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요즘 신문을 보니 미국 쇠고기 수입에서 공기업 민영화, 인터넷 통제와 언론 장악 기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제를 놓고 시민들의 저항과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일제하의 독립운동은 물론 이승만 정권에서 군사독재 시기 사이의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보다는 규모가 작고 동원된 느낌이 강하게 나며 논리와 도덕성에서 매우 취약해 보이지만 목소리가 크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우익집단의 시위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국인이면서도 해괴하게도 시청 앞 광장에서 성조기를 흔들어대기도 하고, 우익 정치인이라면 도덕성이나 정책 내용과 상관없이 무작정 추종하며, 논리적인 주장을 펴기보다는 악을 쓰기를 좋아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증오심에 불타며, 가스통을 들이대는 등 폭력성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재정적인 지원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 수구집단은 특정 사안에 대해 일관된 견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체계적인 정치적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념도 없는 사람들, 너희는 누구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의 역사를 살펴본 결과 한국 수구집단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기는 하지만 두 가지 불변하는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하나는 아무런 원칙도 도덕적 토대도 없이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정치권력을 추종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주의적인 구호를 내세우면서도 미국과 그 제국체제를 추앙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득을 위하여 한국과 한국인의 이익이 아닌 미 제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런 한국의 수구집단을 저는 '신사대주의 친제국주의자들' 또는 줄여서 '친제파'라고 부릅니다. 일제 때 친일파 한국인들이 있었듯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60년 동안에는 친미파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현대의 전 지구적인 경제적·군사적·정치적 제국주의 체제 속에서 제국의 이익에 기생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친제파의 기원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는 단일한 탄생의 순간이나 장소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현대 친제파의 시작의 일단을 볼 수 있습니다.
1945년 당시 한국에는 여러 부류의 한국인들과 수많은 정치적인 목표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민족을 팔아 개인적인 영화를 누렸던 친일파의 잔재도 있었고 그 둘 사이에 위치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운형 선생을 비롯한 당시의 지도자들은 기꺼이 친일행각을 했던 사람들이 새로 등장한 강력한 외세인 미국에 빌붙어 비슷하게 반민족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또다시 한국의 독립을 저해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여운형 선생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처음에는 혼재해 있던 견해 차이를 조율해보려 노력했으나 한국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극복하지 못할 격차가 있다는 것이 곧 드러났습니다.
일제하 경찰조직에 몸담았던 사람들이나 일부 악질 지주들, 자본가들 등은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축적한 개인적인 기득권과 재산이 침탈될까 두려워 우익세력으로 결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두 집단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는 친일의 과거 경력으로 위기에 처해있던,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결국 대한민국의 지배층이 된 우익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나머지 대다수의 국민이었습니다.
해방 직후에 친일파는 아주 소수였고 대부분의 동포들에게 미움과 원망을 받았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그들의 죄질로 보나 수적인 불균형으로 보나 친일파는 처벌을 받고 모든 기득권을 잃어야 마땅했습니다.
불행히도 대부분 독자들이 이미 아시다시피, 친일 경력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남한에서는 채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권력을 쥐게 되었습니다. 해방전후사에 대한 강의를 하다보면 학생들이 흔히 하는 질문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한국인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는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선 한반도에서 미국이 한 역할을 설명해야만 합니다.
일제 때는 "미국=귀신·짐승"... 일제 패망 후엔 미국 추종
1945년 당시 남한에 살던 대부분 사람들의 선택지는 친일파들이 대거 포진한 정권 밑에서 살거나, 그에 저항하거나 하는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친일로 살찐 사람들에게는 미군정하의 친미파로 새로 태어나 일제 때 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과 재산을 얻으며 살아갈 기회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지 중장이 이끈 미군정은 해방 직후 보복이 두려워 산속으로 도망쳐 숨어있던 친일파들을 불러내어 경찰 등의 요직에 임명했습니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이들은 처형을 당하는 줄 알고 울며불며 질질 끌려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견해란 체계적 신념이라기보다는 생존과 출세를 위한 편리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한두 달 전만 해도 일본인들의 사상과 정책을 충실히 따르며 '귀축미영(귀신이나 짐승 같은 미국과 영국)이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새로운 외국인 통치자들의 언어와 신념을 철저히 추종하고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미군정은 거의 정신병적으로 공산주의를 증오하고 두려워했고 친제파 한국인들은 즉시 똑같은 반공주의를 내세웠습니다.
