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명 압축·내정설' 靑, KBS사장 선임 사실상 개입
21일 <경향신문>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KBS 사장 후보 공모에 아직 아무도 응모하지 않은 상태에서 '3명 압축', '유력후보설'이 청와대와 여권에서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는 보도였다. 사장 후보 기준을 청와대가 정하는 등 '사전 시나리오'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도 인용해 보도했다.
그러자 당일 청와대가 발끈했다.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다. 곽경수 춘추관장은 '청와대 관계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언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 입장'을 밝힌 게 아니라고 말했다. <경향신문>의 보도가 사실과 다르므로 정정보도를 요청한다고 했다.
<경향신문>이 22일 1면 머리기사로 다시 보도했다.
정정길·이동관·최시중·유재천 KBS사장 유력후보와 대책회의
17일 저녁 서울 시내 한 호텔 식당에서 정정길 대통령 실장,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최시중 방통위원장, 유재천 KBS 이사장이 김은구 전 KBS 이사, 박흥수 강원정보영상진흥원 이사장(전 KBS 이사), 최동호 육아TV회장(전 KBS 부사장)과 만나 KBS 새 사장 인선 문제 등을 논의했다는 보도였다.
<경향신문>은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KBS 후임 사장이 중요한 문제이며,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여러분을 모시게 됐다'는 요지의 인사말을 한 것으로 여권과 방송계 관계자들은 전했다"고 보도했다. KBS 차기 사장 후보로 유력시됐던 '김인규 후보 카드'가 무산된 데 대한 '대책회의' 성격이 짙다는 보도였다.
그러자 청와대는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듣기만 한 자리"였다고 해명하고 나섰다. 참석자 중 한 명인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이 직접 나섰다.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주선으로 마련된 자리였으며, "정정길 대통령 실장님은 원래 계획에 없었는데, 제(이동관 대변인)가 제안을 해서 모시고 간 것"이라고 해명했다. "KBS의 공영성 회복과 방만 경영 해소라고 하는 과제에 대해 방송계 원로분들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자리"였지, 결코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라고 했다.
이쯤 되면 블랙 코미디다. 이건 숫제 '눈감고 아웅'이 아니라 '눈뜨고 아웅'이다.
청와대-방통위원장-KBS 이사장은 왜 모였나?
우선 <경향신문> 기사는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KBS 후임 사장이 중요한 문제이며,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여러분을 모시게 됐다"고 인사말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모임의 일시와 참석자가 정확하게 보도된 것으로 보아 <경향신문>에 이같은 사실을 전한 이가 아예 나오지도 않은 이야기를 전할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 그것이 상식적 판단이다.
또 대통령 실장, 방통위 위원장, KBS 이사장이 KBS 차기 사장 후보 물망에 오를 만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KBS문제'를 논의했는데, 최대의 현안이 되고 있는 KBS 후임 사장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논의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대통령 실장이나 방통위원장, KBS 이사장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인가.
그 이후의 정황을 보더라도 그렇다. 대통령 실장까지 참석한 '대책회의' 이틀 후인 19일 KBS 차기 사장으로 유력시됐던 김인규 전 KBS 이사는 KBS 사장 후보에 응모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20일 이 모임에 참석했던 김은구 전 KBS 이사가 차기 KBS 사장으로 유력시된다는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김인규 카드'가 권력 내부에서 '킬(kill)'된 후 그 대책 마련을 위한 자리였다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KBS 전현직 임원들은 모두 차기 KBS 사장 후보 물망에 오를 만한 인물들이다. 이동관 대변인의 해명처럼 그 때는 또 KBS 사장 후보 공모가 진행 중이던 때다. 아직 아무도 공모하고 있지 않던 시점이다. 그런데 사장 후보 공모에 응모할 만한 인사들을 줄줄이 불러 모아 놓고 KBS '공영성 회복'과 '방만 경영 해소'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고 했다. 사실상 차기 사장 물망에 오를 유력 후보들을 불러 모아 사전 청문회를 한 셈이다. 아니면 사전에 '교통정리'라도 하려 했던 것일까.
KBS 사장 공모 요식 행위로 만들 건가
그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든 무엇보다 이 모임 자체가 KBS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 실장과 청와대 대변인, 그리고 방통위원장, KBS 이사장이 은밀하게 만나 KBS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협의'하는 자리를 가졌다는 것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KBS 사장은 KBS 이사회가 제청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지난 8월 7일 김재균 민주당 의원이 김인규 전 KBS 이사의 KBS 사장 내정설에 대해 질의하자 "내가 결정하지 않고 있는데 누가 결정하나"라고 당당하게 답변한 적이 있다. KBS 사장 결정권은 사실상 '자기 손'에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 '대책회의'는 그 말이 헛말이 아님을 웅변하고 있다. KBS 이사회가 진행하고 있는 사장 공모 절차가 '요식행위'일 뿐이며, KBS 이사회는 그 들러리밖에 안된다는 것을 이보다 어떻게 더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모임에 참석했던 김은구 전 이사가 KBS 사장 후보 공모에 응모한 것과 관련해 "그 자리에 왔기 때문에 도의적으로 응모하지 않는 게 맞다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실장까지 그 자리에 참석한 것에 대해서는 "편하게 생각한 게 불찰이었다"고 말했다. 김은구 전 KBS 이사는 <경향신문> 기자의 확인 취재 요청에 대해 "얘기할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참으로 제 편한대로다. 이동관 대변인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김은구 전 KBS 이사 같은 경우야말로 <경향신문>의 취재에 당당하게 응했어야 할 일이다.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 자리가 얼마나 '불편한 자리'였는가를 소신있게 밝힐 수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은가. 최소한 KBS 사장을 맡아보겠다는 의사가 있었다고 한다면, 또 정권의 KBS 장악 의도가 KBS 사태의 핵심 쟁점이 되고 있으며, 권력의 간섭과 압력으로부터 앞으로 KBS의 독립성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가가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런 자리에는 처음부터 갈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얘기할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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