며칠을 해 먹을 수 있어.’하(249쪽)”셨다고 합니다.
.. 1996년, 북한의 식량 사정이 더 나빠지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는 교시가 내려졌습니다. 강냉이 뿌리와 배추 뿌리를 주식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김정일이 선포한 것입니다. 강냉이 뿌리뿐 아니라 벼 뿌리, 나무 껍질, 심지어는 강냉이 대까지 가루 내어 먹었습니다 .. (125쪽)
저녁 여섯 시 무렵, 노래잔치는 끝나고 잔치 연 쪽에서 마련한 선물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원봉사 하러 온 사람들은 곳곳에 널린 쓰레기를 주워서 나누어 담고 상자와 종이를 차곡차곡 따로 모읍니다. 큰 비닐에 페트병과 깡통을 따로 나누어 놓았으니, 이곳 분리수거 쓰레기통 옆에 놓고 가도 됩니다. 그렇지만 아파트 지킴이 할아버지는 못마땅해 합니다. 뒷자리는 말끔하게 치워 놓고 쓰레기는 깨끗이 나누어 놓고 쓰레기봉투까지 사서 담아 놓았는데. 몇몇 분들이 머뭇머뭇하다가, 쓰레기봉투는 남구청 것이니 여기에 둘 수밖에 없고, 상자와 깡통 들은 우리 동네로 가져가서 동네에서 재활용품 모으는 분들한테 드리기로 합니다.
자리를 치우고 쓰레기를 가르는 동안, 노래잔치에서 노래를 부른 아주머니 한 분이 ‘나는 다른 일도 빠지고 나와서 그렇게 노래를 잘 불렀는데, 노래도 못 부른 그런 꼬맹이들한테는 선물도 다 주고 왜 나한테는 안 주느냐’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모든 참가자한테 퍽 값나가는 다리미를 하나씩 주었지만, 그 아주머니한테는 참가상 다리미만 돌아갔던 터. 잔치 연 사람들하고 한참 실랑이를 합니다만, 더 내어 드릴 선물은 없는 노릇.
자원봉사를 하는 우리는 조용히 뒷갈무리 마친 다음, 물건을 짐차에 싣고, 차에 나누어 타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에 닿은 우리 두 사람은 밥을 해 먹을 힘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저 혼자 집으로 올라가 밥통에 남은 식은 밥을 도시락에 담습니다. 가까운 닭집으로 갑니다. 닭 한 마리 시켜서 보리술 석 잔 마십니다. 말없이 술잔을 비우고 닭고기를 반참 삼아 밥을 먹습니다.
.. 사형 집행은 계속되었고 사형 당하는 사람들의 죄명도 다양해졌습니다. 강냉이 이삭을 훔쳐서 사형 당하고, 고위급 간부 자식이 도박을 했는데 그 누명을 써서 사형 당하고, 길 가는 여자 시계를 빼앗아 사형 당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무조건 공개 처형 장면을 보게 했습니다 .. (118쪽)
이튿날 아침, 찌뿌둥한 몸으로 일어나 부랴부랴 서울 나들이를 갑니다. 살림살이가 어렵게 된 서울 대학로 인문사회과학 '이음책방' 아저씨한테 이야기를 듣기로 했기에.
'이음책방'에 가기 앞서 성균관대 앞 '풀무질'을 잠깐 들릅니다. 책방 '풀무질'을 찾아가는 길에 보니, 아스팔트 길바닥 한쪽을 죄다 뜯어내고 무슨 돌을 깔아 놓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풀무질'에 닿아 아저씨한테 이야기를 들으니, 구청에서 ‘올해 예산을 다 소비해야 해서 하는 일’이라며, 육십 몇 억을 들이는 공사를 한다는군요.
한쪽은 대학로에 문화를 심으려고 자기 돈 다 털어가며 빚을 지면서 일을 하고, 한쪽은 서민들 세금을 받아서 꾸리는 행정 예산을 빨리 써서 없애야 한다면서 길바닥 뒤집고 있고.
.. 보지도 못한 증조할아버지가 지주였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뿌리깊게 박힌 성분제도 때문에 큰언니는 십 년 넘게 운동과 함께 키워 온 꿈을 버려야 했습니다 … 그렇다고 대학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운동만 해 온 언니는 간직했던 꿈을 고스란히 접고 아버지와 함께 탄광에서 일을 했습니다 .. (84쪽)
먹고살 길이 없어서 고향을 등지고 나라를 등지는 북녘사람이라면, 먹고살 길이 많으나 이웃과 나누지 않거나 나누기 싫어서 나라밖으로 떠나는 한편 고향땅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거나 무너뜨리는 남녘사람인가 싶습니다.
성분에 따라서 자기 꿈을 펼치지 못하는 북녘 사회라면, 학벌과 이름값에 얽매여 자기 꿈을 펼치기 어려운 남녘 사회인가 싶습니다.
배 굶는 주민이 있어도 배 굶지 않는 간부가 있는 북녘 정치라면, 마음 굶는 주민이 있어도 마음굶이가 무엇인지 깨닫지 않으면서 자기 스스로 마음 굶으며 똑같이 나뒹굴고 있는 남녘 정치인가 싶습니다.
배우고 싶어도 배우기 어려운 북녘 땅이라면, 배우고 또 배워도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돌아보지 못하면서 가방끈만 길어지는 남녘 땅인가 싶습니다.