일제 때 큰 재산을 축적한 김성수 같은 이들은 한국을 점령한 미국인들과 재빨리 친분을 맺었습니다. 1948년도까지는 토지개혁 등에 반대하며 북쪽에서 내려온 젊은이들로 구성된 서북청년회 등의 우익단체가 여럿 생겨나 미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활동했습니다. (강준만 교수에 따르면 미군정 당시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동맹과 같은 우익 청년단체의 조직원 수가 무려 323만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이념 때문이 아니라 높은 실업률과 극심한 빈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우익 테러 단원의 경우 당시 임금 노동자의 수십 배에 달하는 소득을 올렸다고 합니다.)
새로 조직된 경찰에서도 고위직 간부들은 거의 전부 일제 때 경찰로 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중에 국군이 결성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과거 일본 황군의 장교였던 채병덕(미군들이 '뚱보 채가'라고 불렀던) 같은 자들을 장교로 다시 임용했습니다.
미군정으로서는 한국에 민주공화국을 설립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는 여겼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미국정부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국 정치 체제를 만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친일파 계층은 이와 같은 미제국의 사업에 요긴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의 미군정 시기에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여러 가지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일부는 학살을 당하기도 했고, 일부는 경찰이나 우익단체 등 공권력을 등에 업은 사람들에 의해 테러나 고문으로 죽었고, 일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직접 더러운 만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주로 미국인의 충견이 된 친제파 한국인들의 손을 빌어 저질렀습니다. (실제로 미군정의 많은 간부들은 이런 잔혹한 통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서서 말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컨대 일부 미국인들은 장택상을 "네로의 얼굴과 괴링(나치 장교)의 태도를 가진 자"라고 불렀지만 궁극적으로는 장택상의 잔혹한 수법들을 지지했습니다.)
미국 우익과 한국 친제파의 차이점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미국에도 이와 비슷한 우익집단이 있고 아무런 원칙도 소신도 없이 권력을 따라 양지만을 쫓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차이점은 미국의 우익세력은 제국의 중심에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우익은 친제파처럼 동포를 배신하고 제국과 '합작'할 일이 없으며, 단지 제국의 일부로 내부에서 정책 수행을 도울 뿐입니다. 이들은 제국의 특권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며 '대다수 제국 시민들은 제국에 충성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제국의 시민'이라는 그들의 정체감은 제국 밖의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고 대립하는 것이지 제국 내부의 사람들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국의 친제파들은 외세와 원칙 없는 연합을 한다는 그 자체로 같은 한국 사람들에게 배신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권력을 좇아 원칙을 버린 사람들은 논리나 이성 또는 정의와 윤리를 기반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목소리를 높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등의 언론 매체에 등장하는 러시 림보 같은 보수 논객들과 그 추종자들은 논리적인 파산 상태에서 똑같은 애국주의적 언설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외쳐댑니다.
광신적인 애국주의자들과 수구주의자들은 미국 역사에서 처음부터 언제나 있었지만 그 극단적인 예로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동안 창궐했던 매카시즘을 들 수 있습니다. 상원의원이었던 조셉 매카시를 비롯한 소수의 인물들이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대중의 불안감을 자극하여 증오와 공포의 광풍을 불러왔던 시기입니다.
한국의 미군정기와 일부 겹치는 이 시기는 미국에서 극도로 반공주의를 부르짖던 때였습니다. 미국정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편집증적 사냥을 당했습니다. 수천명에 이르는 미국 시민들이 공산주의자로 또는 친공산주의적으로 몰려 직장을 잃거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예일대 법대 교수인 랠프 브라운은 당시 공산주의자 사냥에 걸려 해직된 사람이 1만명 가량 된다고 추정했습니다. 1만명이라면 그리 큰 숫자는 아니지만 브라운 교수도 인정했듯 이는 채용과정에서 미리 제외된 사람들과 압력을 받아서 스스로 사임한 사람들, 그리고 피상적으로는 다른 이유로 해고된 수많은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은 숫자이기에 상당히 과소평가 되었다고 봅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누군가가 공산주의자로 지목되기만 해도 유죄가 확정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가 공산주의를 진심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공산주의를 돕고 지지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매카시 의원에 대한 지지율은 한 때 50%에 달했고 29%만이 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매카시는 1950년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이며 "여기 205명 명단이 있습니다, 이들은 공산당원이라고 밝혀진 자들인데도 국무부 내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그 종이에는 아무 이름도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명단이라는 것은 완전한 허구였습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흠… 정치·언론·학계 등 온갖 곳에 주사파들이 다 침투해있다고 주장한 한국의 모 대학총장이 생각나는 것은 저 뿐인가요?)
