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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군. 그는 왜 완소제굴에서 열공제굴이 되었을까?
 강제규군. 그는 왜 완소제굴에서 열공제굴이 되었을까?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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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야! 나 연예인 한 번도 안 봤잖아. 근데 연예인과 함께 하는 여름캠프 간대."

태권도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 목소리는 떨렸다. 캠프에 가면 1대 1로 연예인과 사진까지 찍는다고 말하는 눈은 빛나고 있었다. 그런 아이 곁에서 흥 돋워주는 일은 즐거웠다. 나는 아기 낳을 날이 임박해서도, 좋아하는 가수를 보러 가서 열광하다가 조산 위기를 겪은 경험이 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기대감 때문에 쉬이 눕지 못하는 아이를 향해 "다음은 '서커스'를 부르는 MC 몽입니다" "비열한 둘리, 은초딩입니다"라고 했다. 아이는 침대에서 방 천장에 머리가 닿도록 뛰어올랐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아이가 "이승깁니다"하면 나는 기절해 버렸다. 보름쯤 그랬다. 

그런데 아이가 난데없이 여름방학 캠프를 안 가겠다고 했다. 몇 번을 물어도 이유를 말 안 하길래 윽박질렀다. 아이는 "영어 학원 결석하는 게 싫어"라고 했다. 도저히 우리 아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종류의 말은 아니었다. 해독 불가능한 외계어였다. 나는 아이 어깨를 흔들면서 말했다.

"넌 누구냐? 우리 완소제굴 잡아먹었지?"
"엄마, 나는 그대로야."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학원 다닌 경력도 같다. 학교는 그럭저럭 다녔다. 그러나 학원은 툭, 하면 빼먹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고 한다). 운동장에서 땅을 파거나 아파트 놀이터에서 잠깐 놀았을 뿐인데 시간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정기적으로 괜히 가기 싫은 날까지 찾아왔다.

만경강 하구, 폭염주의보가 내린 7월 말의 한낮. 조개 잡는 어르신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만경강 하구, 폭염주의보가 내린 7월 말의 한낮. 조개 잡는 어르신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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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캠프에 대한 마음이 싸늘해진 이유는 작년보다 20일 가량 빨라진 폭염특보 때문이지 싶다. 농사일 하던 어르신들이 일사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가끔 들렸다. 나는 어머니한테 전화를 하면 "한낮에 들일 하지 마세요. 더우면 에어컨 켜세요. 전기요금은 걱정 마세요"했다. 내 옆에서 무심하게 책을 읽던 아이가 어느 날 저녁에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영어 학원 특강 있잖아. 1등 하면 장학금 받는다. 그거 타서 내가 할먼네 에어컨 전기 값 낼 거야."

우리 아이가 다니는 영어학원은 6월 말부터 8주 동안 '여름 방학 특강'을 한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은 150여 명쯤 된다. 1등 한 명에게는 한 달 수강료인 20만 원을 준다. 2등과 3등은 두세 명씩 뽑는데 각각 10만 원과 5만 원의 장학금을 준다. 학원생의 5%만 혜택을 받는 셈이다.

목표를 정하고 불타오르는 아이에게서 야성을 보았다. 집에 오면 학원에서 배운 영어책을 스스로 펴보는 기적까지 일어났다. 아이는 공부 시간에 친구가 물어본 말에 대답하다가 선생님한테 "집중이 필요해요"라는 주의를 받으면 침통해져 버렸다. 그런 아이 모습이 내게는 어색했다.

여름방학특강. 학원은 날마다 아이의 성적과 태도를 평가한다. 장학금을 받겠다고 불타오르는 아이는 '집중하세요' 주의를 받으면 좌절한다.
 여름방학특강. 학원은 날마다 아이의 성적과 태도를 평가한다. 장학금을 받겠다고 불타오르는 아이는 '집중하세요' 주의를 받으면 좌절한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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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일어났다. 집에 오면 아이 스스로 공부하기도 한다.
 기적이 일어났다. 집에 오면 아이 스스로 공부하기도 한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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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 되면 다 잘 하겠지'라는 근거 없는 낙관을 하며 아이를 키웠다. 그래서 아이는 지금도 방학 때 나랑 한글 깨치는 늦공부를 한다. 학교생활이 쉬울 리 없었다. 다행이라면 아이가 '나는 한발 늦는구나'라는 인식을 못한다고나 할까. 반에서 딱 중간인 성적표가 나와도 "이 정도면 잘 하는 거야"라고 만족해 왔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바꿔치기'됐다. "내가 노력은 1등인데 실력은 그렇게 높지 않잖아. 그게 문제야"라고 분석도 했다. 역시, 여름 방학의 약한 고리는 결석!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는 출석률도 한 몫 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리고는 무결석 쪽으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나 보고 읽어 보라고 준 일기장을 보니까 아이가 느끼는 위기의식이 팍팍 느껴졌다.

... (생략)... 나는 1등을 하고 싶지만 경쟁자가 많아서 1등을 못할 것 같다. 그래도 1등, 2등, 3등 중 하나는 해야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킨다. ...(생략)... 할머니한테 왜 에어컨을 틀으라고 하냐? 뉴스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쓰러지고 그래서 틀으라고 한다. (외할머니는 내년 특강 때)

한 달 전, 학기 중이었지만 잠깐 다녀온 일본 여행. 유카타를 입은 아이는 어깨춤을 추는 중...^^
 한 달 전, 학기 중이었지만 잠깐 다녀온 일본 여행. 유카타를 입은 아이는 어깨춤을 추는 중...^^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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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릴 때는 많이 보고, 노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가끔씩 학교까지 결석하고 놀러 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더구나 방학이라면 말해 무엇하리. 며칠쯤 결석해도 장학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출석률은 80%면 된다. 그러나 아이는 딱할 만큼 고지식하게 나왔다. 성질이 나고 말았다.

"어떻게 캠프 날짜 닥쳐서 못 간다고 그래? 환불도 안 된다고."
"안 돼. 영어 학원 결석하기 싫다고~. 나는 장학금 탈 거야."
"진짜로 연예인 못 봐도 돼?"
"응. 친구한테 사인 복제해 달랄 거야. 두 장, 엄마 것까지."

아이는 끝내 여름 캠프에 가지 않았다. 내 휴가도 아이의 짧은 학원 방학에 맞추는 '수모'를 당했다. 1년 동안 일하고 갖는 휴가라서 나는 멀리로만 갔다. 이만하면 효도는 잘 하는 축에 든다고 '자뻑'하기 때문에 부모님과 보내는 휴가를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올해는 양가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으로 시작했다.

날씨는 여전히 무덥다. 여름 방학 특강에 대한 아이의 자세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이는  그토록 갖고 싶던 게임기 '닌텐도'와 장학금을 바꾸자고 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할머니 댁 에어컨 전기요금을 들고 나왔다. 그 순간부터 우리 식구한테는 한 편의 휴먼 다큐멘터리다. 감동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한여름에도 따뜻하고 기분 좋다.

운동회 때 1등 푯말 앞에서 환호하는 강제규군. 진짜로는 5등 했지만 마음만은 1등이라서 저런 자세를 잡고 있다. 만약에 영어학원에서 장학금을 못 받더라도 꿍하지 않기를...
 운동회 때 1등 푯말 앞에서 환호하는 강제규군. 진짜로는 5등 했지만 마음만은 1등이라서 저런 자세를 잡고 있다. 만약에 영어학원에서 장학금을 못 받더라도 꿍하지 않기를...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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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08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



태그:#열공, #이 여름을 시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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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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