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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저녁 7시 30분에 시작된 94차 촛불문화제. "이명박은 물러나라"라는 구호와 함께 시작된 이 문화제는 30분 만에 종료됐다. KBS에 중대한 위기가 닥쳤음을 잘 알고 있는 참가자들과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이 여의도행을 제안함으로서, 자유발언과 구호로 간단히 종료된 것이다.

 

시위참가자들은 곳곳으로 흩어졌다. 여의도로 향한 시위참가자들이 있는가 하면, 보신각 일대를 고수한 시위참가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행진을 시도하면서 명동 일대까지 나아간 시위참가자들도 있었다.

 

물론, 도로에서의 행진은 쉽지 않았다. 경찰은 보신각 일대를 전경버스로 완전히 포위한 상황에서 사복과 정복을 가리지 않고 빈틈없이 에워쌌다. 혹시라도 시위참가자들이 도로로 뛰쳐나올 경우엔 인정사정 안 봐주겠다는 태세였다.

 

중간중간 선봉에서 '정탐'에 나선 일부 시위참가자들의 제안으로 도로로 뛰쳐나온 순간도 있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경찰 병력이 방패를 들고 떼로 몰려오자 도로 행진은 무산됐다. 그렇게 멈춘 곳은 결국 명동성당 인근 평화방송 건물 건너편 도로였다. 그 곳에서 경찰과 시위참가자들은 밤을 지새운 대치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 대치 속에서 '촛불'에 대한 뒤엉킨 잔영들을 볼 수 있었다. 지금부터 이어갈 이야기는, 맞아 죽을 각오로 쓰는 이야기다.

 

매일 보이는 얼굴만 보인다, 이것이 위기다

 

언제서부턴가 촛불시위 현장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취재를 위해 자주 현장에 나갔으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 잦은 취재만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낯익은 얼굴들이 더욱 낯익어가는 가운데, 참석자는 줄고 있었고 새로운 얼굴은 쉽게 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단언컨대, 최근 촛불시위 참석자들의 경향은 2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깃발이 상징하는 '단체 소속 참가자'들과 '고정 시위참석자'들이다.

 

이속에서 나는 중대한 문제점을 본다. 자주 보이는 얼굴들은 그만큼 시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이는 습관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습관'은 하던 대로 한다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시위에 나와, 습관적으로 행진하며, 습관적으로 경찰과 대치한다. 이속에서 시위참가자들이 잃어버린 것이 있다.

 

애초에 '촛불'이 보여줬던 중요한 상징은 두 가지였다. 창조성과 역동성이었다. '습관'은 이 두 가지 상징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 최근의 촛불은 그 창조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렸다. 습관적으로 행진하다가 경찰과 대치하면서 진압당하고는 아침해가 뜨면 집으로 가는 일, 이 자체가 시위의 관성이 돼버렸다.

 

"질긴 놈이 이긴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질기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 질긴 가운데 보여줘야 할 것은 끊임없는 역동성이다. 그리고 창의력이다. 게다가 촛불은 애초부터 '싫증'을 잘 느끼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성을 간과했다. 그 중요한 특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창조성'과 '역동성'이라는 항목은 더욱 중요해진다.

 

명동 일대의 번화가를 행진하면서 구호를 외치는 시위참가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유심히 지켜본 것은 그 시위참가자들을 바라보는 지나가는 시민들의 반응이다. 촛불시위 초창기엔 지나가다가 합류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며, 곳곳에서 박수와 환호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지나가는 시민들과의 괴리는 점점 커진다는 것을 느낀다. 상점 상인들도 그저 구경거리 정도로만 바라보는 일이 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현실과 멀어진다는 이야기다. '쇠고기'에 대해서는 둔감해졌으며, '방송 장악' 등의 이슈는 '나의 일'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 명동성당 부근에서의 대치 현장 경찰과 시위참가자들이 대기한 가운데, 명동성당 내의 언덕에 있던 정체불명의 일부 시위참가자들은 식초와 돌 등을 마구잡이로 던졌다.
ⓒ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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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 유독 싸움을 붙이려는 사람들도 있다. 9일 밤 평화방송 건물 건너편에서 경찰 병력과 대치를 벌였을 때, 유난히 그들이 눈에 띄었다. 정도 이상으로 기자들의 사진 촬영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얼굴을 두건으로 꽁꽁 감싼 사람들, 그들은 안전한 명동성당 내에서 구체적인 대치 상황이 아님에도 돌과 비닐봉투 속에 담긴 식초 등을 마구 던졌다.

