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기억을 볼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억과 생각을 감지해낼 수 있는 '제3의 눈'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떨까? 당장은 혹할 것이다. 누구나 가끔은 '내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일까?
미야베 미유키의 장편소설 <낙원>의 시작은 '제3의눈'에 대한 환기로부터 시작한다. 한 마을에서 화재사건이 일어나고 함께 화재가 일어났던 그 집의 부부는 경찰서에 출두해 16년전, 자신들이 자신의 큰 딸을 살해하고 자신의 집 땅 속에 묻었다는 자백을 하게 된다.
공소시효 기간이 지난 덕에 유야무야 지나가게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다시 불거져 나온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야했던 '히토시'라는 소년에게는 남의 생각과 기억을 보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 히토시가 세상을 뜨기 전에 남겼던 그림 중에는 이 사건을 묘사한 듯한, 어린 소녀가 집 아래 누워있는 그림이 있었다. 소녀는 살아있는 것이 아닌 회색 빛깔의 죽은 색채로 그려있었다.
히토시의 엄마는 히토시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는 주위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히토시를 추억하기 위해 프리라이터인 시게코에게 의뢰를 해온다. 히토시에게 정말 남이 보지못하는 사이코메트리(일종의 초능력으로 특정인의 소유물에 손을 대서 소유자에 관한 정보를 읽어내는 심령적 행위를 일컫는 용어)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이야기의 시작은 히토시의 '초능력'으로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당연 독자의 관심도 여기에 관심이 쏠리게된다. 히토시에게 정말 초능력이 있었던걸까…. 그러나 사건이 진행될 수록 이야기의 초점은 화재가 났던 그 집으로 다시 옮겨간다. 그리고 16년 전 딸을 제 손으로 죽이고 그 딸의 시신을 자신의 집 마루에 묻어야했던 그 집의 비밀과 숨겨진 이야기가 서서히 밝혀지게 된다.
16년 전, 한 집안에 얽힌 비극과 비밀
작가는 작품 속에서 16년 전 부부가 딸을 살해한 시간적 배경을 1989년으로 설정했다. 1989년이면 일본경제가 버블경제여파로 인해 한창 붕괴될 무렵이었다. 그 당시 사회에는 과소비, 사치, 향락과 같은 경제적인 과소비뿐 아니라 사람 사이에도 즐기고 보자는 풍조와 나태, 질주, 폭주, 낭비와 같은 분위기가 만연해있을 때였다.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낙원'에 대한 가졌던 욕망, 허영, 꿈은 모두 빈 껍데기에다 공허하고 부질없고 헛된 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가족을 비극으로 몰고 간 배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한 가정을 서서히 무너뜨려버렸던 엄청난 사건과 고통, 치부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가정을 무너뜨린 공범은 바로 그들이 살고있는 '사회'라는 암시를 내던진다. 그 가정의 문제는 비단 그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 일본 사회가 안고 있던 총체적인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까 했던 이야기 말인데… 즐기지 않으면 손해라고 생각하는 인생관말이예요, 하고 노모토 형사가 말했다. 그건 요즘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즐긴다'라는 표현이 '충실한 인생'이나 '자아실현' 같은 같은 그럴 듯한 말로 바뀌었을뿐이지. 그것도 실은 돈으로 사려는 거니까 결국은 마찬가지죠, 하고 덧붙였다.(하권, 245쪽)
나에게, <낙원>은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첫 번째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일구는 한 사회의 구성인으로서의 문제다. 특히나 올바른 가치관이 희미해지고, 헛된 욕망이 넘치는 이 위험한 시대에 아이를 낳아서 키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작품 속 가족의 비극도 바로 가족간의 소통 부재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 속 살해당한 소녀 '아카네'의 외삼촌이 내뱉는 대사는 천천히 곱씹을 만하다.
"자형이나 누나나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카네에게 똑똑히 이야기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우리 딸이다. 네 부모는 우리 외에는 없다. 우리는 부모자식 사이고, 부모는 너를 사랑한다. 그 다음엔 꾸짖을 일을 따끔히 꾸짖어서 고쳐야죠.
집이 가난하다느니,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해 창피하다느니 불평을 하면 그런 사고 방식은 잘못이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겁니다. 사회에 나가 직장을 갖고 제 역할을 다하며 가정을 꾸려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야기했어야 합니다."(하권 264쪽)
둘째는 작품의 첫부분에 등장했던 히토시의 '제3의눈'에 관한 문제다. 작품 속에서 화재 사건을 유도하기 위한 소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누군가의 미래를 보고, 과거를 읽고, 점을 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섭고 때로는 잔인한 일인지 작가는 준엄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는 히토시의 증조할머니로 등장하는 '치야'는 예지력이 있어 온 집안을 쥐락펴락하며 집안의 독재자로 군림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어이없게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히토시 엄마 '도시코'의 모습을 보며 독자들은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말이 누군가를 죽이는 '독'이 될 수있다는 생각을.
"남편분의 어머니에게 언니의 귀신을 떼야한다고 권한 분은 정말로 영혼을 보거나 앞 일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제대로 모르는 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어떤 형태로건, 핏줄이 이어진 사람을 잃고 난 뒤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런 소리를 할 리 없으니까요."(하권, 35쪽)
낙원을 꿈꾸는 한 누구에게나 그곳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낙원'에 관한 문제다. 사실 책의 내용만 놓고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낙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오히려 낙원이라는 제목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낙원의 진정한 의미는 결말 부분에 가서 작가의 입을 통한 듯, 생생한 등장인물의 고백을 통해 드러난다. 군데 군데 밑줄 그은 부분을 취합해서 이어보았다.
"누군가를 잘라내지 않으면, 배제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행복이 있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뒤 지혜를 얻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지만 그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사서 낙원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사람들이 추구하는 낙원은 이미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고 확실히 그것을 손에 넣을 때가 있다. 착각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순간 반드시 자신의 낙원을 찾아낸다. 비록 그것이 아주 잠시일지라도."(하권 384)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이 책의 제목은 왜 낙원일까 생각해보았다. 읽고 난 후, 결론은 결국 누군가를 잘라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과 함께라 할지라도 행복을 추구하고 한때나마 행복을 맛볼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그의 '낙원'이라는 말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낙원이라는 곳은 특별히 정해진 이상향도, 정해진 모델도, 이거다 싶게 정형화된 모습이 없는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각자 추구하는 행복이 다 다르듯이 말이다.
일본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미야베 미유키. 그녀의 필력과 인기야 다시 말하는 것도 새삼스럽긴 하지만 <낙원>에서 보여주는 치밀하고 꼼꼼하고 정교한 플롯과 심리묘사는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단락 중간중간에 '단장'이라는 짧은 시퀀스를 삽입해놓은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처음에는 본문과 동떨어진 내용이라 집중이 안 될지 모르지만 알고보면, 아니 알 만한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소녀 아카네의 위축되고 불안한 심리가 그 안에 농축되어 있다. 읽을수록 가슴이 아프다. 세상에 아무리 고약한 사람이라도 이해받지 못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지은이의 후기는 마음을 한결 푸근하게 만들어준다.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민, 배려가 넘쳐나는 이 작가는 후기에서도 그 배려를 잊지 않았다. 소설을 구상하게 된 배경과 에피소드를 간략히 설명한 후 작품 속 주인공인 '아카네'에 대한 연민으로 마무리지었다.
왜 아니겠는가. 자녀가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으며 바른 길로 가지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에 가슴 아파하고, 그러한 자녀의 현실에 함께 눈물 지으리라. 남의 일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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