특히 작가들과 연예인들은 공산주의자 간첩을 찾아내자는 편집증적 사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일부는 공산주의에 공감한다는 이유로 여권을 뺏기기도 했고 일부는 다른 동료 공산주의자들의 이름을 대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기도 했습니다. 일단 공산주의자 혐의로 기소되면 재판 결과에 상관없이 연예인으로서 커리어는 망가지게 마련이었습니다. 레나 혼, 아서 밀러, 아론 코플랜드, 레너드 번스타인, 찰리 채플린 등 유명한 작가나 예술가들이 줄줄이 소환되었습니다.
독립 전 미국에도 친영파 있었지만...
<침묵의 소용돌이>란 책의 저자인 수전 스트래인지는 "한 사회에서 한두 명이 나서서 자신들의 생각이 다수의 생각이라고 대중이 믿도록 이끌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침묵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수가 침묵하게 되면 소수는 요란하게 떠들어대면서 다수의 더욱 깊은 침묵을 유도하게 됩니다. 미국의 매카시즘 시대가 그랬습니다.
매카시는 그렇게 해서 한동안 정치적인 권력을 얻었지만 강력한 외세에 빌붙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의 수법은 미국적이지 못한, "내부에 숨어있는"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외세(공산주의)와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를 부추긴 것이었습니다.
매카시가 대중 동원용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는 내부에 스며든 위협 때문에 위험에 처한 제국이었습니다. 성조기를 흔들고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어 부르며 북한을 위험한 적으로 규정하는 한국 수구집단의 행태와는 아주 다릅니다.
한국의 친제파들이 자신들의 행태를 정당화할 유일한 방법은 제국 자체를 미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국을 정당화함으로써 그들은 동시에 자기 나라와 자기 민족의 복지보다 제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며, 자신들을 동포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고, 제국의 힘과 위광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친제파들은 그들의 운명을 제국의 변덕과 기분에 스스로 내맡긴 채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식민 통치를 경험한 나라들에서는 어디에나 외세에 빌붙어 권력과 재산과 특권을 추구한 계층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미국의 독립전쟁 당시에도 친영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정부 수립 초기부터 그런 매판계층이 미국과 손잡고 정치권력의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난 60년 동안 군대와 경찰과 검찰과 내각 등에서 국가권력의 고위층을 차지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사대주의적 친제파였다는 사실은 왜 국가정책의 기본 방향이 특정 계층의 이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대략 흘러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마지막으로, 시청 앞 광장에서 외국 국기를 흔들며 제국과 연대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고, 자국 정부에 대한 외국 정부의 개입과 영향을 부탁하며, 제국을 축복하고 북한을 저주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동기는 무엇인지는 한미관계의 역사를 들여다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에도 다른 글에서 쓴 적이 있듯이 친제파들의 낯 뜨거운 행동은 미국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한국과 한국인을 좋아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정신나간 친미데모를 보면서 ▲ 첫째, 한국은 열등하다 ▲ 둘째, 한국의 존재목적은 미국의 이익과 정책을 기꺼이 대변하는 것이라는 미국중심적인 사고를 더욱 공고히 할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에서 참조한 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Bruce Cumings,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1.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Jon Halliday and Bruce Cumings, Korea: The unknow war. London: Viking, 1988.
Gregory Henderson.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8.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2.
http://www.pbs.org/wnet/americanmasters/database/mccarthyism.html
http://www.cursor.org/stories/fascismintroduction.php
http://www.english.uiuc.edu/maps/mccarthy/mccarth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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