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22일) 시작돼 일주일째인 여름방학이지만, 한국의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 학생에겐 '방학'이란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 6개월간 나에게 과외를 받은 사촌 동생과 그의 친구는 고등학교 2학년이다. 사촌 동생의 입을 빌려 그들의 방학생활을 엿보자.
"나는 고2, 내 얘기 좀 들어볼래?"
"난 지금 18살의 여름을 보내고 있어. 어른들은 꽃다운 나이라는 둥 가장 행복할 때라는 둥 편하게 말하지만, 정작 우리 여름은 그다지 즐겁지 않아.
여름방학이 돼도 등교시간은 똑같아. 아니지.학기 중엔 7시 57분까지였고, 방학 땐 8시 20분까지 등교니까 조금 나아지긴 했네. 그래도 일어나는 건 비슷하지 뭐.
심자(심야자율학습)도 그대로야. 난 방학 때 학원엔 안 다니니까 차라리 학교에 있는 게 편해. 그래서 '심자' 신청했어. 우리 반에선 날 포함해 3명이 신청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학원 다니느라 나보다 더 바쁠걸?
봉사활동은 안 하냐고? 물론 해야지. 근데 그게 몇 시간을 해야 하더라? 잘 모르겠네. 난 올해 '컴퓨터 도우미'거든. 1년 동안 선생님 노트북 준비나 설치를 도와드리면 10시간인지, 20시간인지 봉사시간을 준대. 나중에 모자라는 시간만 채우면 되겠지.
봉사활동에 너무 무관심하다고 생각하진 마. 오히려 봉사시간 점수를 반영하지 않는 대학교가 훨씬 많으니까 말이야.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게 훨씬 더 똑똑한 방법이지. 누가 봉사활동이 좋아서 하겠어? 모두들 가산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본만 하는 거지.
여행을 가고 싶어. 친구들이랑 즐겁게 하루만이라도 다녀오고 싶어. 이번에 안 가면 앞으로 1년 반 동안 세상 구경도 못 할 거 아니야. 실은 친한 친구들과 계획을 짜고 있긴 한데, 아직 갈 수 있을진 확실하지 않아. '고 2', 우리한테 방학이 있어야 말이지."
한국의 고등학생에게 여름방학이란 없다
그들이 나에게 배운 것은 명목상 '논술과 언어영역' 과외였다. 뭘 가르친다기보다는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하고, 그 주의 시사문제를 함께 이야기한 후 생각 글을 쓰는 수업이다.
지난주, 방학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18살의 여름에 꼭 하고 싶은 열 가지'를 써 보라고 했다. 적어놓곤 저희끼리 바꿔 읽으며 키득거린다. 서로 판이하게 다른 계획에 웃는다.
한 아이의 여름방학은 이미 고3의 여름방학과 닮았다. '하루 최소 6시간 이상씩 공부하기', '수학과 영어 학습지 매일 풀기', '하루에 영어 듣기 1강의씩 하기'.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새벽 1, 2시쯤에 잔다며, 이번 여름엔 수험생인 오빠 덕에 가족여행도 없다고 말한다.
다른 아이의 여름방학 계획에선 그나마 '일탈'이 느껴졌다. '고1 애들이랑 계곡 가기', '고2 애들이랑 바다 가기', '하루에 영어단어 50개 외우기'. 마음 편히 놀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고등학생의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을 알고 있다.
한국의 고등학생에겐 여름방학이란 없다. 모두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어쩔 수 없다며 당연해 한다. 잘 웃지도 못하는 고등학생 시절. 웃음 짓는 시간보다 멍한 표정으로 수업을 듣거나 공부하는 시간이 더 많다.
얼굴을 가린 채 웃을 수 밖에 없는 시간을 보냈기에, 오늘의 한국 사회가 좀더 삭막한 환경이 돼 버린 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뜨겁고 정열적인 여름은, 20살 이전에는 맛볼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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