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동물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이 생물학적 접근이든 사회학적 접근이든,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구별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한 조명도 뛰어나다.
"우리는 또 하나의 명작을 갖게 되었다. 조지 오웰의 <1984>, 카프카의 <심판>, 카뮈의 <페스트>를 능가하는 우리 시대의 우화다."
'커커스 리뷰'의 침소봉대가 그리 싫지 않게 들린다.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199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라마구는 우화적 비유와 신랄한 풍자로 461쪽이나 되는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든다.
다수결이 진리인가
민주주의는 다수가 원하면 그게 진리다. 이처럼 비정한 논리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의 비정함을 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애초부터 민주주의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눈을 뜨고 태어났다. 그래서 눈뜬 자들이 다스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모두가 눈이 멀고 한 명만 눈뜨고 있다면?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한 명만이 눈뜨고 다른 이들은 모두 눈이 멀었다는 데서 시작한다.
사라마구의 문학 세계의 독특함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 일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설정, 사람이 쉽게 생각해 보지 못한 상황으로의 떠밀림, 독자는 꼼짝없이 그 상황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만다.
신호를 기다리던 한 운전자가 갑자기 눈이 안 보인다. 안과 의사에게 가지만 의사는 원인을 못 찾는다. 의사도 환자가 돌아간 다음 실명을 한다. 실명은 전염병이다. 그 의사에게 진찰을 받은 사람들, 처음 눈먼 자와 접촉한 사람들, 모두 하나하나 눈이 먼다.
당국은 눈먼 자들을 모아 정신병원이었던 곳에 강제로 격리시킨다. 무장한 군인들이 감시하고 벗어나려고 하면 총을 난사한다. 소설에서도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권력은 무모하기만 하다. 수용소 안은 총(힘)이 지배하고, 동물화한 인간은 약탈과 강간 등에 자신을 침몰시킨다. 동물과 인간의 구별은 없다.
화재가 발생하지만 군인들조차 불을 끄려하지 않는다. 아니 이미 불 끌 사람이 없다. 다 눈이 멀었으니까. 불길을 뚫고 탈출한 무리는 수용소 밖도 이미 눈먼 자들의 세상임을 알게 된다. 썩은 시체와 쓰레기로 가득한 폐허의 도시, 역겨운 냄새만이 온 도시에 가득하다.
눈뜬 사람 한 명
의사의 아내만은 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 남편과 동행하기 위해 눈먼 척할 뿐이다. 수용소에서 강간을 당하면서까지 남편 곁에 있다. 그러나 남편은 다른 여인과 간음을 저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비롯하여 수용소를 탈출한 눈먼 자들의 안내자 역할을 감당한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그 여인에게서 예수 냄새를 맡았다. 예수는 스스로 눈뜬 자라 주장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주의자들이 눈먼 자임을 알았다. 비진리이면서 눈떴다고 하는 자들에게 안약을 사 발라 보라고 했다. 약방에서 구하는 안약이 아니지만.
눈뜬 자는 단 한 명이지만 진리다. 그 진리가 권력을 남용하지도 않는다. 혼자만 살겠다는 이기심도 없다. 눈을 뜬 자임이 밝혀질 때까지 철저히 눈먼 자로 산다. 다른 눈먼 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준다. 진리니 정의니 하는 속성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눈뜬 사람은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다수결의 허망함이 나라를 망칠 때도 우린 민주주의라는 올가미에 갇혀 참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눈이 먼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눈 뜸'이란 또 어떤 의미가 있으며 무엇에 유용한가. 물리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사라마구가 이런 설정을 한 것은 아니다.
눈뜬 사람은 그저 눈뜬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눈먼 사람들을 위한 눈뜬 사람이어야 한다. 만약 눈뜬 사람이 눈먼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눈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뜬 자는 사라마구가 말하는 속물화, 동물화 된 인간을 향한 구원의 메신저다.
소유와 존재
'눈이 멀었다'는 말은 모든 것을 잃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간 사용하던 집, 그 집안을 꽉 메웠던 가구들, 승용차 등등. 사람은 '소유냐, 존재냐' 하는 문제 앞에 항상 숙연하다. 그리고 자신이 된 사람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존재’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허구인지 모른다. 그런 허구에 가까운 진리 놀음을 하는 인간에게 사라마구는 일침을 가한다. '눈먼 자만이 진정 소유가 아무런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고. '눈먼 자처럼 사는 것'과 '눈먼 자로 사는 것'은 다르다. 눈먼 자만이 존재할 수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리얼리즘의 눈으로 소유에 얽혀있는 인간의 탈을 벗긴다. 소유로 점철된 정형화된 우리의 삶을 뒤집어엎어 인간을 소유로부터 해방시킨다. 눈뜨고 사는 자들이 실은 눈먼 자들임을 시위한다. 눈먼 자가 눈뜬 자이고, 눈뜬 자가 실은 눈먼 자라고 말한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고 말한다. 사라마구 또한 진리는 단 한 명일지라도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물욕의 바벨탑이 지구를 지질컹이로 만들고 있다. 쓰레기와 시체, 그리고 그것들의 썩는 냄새가 우리가 사는 도시에는 없는가.
비록 한 명이라도 눈뜬 자가 진리며 정의다. 눈먼 자는 아무리 많아도 정의일 수 없다. 비록 새 국회의원들의 평균 재산이 31억인 세상에 살지만 인간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여야 한다. 아직 소유의 성(城)에서 살지만, 아직 다수결이 지키는 사회에서 살지만 그리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인내심을 가져라. 시간이 제 갈 길을 다 가도록 해주어라. 운명은 많은 우회로를 거치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아직도 확실히 깨닫지 못했는가. 여기에 이 지도를 세우기 위해, 그리하여 이 여자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도록 해주기 위해, 운명이 얼마나 많은 길을 돌아왔는지는 운명 자신밖에 모를 것이다."(330쪽)
그렇다. 좀 돌아가더라도 그 길을 갈 수 있다. 가야만 한다. 동물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기어코 그래야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