..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우리 아버지가 만들어 준 썰매가 제일 좋았습니다. 우리 남매는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겨울을 지냈습니다. 남쪽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추운 곳에서 자랐지만 가끔은 지금 이곳이 더 춥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아마 고향에서 느꼈던 훈훈한 정을 느낄 수가 없어서 그런 듯합니다 .. (29쪽)
틀림없이 배를 곯다 못해 뛰쳐나오는 북녘사람이라지만, 배만 채우면 모든 일이 끝나는 삶은 아닐 텐데요.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남녘 사회는 ‘정착금’과 ‘아파트’는 나누어 줄 수는 있으나, ‘돈에 담는 넋’과 ‘집에 들이는 얼’은 나누어 주지 못합니다.
돈을 바라보며 그렇게 부지런히 뛰었으니 돈은 움켜쥐었습니다만, 돈만 바라보고 사람 넋은 바라보지 않았기에 따뜻한 손길로 돈을 건네지 못합니다. 착한 마음씨로 돈을 베풀지 못합니다. 겉보기에 번들거리는 아파트를 짓는 솜씨는 키웠지만, 오래오래 사는 집이 아닌 돈굴리기 건설업으로 나뒹굴고 있기에, 아파트 한 채 걱정없이 나누어 주기는 하지만, 이 집에 깃들이며 이웃사랑과 이웃믿음을 함께하지 못합니다.
(3) <금희의 여행>이라는 책을 덮으며
.. 북한에서는 한국사람을 ‘미군앞잡이’로, 남한에서는 북한을 ‘빨갱이’로 부르면서 서로가 서로를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며 증오의 싹을 키운 지 50년 … 왜 북한과 남한은 서로를 비방하기에 바쁘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지 안타깝습니다 … 부산사람이 부산사람이고, 서울사람이 서울사람인 것처럼, 나도 함경북도에서 자라난 아오지사람입니다. 14년을 살아온 고향을 잊고 부정한다면 그건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살아온 곳이 좋인지 나쁜 곳인지 판단하기 전에 내가 자란 곳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입니다 .. (233, 237쪽)
책방 '풀무질' 아저씨는 책방 잘 보이는 자리에 <금희의 여행>을 여러 권 쌓아 놓고 사람들한테 ‘이 책 꼭 읽어 보셔요’ 하고 말씀하곤 합니다. 당신 스스로 먼저 읽은 다음 느낌글까지 한 쪽 써서 책손님들한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처음, <금희의 여행>이 나왔을 무렵, 좀 시큰둥하게 느꼈고, 책겉에 적힌 ‘아오지’라는 말이 껄끄러웠습니다. 글쓴이가 아오지사람이었기에 아오지를 적었을 뿐임은 나중에 책을 읽으며 알았고, ‘아오지를 팔아먹는 글월’이 아니냐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러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이라는 마을에는 아이들이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숨바꼭질 하는 아이도 말뚝박기 하는 아이도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왜 아이들이 없을까? … 그러다 서울마을에는 아이들이 모여서 놀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끔 보이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만나곤 하지만, 그 놀이터는 답답할 정도로 작아 보입니다.사방에는 자동차들이 득실거립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찾는 일은 고향마을에서 불 꺼진 저녁에 골목에서 아이들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던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곳이 딱 한 곳 있었습니다.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다 보면 큰 학원을 지나게 되는데,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아이들은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원 어귀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 이곳 아이들의 몸은 종이로 된 교과서처럼 변해 가고 있어서, 경험을 통해서 느끼고 깨닫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교과서와 참고서를 외우기 바쁜 아이들이 다른 것을 생각할 시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 (240∼241쪽)
<금희의 여행>을 덮은 다음,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 다시 훑습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그었던 대목을 다시 읽습니다. 새터민 가운데 이 책을 읽어 본 사람이 있으려나 생각해 봅니다. 새터민 이야기를 하는 분 가운데 이 책을 읽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헤아려 봅니다. 새터민을 좋게 이야기하건 얄궂게 비틀건, 새터민을 돕건 새터민을 뱀눈으로 바라보건, 이 책 <금희의 여행>이나 지난 1999년에 나온 <사람답게 살고 싶소>나 1997년에 나온 <정말이지 살아남는 것이 목표입니다> 같은 책을 한 번이나마 들추어본 사람이 몇 사람쯤 될까 궁금합니다. 일찌감치 판이 끊어진 <정말이지 살아남는 것이 목표입니다>는 헌책방에서 드문드문 눈에 뜨이기에, 보일 때마다 한 권 더 사서 선물해 주곤 하는데, 이 책을 받는 분 가운데 반가운 빛을 보여준 분은 아직 없습니다. 다 알고 있어서 꺼리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아서 꺼리는지, 새터민 이야기를 몰라도 남녘에서 사는 데 아무 걱정이 없어서 꺼리는지 …….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 대학입시에 목매이며 살지 않을 수 있으면, 저 같은 사람이 주머니돈 털어서 <금희의 여행> 같은 책을 사서 선물해 주지 않더라도 사람들 스스로 찾아서 읽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더 많은 돈과 더 큰 집과 더 빠른 차에다가 더 눈길받는 이름값에 발묶인 채 살지 않을 수 있으면, 사람들 스스로 책방 나들이를 즐겁게 하면서 <금희의 여행> 같은 책을 밝은 눈으로 알아보고 맑은 마음으로 새겨 읽지 않으랴 싶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큰 한겨레’이고 ‘민주주의 나라’라고 내세우면서 ‘大韓民國’이라는 나라이름을 쓰고 있지만, 얼마나 ‘큰’ 나라이고, 참말 ‘한겨레’인가 모르겠으며,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고, ‘나라’ 꼴은 얼마나 나라 꼴다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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