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 작가 호르헤 루이 보르헤스는 '천국'을 '필시 도서관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누구에게나 천국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 구비된 곳일 것이다. 사우나에 살고 사우나에 죽을 정도로 사우나를 사랑하는 핀란드 사람들은 천국을 멋진 사우나가 있는 곳으로 상상해, 심지어 사우나가 없다면 천국 가는 것을 재고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핀란드의 전체 인구는 약 530만 명인데 사우나는 200만 개가 넘는다. 나는 어릴 때 뜨겁고 답답한 공중목욕탕에 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는데, 핀란드 사람들은 특별한 '사우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갓 돌이 지난 아기들도 사우나를 즐긴다.
핀란드에서 최고의 손님 접대는 자신의 사우나에 초대하는 것이다. 핀란드 사람의 다른 초대는 거절해도 사우나 초대는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는 게 좋다. 왜냐하면, 그들로서는 손님 접대의 최고이자 비장의 카드를 선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핀란드 사람들의 극단적인 사우나 사랑을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 '세계 사우나 선수권 대회'다. 뜨거운 사우나에서 가장 오랫동안 버틴 사람이 우승하는 이 경기는 1999년 핀란드의 한 작은 도시인 헤이놀라(Heinola,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138㎞)에서 처음 열렸고 회를 거듭하며 그 규모가 계속 커져 이제는 매년 대회가 열릴 때마다 해외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사우나선수권 대회와 올림픽대회의 공통점은?올해는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과 잠비아를 비롯해 모두 23개국에서 160명이 참석, 명실상부 국제적인 대회가 되었다.
원래 이 경기의 단초는 헤이놀라시의 작은 공중 사우나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뜨거운 사우나에서 누가 가장 오래 버티느냐는 비공식적 동네 사우나 경연이 벌어지게 됐는데, 사우나 화로의 돌에 물을 많이 뿌려 온도가 급상승하자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된다는 이유로 주동자들은 그 사우나에서 추방됐다.
경연의 장을 잃은 사람들은 오히려 더 큰 일을 벌이고 마는데, 동네 대회를 세계 선수권대회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다소 우스꽝스럽게 탄생한 사우나 선수권대회와 현재 북경에서 열리고 있는 올림픽대회의 가장 비슷한 점은 땀을 많이 흘린 선수가 우승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땀의 질은 물론 많이 다르다. 보통 운동선수들은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땀을 흘리지만 사우나 안의 선수들은 미동도 하지 않으면서도 어마어마한 '육수'를 뿜어낸다.
또 사우나 대회에서는 너무 몸이 잘빠진 날씬한 사람보다는 지방이 웬만큼 있는, 몸집이 큰 사람이 유리하다. 그 이유는 지방층은 추운 곳뿐만 아니라 또 더운 곳에서도 몸의 항상성을 유지시켜주는 보온층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역대 우승자들도 거의 다 중년의 살집이 있는 '아줌마', '아저씨'들이었다.
대회는 예선을 거친 최종 6명이 결승을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사우나 온도는 110℃에서 시작된다. 매 30초, 0.5ℓ의 물을 사우나 화로 위 돌에 부어 온도를 계속 올리게 된다.
참가자들은 특별한 자세를 사우나에서 유지해야 하는데 엉덩이와 넓적다리는 꼭 의자에 붙여야 하며 팔 뒤꿈치는 반드시 무릎에 닿아야 한다. 그리고 사우나에서 탈출하는 순간에도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걸어나와야 기록이 인정된다.
사우나에선 안 싸우나? '시수'를 갖고 버텨라
그런데 110℃ 이상의 뜨거운 사우나에 캔맥주를 넣어 놓으면 캔맥주는 끓어 넘치는데 사람 몸은 캔맥주처럼 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 신체가 생각보다 열기를 잘 식히도록 디자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뜨거울수록 우리는 땀을 더 많이 흘리고 이 땀 흘리기를 통해서 체표와 신체 내부의 온도차가 줄어들어 정상적인 몸 상태를 최대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몸의 항상성도 주변 온도가 너무 많이 올라가다 보면 삐걱거릴 수 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주최 측은 사전에 모든 참가자에게 의사가 발행한 건강증명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물론 대회 장소에는 응급치료진이 대기하고 있다.
