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위대 깃발이 산산조각으로 찢겼다. 13일 오후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다. 1992년 처음 시작된 이래 16년 동안 지속해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이날로 826회를 맞았다.
이날 집회는 '해방 63주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세계연대집회'라는 주제로 세계성공회 G.F.S 17개국의 회원들과 마산, 인천 등에서 찾아온 청소년 단체,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등 단체와, '위안부' 할머니 7명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200명 정도의 집회 참가자들이 운집한 일본 대사관 앞은 그늘이 들지 않는 곳이어서 더욱 더웠다. 집회 시작 15분 전, 마산 내서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은 햇볕이 따가운 바닥에 앉았고, 곧이어 인천 청소년 인권복지센터 '내일'의 학생들과 여러 단체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모두 보라색 풍선과 부채를 들고 있었다. 부채에는 '일본 정부 사과하라' 등의 문구가 손글씨로 쓰여 있었다.
학생들의 얼굴은 밝았다. 그 중 여섯 개의 보라색 풍선을 길게 이어 들고 있는 학생이 눈에 띄었다. 마산 내서여자고등학교 역사탐방부 학생인 전유정(18)양이었다. "4시간 동안 고속버스 타고 왔다"고 한다. 어제 '나눔의 집'에 갔다가 오늘 수요 시위에 왔고, 조계사에 들른 후 다시 마산으로 돌아갈 예정이란다. "왜 집회를 하는지 아느냐"고 물으니 "아주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본과 한국 정부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도 다들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손바닥으로 하늘 못 가린다"12시가 되자 최광기씨의 사회로 집회가 시작됐다. 첫 발언자는 한국염 정대협 공동대표.
한 대표는 "해방 63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해방을 맞지 못했다"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어야 진정한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후 한 대표가 갑자기 참가자들에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라"고 말했다. 한 대표의 뜻을 알아차린 참가자들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뒤 "안 가려져요!"라고 일제히 외쳤다. 그러자 한 대표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일본의 사과를 하루 빨리 받아내야 한다"는 말로 발언을 마쳤다.
이 날 집회에는 각국에서 온 수십 명의 외국인도 참가했다. 이들은 시종일관 집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17개국이 연대하는 대한성공회 G.F.S 회원들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섬김으로 이루는 조화와 희망'이라며, 여기서의 '섬김'은 억압받는 이들을 향한 섬김이라했다.
이들은 "세계 각국의 회원들이 진실을 알기 위해 이 자리에 참여했고, 지난 일요일에는 나눔의 집에 가서 할머니들에게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며 앞으로도 할머니들의 사연을 알리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애쓸 것을 다짐했다.
'할머니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자발언 중간 퍼포먼스가 있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상징하는 하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검정색 영정 액자를 들고 등장했다. 처음에 액자를 들고 서서히 걸어가던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비틀비틀 거리며 고통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할머니들의 꿈이 좌절되는 상황을 맨발로 뜨거운 아스팔트 땅바닥을 걷는 것과, 영정 액자를 들고 고통스럽게 춤추는 것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일순간 집회 참여자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퍼포먼스 끝 무렵, 하얀 현수막이 펼쳐졌다. '할머니의 꿈'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현수막. 공연자들이 손바닥에 보라색, 빨간색 인주를 찍어 현수막에 손도장을 찍었다. 그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현수막에 손도장을 찍기 위해 줄을 섰다. 하얀 현수막은 보랏빛, 빨간빛의 손도장들로 채워졌고, 손의 모양은 나비가 날갯짓 하는 모양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좌절되었던 '할머니의 꿈'은 시민들에 의해 날개를 달았다. 고등학생, 외국인, 할아버지 등 모든 사람들이 손바닥이 보랏빛이 되는 것도 잊은 채 날개 만드는 작업에 열중했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퍼포먼스가 끝나자 다시 발언 시간이 주어졌다. 곽정숙 민주노동당 의원이 나섰다.
"저는 여성장애인입니다. 여성장애인과 국민의 꿈은 같습니다. '평화'를 원하는 것입니다.일본이 평화의 꿈을 깨뜨린 지 63년이 됐지만 현재도 일본은 대한민국의 해방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독도, 위안부 등 가장 기본적인 사안에서마저 일본은 우리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인권과 평화를 되찾기 위해 함께 싸우겠습니다."
곧이어 일본인 요시우카 노리코씨가 발언했다. 준비해온 유인물을 보긴 했지만 또박또박 한국말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3일 전 오사카 집회에서 600여 명이 모였다"며 "이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며 지금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 성폭력을 위한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창작 판소리꾼 '바닥소리'의 공연이 이어졌다. 바닥소리가 "눈도 멀고 귀도 먹은 일본 정부 들어라. 우리들의 외침이 들리지 않냐"는 가사를 '아리랑'에 맞춰 신나게 부르자, 이용수 할머니가 마이크를 잡고 "내가 왜 이렇게 나이가 드는지 아느냐"면서 일본 정부를 원망하는 가락을 신명나게 뽑았다. 울분이 가득찬 집회를 넘어서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제 형식의 수요 집회가 펼쳐졌다.
군국주의와 여성 폭력, MV OUT!보통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집회는 이 날 퍼포먼스와 발언이 길어져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집회 끝 무렵 사회자가 "군국주의와 여성 폭력을 반대한다!"라는 구호를 영어로 만든 "Militarism and Violence against women OUT!", 줄여서 'MV OUT'을 외치자 모두 따라 외쳤다.
이어 사회자가 "촛불을 높이 들었던 청소년들이 오늘은 보라색 풍선을 들었다"며 성명서를 낭독할 인천 청소년 단체 '내일' 회원 두 명을 소개했다. 그들은 "일본 정부는 국제기구와 각국 의회의 권고대로 일본군 위안부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 앞에 공식사죄하며 법적배상하라!" "한국 정부는 반인권적, 몰역사적 태도를 버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즉각 앞장서라!" 등의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오래 사세요!" 외쳐보지만... 집회는 일본 자위대 깃발을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산산 조각내는 것으로 끝났다. 일본의 군국주의적인 사고의 청산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퍼포먼스였다. 시민들의 머리 위로 깃발이 올라가자 순식간에 시민들의 손에 깃발은 찢겨졌다. 곧바로 시민들은 들고 있던 보라색 풍선을 하늘 위로 날렸다.
산산 조각나 땅에 흩어진 자위대 깃발과 하늘 높이 올라가는 풍선이 대비됐다. 정대협 한 자원봉사자는 "보라색 풍선은 할머니들을 뜻한다. 우울하지만 고귀한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꿈은 또 한 번 하늘 높이 비상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극단 '나비'의 공연이 이번 주 토요일(16일) 저녁 8시 명동성당 앞에서 있을 예정이다. 다음 아고라에서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모금 청원 운동'도 진행중이다. 모두들 '할머니 오래 사세요!'를 외쳐보지만 이미 150여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가셨다.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덧붙이는 글 | 이보라 기자는 <오마이뉴스> 8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