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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문이며 정문이다. 청나라의 침공에 도성을 비우고 정문으로 들어간 인조는 항복하기 위하여 뒷문(서문)을 나서는 것으로 45일간의 항전을 마감했다.
▲ 지화문. 남한산성 남문이며 정문이다. 청나라의 침공에 도성을 비우고 정문으로 들어간 인조는 항복하기 위하여 뒷문(서문)을 나서는 것으로 45일간의 항전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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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이념투쟁을 거쳐 판세를 장악한 주화파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던 산성항전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는 첨예하게 맞섰다. 모두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자는 일념이다. 하지만 방법은 달랐다. 과거 회귀 본능에 함몰된 사람들과 현실을 직시하자는 사람들은 확연히 달랐다.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을 '참하라'는 척화파의 공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나 대세는 주화로 흘렀다. 치열한 이념투쟁을 거쳐 판세를 장악한 주화파는 삼전도 항복 후 득세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끌려갈 때 많은 신하들이 호종했다. 가함대신 남이웅이 유일하게 62세였으며 대부분의 신하들은 젊었다. 척화파도 있었고 주화파도 있었다. 그들에겐 척화와 주화라는 이념을 넘어 '삼배구고두'의 치욕과 통한의 적개심이 그들의 가슴을 지배했고 세자와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의리 하나였다.

심양에 도착한 그들은 하늘같이 믿었던 명나라가 기울고 청나라가 융기하는 현장의 중심에서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국제질서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죽음을 목격했고 정뇌경의 무참한 죽임을 목도했다. 한스러웠지만 현실이었다. 힘이 받쳐주지 않는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라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실감했다.

그들은 소현세자가 징병과 군량미 문제로 청나라의 시달림을 당할 때 고국에 읍소했다. 흉년과 전란에 황폐해진 고국의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렇지만 애걸했다. 하지만 고국에 있는 대소신료들은 느긋했다. 사정도 여의치 않았지만 가능하면 보내지 않으려고 시간을 끌었다. 그 이면에는 청나라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반청사상이 깔려있었다.

교대근무로 귀국한 빈객 출신 젊은이들이 요직에 올랐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하나같이 승지에 임명되어 왕의 측근에 있었다. 박황이 돌아와서 도승지에 제수되었고 귀국한 박노가 좌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신득연 역시 귀국과 함께 도승지에 올랐다. 심양의 정보에 목말라하는 인조가 그들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이 깔려있었지만 임금을 에워싼 하나의 세력이 형성된 것이다.

색깔이 다른 젊은이들, 원로들에게 왕따 당하다

현실을 인정하는 그들은 주화파하고는 또 다른 색깔을 띠고 있었다. 이것이 명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리 못한 주화파 원로들에게 못마땅하게 비친 것이다. 김류와 최명길이 퇴장한 조정은 윤휘와 홍서봉이 좌장이다. 신득연이 딱 걸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신득연은 심양에 끌려가 곤혹을 치르고 동료를 무함했다는 혐의로 제주에 유배되어 생을 마감했다.

신득연과 홍서봉의 장계를 검토한 비국이 회계했다.

"신득연이 써서 제시한 사람은 설사 진달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수용하지 않았으니 공언에 불과합니다. 이제 한사람의 실언으로 한 사람을 불측한 곳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은 전하께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득연의 일은 살아나고자 하는 계책이니 참으로 가련합니다."

김상헌을 최초로 실토한 사람은 홍서봉인데 실언한 사람이 모호해졌다. 둔갑이다. 둔갑이 반복되면 사실이 된다. 말(言)은 증발하고 기록은 남는다. 이것이 역사다.

"남을 사지에 밀어 넣고 자신은 살기를 구하였으니 의(義)가 아니며 국가에 근심을 끼쳤으니 충(忠)이 아니다. 그런데도 경들은 분노하지 않고 잠자코 있으니 오늘날의 조정은 법이 없다고 할 만하다."

인조의 분노가 신득연에게 꽂혔다. 재물이 필요한 것이다.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한데 딱 걸려든 것이다. 재물은 준비했으나 김상헌이 문제였다. 용골대가 호출했으나 선뜻 보내자는 사람은 없었다.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죽음의 길이다. 우의정 강석기가 총대를 멨다.

"김상헌은 정축하성이래 궁벽한 시골에서 세상을 버리고 죽기를 작심하였으나 죽지 못해 살아있습니다. 저들이 김상헌을 지목한 것은 간사한 무리가 밀통하여 무함한 소치이니 독촉한다고 보내게 되면 이런 전례가 만연되어 감정을 품은 무리가 무함을 자행할 것이니 장래가 우려됩니다."

용골대가 김상헌을 호출한 것은 무함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어 비국이 상차했다.

"김상헌은 70이 넘은 나이로 노환이 깊어 시골에 은둔해 지낸 지가 이미 여러 해입니다. 지금 비록 그의 죄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그의 생사를 논하지 않은 채 억지로 들여보낸다면 결코 그곳까지 살아서 도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의주에 나가 있는 상신에게 이런 내용으로 말하게 해서 선처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뢴 대로 하라. 김상헌이 혹시라도 지레 죽는다면 필시 국가에 근심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 점을 경들은 생각하라."