 

그들 스스로는 경찰이 함부로 진입할 수 없는 성당 내에서 그런 일을 하지만 만일 그때 경찰이 진압작전을 시작됐다면 연행되는 사람들은 경찰 병력 가까이에 서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그 돌과 식초를 바라봤던 다수의 시위참가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본인들은 안전한 곳으로 빠져 경찰과 시위참가자 모두를 자극시키고 위험에 빠트리는 행위는 비겁하다. 안타깝게도 최근 촛불시위 현장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다시 근본적으로 따져보자. 촛불시위 참가자들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그렇듯 남의 일 바라보듯 구경났다는 듯이 바라보기만 하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잘못된 것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위가 '관성'과 '습관'처럼 이뤄지는 가운데 더이상의 역동성과 창조성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서, 현실과 유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중대한 위기라고 판단한다.

 

'기동전'은 충분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진지전'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지금까지의 촛불은 '기동전'이었다. 하지만 기동전만 구사해서는 힘이 딸린다. "질긴 놈이 이긴다"라고 했나? 그렇다면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

 

마침, 이명박 정부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 분야마다 '진지'를 구축해 장기전에 대비하면서 다시 그 역동성과 창조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좋다. 가두행진에만 집착하지 말아야 할 때다.

 

그 점에서 내가 본 가장 이상적인 진지를 거론하고 싶다. 그 진지는 YTN 사옥 앞에 만들어졌다.

 

'YTN 낙하산 사장 선임'에 대해서는 반드시 YTN 노조만 맞서싸우는 것이 아니다. 늘 그들을 응원하며, 때로는 보조하고, 때로는 압박한다. 카페 커뮤니티를 만들어 토론과 공부,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밀도있게 논의한다. 그들은 'YTN 지킴이'들이다.

 

이들의 투쟁은 '생활형'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 구본홍 사장 내정자에 대한 주총의 기습 선임 이후, YTN 노조가 출근저지 투쟁에 나서면서, 이들은 자발적으로 주야 교대에 나서 아침조는 노조의 출근저지 투쟁을 응원하며, 저녁조는 꾸준히 촛불을 켜고 촛불을 끄지 않으려 노력한다. 저마다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생활형으로, 자발적인 교대까지 이룬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명박 정부는 다양한 분야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구축해야 할 진지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시급해진 KBS와 그 다음 차례임이 분명한 MBC도 있다. 주요 관계자들이 수배된 민주노총도 있으며, 수배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이 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조계사도 있다. 무리할 필요가 없다. 저마다의 일상에 맞춰 진행하면 된다.

 

이명박 정부가 다양한 분야에서 물의를 일으킨다는 것은,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처럼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문제임을 직감할 대형 이슈가 다시 터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방송 장악'에 대해서는 진지를 구축해 끊임없이 그 심각성을 알리는 가운데, 대형 이슈가 다시 터질 때는 위력을 보여준 바 있는 대규모 기동전을 다시금 시도하면 된다.

 

그렇다고 앞장서서 경찰과 대치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진압에 혈안이 돼 있는 경찰에게 진압 근거를 제공할 이유는 없다는 이야기다.

 

촛불시위가 한창 격할 당시, 가장 아쉽게 바라봤던 것은 YMCA가 주도했던 '눕자 행동단'이 무너진 것이다. 경찰의 폭력이 얼마나 잔혹한지 알리면서 시민들의 '비폭력' 명분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었던 인상적이고도 효과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각오가 된 시민들만이 자발적으로 해야만 하는 어려운 일임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시위현장에서는 1명만 무리해도 불특정다수의 수많은 다른 시위참가자들이 피해를 본다. 자신은 안전한 곳에 숨어 폭력을 유발하면서 뒤로 빠지는 일부 시위참가자들, 그들에 대해서도 다른 시위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저지할 필요가 있다. 명분을 지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100차 촛불문화제 예고된 8월 15일 광복절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8월 15일 광복절에 대규모 기동전을 예고하고 집중적인 홍보에 나섰다. 이날의 기동전은 의미가 있다. 이명박 정부와 그 지지세력 뉴라이트가 '건국절'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발상에 대한 실천을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날을 기점이라고 본다. 이날의 대규모 기동전은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부터 그 때까지의 공백과 8월 15일 그 이후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시위를 습관적으로 관성에 젖어서는 현실과의 유리를 더욱 부채질할 뿐이다.

 

그 이후로는 '진지전'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한다. '진지전'을 통해 무심한 다른 시민들에게 "왜" 라는 의문부호를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많은 시민들이 '방송사 낙하산 사장 선임 사태'가 왜 심각한 일인지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한 '진지전'에 나서자.

 

시위의 명분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과 동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시위의 이유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을 알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관성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위, 이제는 본질적으로 고민하자.

 

앞장서서 비겁한 행위를 일삼는 일부 시위참가자들에 대해서는 시위참가자들 스스로 제지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보다 성숙한 시위를 이끌어내보자. '질긴 놈이 이기기까지', 그 과정은 무척이나 험난하다는 것을 나는 그렇듯 맞아죽을 각오로 이야기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촛불#KBS#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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