이밖에도 심판진은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여 기력이 많이 빠진 선수들에게 옐로우 카드를 꺼내 주의를 환기시킨다. 간혹 위험에 처한 선수가 있다면 레드카드를 행사, 그 선수를 사우나에서 퇴장시킬 수도 있다. 이런 철저한 주최 측의 관리 덕에 아직 이 대회 참가자 중 사망이나 부상자는 없었다고 한다.
올해도 여느 해와 다름없이 어릴 때부터 사우나 조기 교육의 수혜자였던 핀란드 사람들이 우승을 휩쓸었다.
지난 주말에 끝난 2008년 사우나 선수권 대회 남자부 우승자는 비야르네 헤르만손씨로 110℃ 이상 되는 사우나에서 무려 18분 15초나 버텨냈다. 여자부 우승자는 레일라 쿨린씨로 그 기록은 5분 21초였다.
특히 여성 우승자인 쿨린씨는 우승의 비결을 '시수'(sisu)라고 말해서 눈길을 끌었다.
핀란드에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3S가 있다. 핀란드의 대표적 음악가인 시벨리우스(Sibelius), 사우나(Sauna), 그리고 시수(Sisu)가 그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것이지만, 마지막 '시수'라는 단어는 많이 들어본 적이 없을 것 같다.
이 '시수'는 핀란드 사람을 관통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인내심'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면 '깡다구'가 가장 적확할 것 같다. 혹독한 기후, 척박한 토양에서 핀란드 사람들이 몇 천 년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불굴의 투지 때문이었고 핀란드인들은 그런 정신을 '시수'라 하며 자랑스러워한다.
신성한 사우나에서 경연 대회라니... 반대 목소리도그런데 이런 사우나 경연 대회를 반대하는 핀란드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이들은 실제로 핀란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사우나를 하지는 않으며 또 이런 식으로 사우나를 하면 안 된다고 소리높여 얘기한다.
실제로 사우나 온도는 90℃ 정도를 가장 이상적으로 보며 120℃ 이상 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핀란드 인들에게 사우나는 경쟁의 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경쟁에서 벗어나 긴장을 완화하는 장소이다.
사우나와 관련된 핀란드의 몇 가지 속담을 보면 그들이 사우나를 얼마나 신성시하는지 엿볼 수 있다.
▲ 사우나에 있는 것은 교회에 있는 것과 같다▲ 사우나는 죄를 씻어준다▲ 사우나는 가난한 사람의 약국이다▲ 독주와 사우나·타르가 고치지 못하는 병은 의사도 못 고친다핀란드인에게 사우나는 절대로 고통을 견디는 장소가 아니라 속세를 잊고 평화로움과 경건함에 침잠할 수 있는 곳이며 덤으로 건강도 선사 받는 곳이다. 예전에는 생사를 주관하는 곳이기도 했는데, 사우나에서 핀란드 여성은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까지 했으며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씻기도 했다.
이들에게 사우나는 단순히 목욕이라는 행위를 넘어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종교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경쟁적으로 뜨거운 김을 참아내며 '고통'을 감수하는 사우나 경연 대회를 많은 핀란드 사람들은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돈과 웃음 함께 누리는 이색 대회여름철 핀란드에서는 유난히 해외토픽에 날 만한 이상한 세계 선수권 대회가 많이 개최된다. 마누라 업고 달리기 대회, 모기 많이 죽이기 대회, 개미집에 앉아서 오래 견디기 대회, 휴대전화 던지기 대회, 노래방에서 오랫동안 노래 부르기 대회 등등.
생각보다 엉뚱한 구석이 많고 유머러스한 핀란드 사람들은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 이런 대회를 생각해냈지만, 덤으로 이런 이벤트를 통해 실질적인 이득도 많이 얻고 있다.
엉뚱한 선수권 대회는 보통 대도시가 아닌 핀란드 중소도시에서 개최되는 경우가 많은데, 별다른 기삿거리가 없던 이 도시들은 이런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세계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릴 기회를 얻게 되고 또 대회 기간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서 관광 수입도 짭짤하게 올리게 된다.
이렇게 '재미'와 '실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을 수 있는 괴상한 세계선수권 대회가 핀란드만의 전유물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국의 어느 조그만 시 혹은 군에서도 익살스럽고 황당한 OOO 세계선수권대회를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즐거운 미소와 두둑한 주머니를 함께 선사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것을 자못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