재야 원로를 손대는 것은 벌집을 건드리는 것이다

김상헌은 비록 초야에 묻혀있지만 척화파의 거두다. 그의 추종세력이 곳곳에 박혀있고 백성들 정서 또한 김상헌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벌집을 건드리지 않고 싶다는 뜻이다. 조정의 밀명을 받은 홍서봉이 용골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입 밖에 꺼내지도 못하고 질책만 당했다.

"김상헌이 아직도 소식이 없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 우리가 공들을 묶어 심양으로 들어갈 줄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왕과 대신 이하 모두가 김상헌과 한마음이라서 비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끝내 보내오지 않으면 공들을 포대에다 담아 함거에다 싣고 심양으로 가서 가둘 것이다. 그리고 김상헌을 체포하기 위하여 군대를 투입할 것이다."

혹을 떼려다 붙였다. '포대에 담아 수레에 싣고 가겠다' 하니 눈앞이 노랗고 아찔했다. 한다면 하는 청나라 사람들이다. 다음 수순이 두렵고 무서웠다. 협박을 받은 홍서봉이 한성에 장계를 올려 급박함을 알렸으나 조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시나무 떨듯하고 있는 홍서봉을 역관 정명수가 찾아왔다.

"상국의 명령을 시행하지 않았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곳이 있소. 비국의 유사당상을 속히 불러오고 좌상도 오게 하시오."

줄줄이 호출령이다. 유사당상과 좌의정 호출을 받은 조정은 긴급 구수회의를 소집했다. 우의정 강석기가 대타를 자임했다.

"저들의 명이 아무리 불같다 하더라도 영상도 없는 조정을 비워두고 좌상이 간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신이 유사당상과 함께 떠나겠습니다."

우의정 강석기는 소현세자의 장인이다. 사은사로 심양을 다녀왔다. 용골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자신이 용장을 만나 꼬인 실타래를 풀어보겠다는 것이다.

"우상이 아무리 지성으로 개유한다 해도 들어줄 리가 없을 듯합니다. 저들이 신을 불렀으니 신이 가지 않는다면 일은 해결되지 않고 그들의 화만 돋울 듯합니다. 속히 가서 후환이없게 해 주소서."

좌의정 신경진이 가겠다고 나섰다.

"경이 가는 것은 불가하다. 우선 유사당상이 떠나도록 하라."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 조선 사람들은 담배를 귀중품으로 여겼다. 담배쌈지는 오늘날의 고급 지갑 이상의 애장품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담배쌈지.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 조선 사람들은 담배를 귀중품으로 여겼다. 담배쌈지는 오늘날의 고급 지갑 이상의 애장품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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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출한 김상헌은 꿈쩍하지 않고 당상관들이 한성을 떠났다. 그 시각. 용골대가 의주에 머물고 있던 홍서봉 등 대소신료들을 불렀다. 잔뜩 긴장한 신료들이 의주관에 도착했다. 청나라 군사가 임시 군영으로 쓰고 있는 관아 마당에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들이 형틀에 묶여 있었다.

"이들은 의주사람 박경용의 종 겨울쇠와 문의족, 개성사람 무신이라는 사람인데 구련성에서 남초를 거래하다 븥잡혔다. 이들은 나라에서 금하는 물품 밀매자들로 즉결 처단하여야 마땅하나 이들이 조선 사람들이라 그대들에게 알린 후 처형하려고 여기까지 끌고 왔다."

담배는 청나라가 엄격히 금지하는 금수품목이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조선에 상륙한 담배가 한반도를 접수하고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담배의 중독성과 폐해에 주목한 청나라는 일벌백계주의로 담배거래를 엄단했으나 차익을 노리는 담배상인들은 근절하지 못했다.

이탈체에서 흘러내린 붉은 선혈이 조선 땅을 적셨다

관아 마당에 묶여있는 죄수들이 산발한 머리칼 틈사이로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살려달라는 애원의 눈빛이다. 그러나 대신들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외면했다. 자기나라에 외국인이 들어와 자기나라 사람들을 '처형하겠다' 해도 누구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살벌한 분위기가 그들의 무력감을 더해줄 뿐이었다.

"참하라."

용골대의 명이 떨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알사의 칼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칼춤 시간은 극히 짧았다. 바람을 가른 알사의 칼끝에서 피가 솟구쳤다. 순간 하나의 몸이 둘로 갈라지며 떨어졌다. 일체에서 분리된 이탈체에서 흘러내린 붉은 선혈이 땅을 적셨다. 그 땅은 조선 땅이었다.

"모두들 말에 올라라."

피 맛을 본 용골대가 말에 오르며 부하 장수들에게 명했다.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라."

용골대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튀어나갔다. 그 뒤를 이어 청나라 군사들의 말발굽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흙먼지 자욱한 관아에 남아있던 신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남쪽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한성??"

화들짝 놀란 홍서봉은 급히 장계를 작성하여 급주마를 띄웠다.


태그:#주화파, #척화파, #담배, #김상헌, #홍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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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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