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황석영 성장 성장 소설의 한 공간을 채우는 소설
▲ 황석영 신작 개밥바라기별 표지 황석영 성장 성장 소설의 한 공간을 채우는 소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스물 일곱엔가 친구의 옥바라지를 한 적이 있다. 종로2가의 한 중국집에서 둘이 이과두주 댓병 정도를 마셨는데, 친구가 인사불성이 돼서 경찰들과 시비가 붙었다. 결국 녀석은 종로경찰서 구치장까지 갔다. 이래저래 해서 그날 밤에 풀려났지만 다음날 즉결심판에 대해 잘못 알아 벌금 대신에 이틀 구류를 살게 됐다.

같이 술을 마신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나는 녀석에게 사식과 책을 넣어줬다. 평소 책을 안 읽기에 무슨 책을 줄까 고민하다. <호밀밭의 파수꾼>과 시집을 넣었다. 나 역시 잃지 않은 책인데 그 책을 고른 것은 방황하던 청소년의 성장소설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틀 후 그 책을 다 읽은 친구는 너무 심심했다고 한다. 사실 다른 사람의 방황을 텍스트로 읽는 순간 너무 시시해지는 게 삶이다.

독자는 작가처럼 치열하지도 못하더라도 어떻든 종이 위에 씌어지는 순간 치열한 삶은 이미 다 소화를 거친 포도당마냥 부드럽다. 기자 역시 용기가 없어서 그런 사고를 치지 않았지만 방황하면서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을 읽으며 자랐다. 아마 책 읽기이라는 대체 요법을 찾지 못했다면 다른 방황의 길을 찾지 않았을까 싶다.

황석영의 신작 <개밥바라기별>은 포털의 연재부터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10번 정도 연재를 읽고 포기해 버렸다. 일일이 찾아가기가 귀찮았고 생각보다 집중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연재가 끝난 후 며칠 전 책으로 출간되어 사서 읽었다.

기자는 첫 부분을 잃으면서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미아'(소설 중 중심 화자의 여자친구)를 만나 나눌 화끈한 연애담이나 베트남 전쟁 이야기가 나올 것으로 잔득 기대하고 읽었다. 그런데 소설은 후반까지 젊은 날 방황하던 친구들을 골고루 바꾸어가며 다른 시각을 통해 그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설의 액자(額子)는 컸지만 그 안의 그림은 ‘청명상하도’처럼 갖가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제는 기억력이 나빠져 집중하고 읽지 못해선지 화자들의 이름과 이미지조차 갖지 못할 정도였다(기자의 판단 여부를 떠나서 어떻든 너무 많은 화자의 변동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굳이 이런 식으로 화자를 많이 바꿀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어떻든 이 소설은 성장 소설이다.

소설은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젊은 이들의 모습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사실 베트남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건 ‘무기의 그늘’에 있었고, 후반에 나오는 떠도는 이야기는 ‘객지’나 ‘삼포 가는 길’에 나오니 그런 구조들이야 퍼즐 맞추기를 하면 간단한 일이다. 어떻든 작가의 삶에서 비어있었던 기억의 한 칸을 채운 셈이다.

소설의 미덕인지 부작용인지 모르는데, 책을 읽으면서 기자는 방황하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대학입시 나이에 정처를 두지 못해서 갈팡질팡했던 기억, 대학입시 실패한 상태에서 행정고시 시험을 보고 떠난 무전여행, 온 몸을 녹초로 만들었던 경기도에서 강원도에 이르는 길, 치악산 산속에서의 조난 기억, 대구 성서공단에서의 노동, 현충사 앞에서의 노숙 등이 소설을 읽는 내내 스쳐갔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 나를 내 기억으로 회귀시키는 것이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 알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가졌던 고민이나 방황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은 흥분되는 것이다. “아 나에게도 이런 고민의 시간이 있었지” 하는 다른 종류의 번뇌들로 둘러쌓인 나를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성장소설도 충분한 의미를 주는 것 같다. 앞서 말했듯 어릴 적 내 삶의 지표를 준 작가는 헤르만 헤세였다. ‘수레 바퀴 아래에서’, ‘데미안’,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로 이어지는 성장소설의 궤적을 배웠다. 물론 ‘개밥바라기별’의 성장과 ‘유리알 유희’가 보여주는 지극한(?) 경지를 비교하는 식의 평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흔이 된 지금의 삶도 스무살적 방황과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단지 젊은 날 고민의 중심이 여자나 고시였다면 지금의 고민은 사업과 성공이라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작가에게 감사드리는 것은 고정된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고, 방황하는 젊은 날로 돌아가 기자를 그 시절로 이끌어준 것이다.

인터넷 연재라는 방식도 다시금 생각해 봤다. 필자가 사이버공간을 처음 접했던 95년 말에 하이텔 등지에서는 ‘성석제’나 ‘이순원’, ‘신경숙’ 같은 작가를 초빙해서 연재한 적이 있다. 방식만 인터넷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을 뿐 네이버의 이 시도는 당시 하이텔 문학연재와 거의 같은 방식이다.

어떻든 황석영처럼 나이든 작가들에게 무거운 이야기보다는 젊은 날의 가벼운 이야기를 쓸 수 있게 한 것은 나름대로의 성과다. 물론 여전히 가난한 이들이 많은 전업 작가들에게 괜찮은 고료를 줄 수 있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chogaci)에도 올립니다



개밥바라기별 (양장)

, 문학동네(2000)


태그:#황석영, #개밥바라기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