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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없고 아무리 초현실주의를 표방한 예술 작품이라도 그 뜻이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던가. 그러다 보니 복고풍이 유행을 하게 되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노래와 영화가 새삼 리메이크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되살아 난 불온서적의 망령 이 시점에 왜?

소설가 현기영.
소설가 현기영. ⓒ 민족문학작가회의
정치권력도 그러하던가. 요즘 이명박 정부 아래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역사의 시계는 과연 돌고 돈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 일은 이명박 대통령을 향한 충성 경쟁에 불을 붙였고 각 부처에서는 연일 한 건씩 지난 역사를 리메이크 하고 있다.

문제는 리메이크를 할 때 사용되는 것이 모두 붉은색이라는 점이다. 아직도 붉은색으로 덧칠만 하면 먹히리라고 생각하는 이명박 정부 사람들 때문에 지금 전국민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번에 국방부가 꺼내 든 카드도 붉은색이다. 충성 경쟁에 뛰어든 국방부의 불온서적 목록 공개도 한때 유행했던 금서목록이었다.

그것을 시대 파악도 못하고 과감하게 리메이크 했으니 국방부도 드디어 한 건을 하긴 했다. 하지만 노래나 영화도 아닌 것을 리메이크 한 자들의 머리속을 들여다 보면 하는 짓이 한심하다 못해 참으로 우습고 가히 용렬스럽기까지 하다. 그 이유를 들여다 보자.

최근 국방부는 23종의 책을 불온서적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세상에 발표했다. 그 일의 근거가 '한총련이 군부대에 책보내기 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라니 이런 사실을 두고 울어야 할 지 웃어야 할 지 이번 일을 지켜보는 국민으로 혹은 작품을 쓰는 소설가로서 난망스럽기 짝이 없다.

불온서적, 즉 금서(禁書)는 그야말로 군부독재가 판치던 시절 유행하던 구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국민들이 아는 것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통제가 어려워지던 시절. 도색잡지는 용납해도 정신을 해롭게 만드는 서적은 용서가 되지 않던 그 시절. 전국민이 무의식의 상태에서 정권의 말말 듣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던 그 시절. 그 시기는 분명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였던 시절이었다.

금지 투성이의 세상에서 불온서적을 읽는 것은 무의식 상태에서 의식 상태로의 전환을 꾀하는 첫 출발과도 같았다. 당시 국민이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은 정권으로서도 부담스러운 것이었고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읽고 난 후 물음표를 떠올리게 만드는 책들은 죄다 불온서적으로 묶었다.

이제는 사라졌는가 싶었던 불온서적 망령이 되살아 나는 것은 어인 일일까. 이 세상엔 새로운 것이 없다는 진리를 이명박 정부의 정직한 군대인 국방부도 알았다는 것인가. 그리하여 불온서적이란 망령을 다시 꺼내 리메이크 하려는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왕하려면 제대로나 할 것이지 그 수준이 너무 낮다. 23종의 불온서적 목록을 살펴보니 '이게 과연 불온서적?'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책들도 상당수 있다. 불온서적에 마땅히 포함되어야 할 <태맥산맥> 같은 책이 빠져 있는 것도 이상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통치권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국방부의 의도적 실수인가? 아니면 한총련이 선정한 책들이라 생각 없이 포함 시킨 것인가?

제주4·3 이야기가 북한 찬양 도서로 둔갑한 사연

 <지상에 숟가락 하나> 겉그림.
<지상에 숟가락 하나> 겉그림. ⓒ 실천문학사
답을 얻기 위해 1일 오후 볼온서적 명단에 오른 작가들과 전화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온서적에 포함된 문학작품 작가들은 현기영 선생을 제외하곤 모두 고인이 되거나 연락을 취할 수 없는 북한 작가(백남룡 <벗>)였다. 하여 <지상에 숟가락 하나>의 작가 현기영 선생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현기영 선생으로서는 1978년 발표한 중편소설 <순이삼촌>이 금서목록에 오른 이후 무려 30년 도전 끝에 두 번째 작품을 불온서적 명단에 올린 영광(?)의 불온작가가 되었다. 먼저,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로 30년 만에 다시 불온작가 반열에 오른 기분이 어땠냐고 물었다.

"황당하지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불온서적을 규정해요."

책이 출간된 후 MBC 프로그램인 <느낌표!>에서 권장도서로 선정되어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책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국방부가 오독한 것은 아닐까 하고 다시 물었다.

"소설 내용 중에 제주 4·3 항쟁 이야기가 조금 나와요. 아마 그걸 문제 삼았던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국방부는 제주 4·3 항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이거든요."

역시 무언가 꼬투리가 있기는 했다. 국방부가 현기영 선생의 책을 불온서적으로 묶은 이유는 제주 4·3 항쟁이었다. 민간인 학살의 원죄가 부끄러운 탓에 그런 내용을 똑똑한 요즘 군인들이 읽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더위 먹은 국방부 드디어 한 건 했다

그런데 불온서적으로 규정한 국방부의 발표는 조금 엉뚱하다.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가 북한 찬양 도서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짐작이 가느냐고 현 선생께 물었다.

"국방부가 새로운 소설을 쓴 모양이지요. 그 책엔 북한 관련된 내용이 없어요. 그 사람들이 더위를 먹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뿐입니다."

현기영 선생께서 정답을 말했다. 국방부가 더위를 먹은 게 틀림없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온서적을 목록을 만들어 군장병들의 머릿속을 시멘트 칠 이유가 없지 않던가. 현기영 선생이 이어 말했다.

"과거로 역사를 되돌리려 하지만 그건 순간에 불과합니다. 억지로 되돌린 역사는 언젠가 되돌려진 역사 이상으로 진보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역사가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현기영 선생은 인터뷰 내내 "어리석은 사람들" 또는 "바보나 하는 짓이다" 등의 말로 자신에게 불온작가 꼬리표를 달은 국방부를 힐난했다.

"소설을 많은 분들이 읽었는데, 그렇게 되면 독자들도 불온한 독자들 아닙니까? 불온한 독자를 <느낌표!> 관계자들이 만들었으니 방송국도 불온하긴 마찬가지겠지요. 온 세상이 다 불온한데 저들만 깨끗하다고 하니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요."

전 국민을 불온하게 만드는 나라 국방부

현기영 선생의 소설은 <느낌표!> 권장도서일뿐 아니라 간행물윤리위원회 선정 추천도서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들과 신문까지 불온서적을 홍보 또는 찬양했으니 모두 불온한 사람들일 터였다. 소설을 읽은 독자들의 심장에는 이미 불온의 싹이 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국방부의 발표는 소설을 읽을 모든 독자와 책을 선정하거나 홍보한 모든 사람을 모욕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잣대가 그렇게 달라지면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창작의 자유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한때 문화예술진흥원장(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으로서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을 진일보 하게 만든 현기영 선생과의 전화 인터뷰는 그 말로 끝을 맺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새로운 잣대가 생긴다면 지나온 시대가 만든 보편성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국방부의 발표대로라면 나 역시 백남룡의 <벗>와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 <김남주평전> 등의 불온 서적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내 정신의 불온함을 국방부가 지적했으니 더 불온하게 살아야 할 듯싶다.

더불어 불온서적에 포함된 책들은 평소 아끼던 책이기도 해 빌려주지 않았는데, 이젠 그 책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두루 읽게 해야 겠다. 그런 다음 김남주의 시가, 현기영의 소설이, 권정생의 글이 왜 불온서적이 되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야 겠다.


#불온서적#망령#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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