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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여 일 만에 아기와 상봉한 융.
10여 일 만에 아기와 상봉한 융. ⓒ 고기복

다양한 사회적 사건이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던 토마스 홈즈와 리차드 라헤는 사회적 사건이 주는 스트레스 정도를 점수화한 바 있는데요. 그들은 스트레스 지수 100점에 해당되는 것으로 배우자의 사별을 꼽았다고 합니다. 배우자와의 사별이 견디기 힘들 만큼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안겨준다는 말일 것입니다. 더더구나 출산을 앞둔 산모일 경우, 그 스트레스는 산모와 아기의 건강을 걱정해야 할 만큼 큰 스트레스로 작용할 게 뻔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남편과 사별한 지 열흘이 지나지 않아 출산하고, 아기에게 젖 한 번 제대로 물려보지 못하고 시댁에서 쫓겨나야 했다면 그 스트레스 지수는 어떨까요? 게다가 그 아기가 산모의 뜻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입양된다는 소식을 들어야 한다면 견딜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산후 우울증이 실어증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베트남 출신 결혼 이주민 융을 통해서였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불행과 출국 강요

 

융은 딱 2년 전인 지난 2006년 8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던 나이에 한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나이차가 많이 나긴 했지만 남편은 성실했고 결혼 1년 후 아이가 생기자 누구보다 기뻐하며 아이의 출산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둘의 행복은 이제 막 시작된 듯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친구 오토바이 뒷좌석에 탔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입니다. 융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곧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복받치는 울음도 꾹꾹 눌러야 했었습니다.

 

융은 남편을 느닷없이 보낸 지 열흘이 지나지 않은 지난 7월 20일 딸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 중에 출산했지만 감사하게도 아이는 건강했습니다. 병원에서 딸아이에게 초유를 먹이며 융은 "아빠는 세상을 떠났지만,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울게"라고 아이에게 몇 번이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융의 그런 다짐과 달리 시댁에서는 융이 퇴원하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요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 생전에는 딴 살림을 살던 형님 댁에서 찾아와서는 "만 달러를 줄 테니, 아기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융은 "아기는 제 아긴데, 왜 아기를 놔두고 베트남으로 가요? 제가 잘 키울 거예요"라고 했습닏. 하지만 시댁에서는 "남편이 있어야 비자를 연기할 수 있는데, 남편이 없으니 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베트남에 가야 한다"며 8월 14일에 귀국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고 통보했답니다.

 

친부모 허락 없이 아이를 입양시켰다?

 

시댁에서 말한 출국 시한을 사흘 앞두고 융은 외부에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바로 용인이주여성쉼터였습니다. 하지만 쉼터를 찾은 융은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심신의 안정을 찾은 융의 사연을 들고, 쉼터에서 융의 시댁에 전화를 하자,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입니까?

 

"애기는 입양했으니 연락하지 마세요."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기의 큰엄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쉼터에서는 "입양은 친부모가 동의해야 하는데, 임의로 입양이 이뤄졌다면 곧바로 형사고발할 테니까, 빨리 아이를 엄마에게 돌려주세요"라고 경고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 경찰에 연락을 하고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시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애기 데려가세요. 평촌역 앞 K모 변호사 사무실로 오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입양했다는 아기를 데려가라는 소식에 안심이 되긴 했지만, 아기를 돌려주면서 왜 변호사 사무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난 아기의 큰 엄마는 "아기를 데려가려면 합의서를 쓰고 공증을 받으라"면서 문서를 들이밀었습니다. 합의서라는 문서를 보고나서야, 융 시댁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 건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합의서에는 남편 사망 보상금과 남편의 통장 잔고 등의 상속 문제, 아기의 양육권 등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 시댁에서 관여할 내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큰엄마라는 사람은 코앞에 아기를 두고 눈물을 흘리며 안아보려는 융에게 차가운 눈길로 애를 데려가려면 합의서에 먼저 날인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아기를 가지고 흥정하는 것도 아니고, 애끊는 모정을 이용하여 합의서 날인을 강요하는 모습은 아기와는 관련 없는 사람마저 피를 끊게 하였습니다. 

 

"아기를 돌려받고 싶으면, 무조건 합의서에 사인해라?"

 

합의서는 아기 큰엄마가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닌, 변호사 사무실에서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변호사를 고용해서 그런지 몰라도 큰엄마라는 사람은 융이 고분고분하게 합의서에 날인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을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아기 큰엄마와 K 변호사의 어이없는 주문에 친구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어진 변호사 대 변호사간의 대화 중에, K 변호사가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있었는지 "곤란한 질문은 삼가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친구가 "변호사님, 지금 쓰라고 하시는 합의서가 법리적으로 타당합니까? 이 분이 한국 사람이면 그런 말 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K 변호사는 시댁 측에서 요구하는 합의서 작성이 도덕적으로나 법리적으로 옳지 않음을 뻔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융의 시댁 측에서 아기를 직접 키울 생각이 전혀 없음과 다른 뜻이 있어서 융을 쫓아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 만한데도, 시댁 측 입장을 꾸준히 설파하더군요.

 

처음 K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K 변호사는 아기 양육권 문제를 놓고 재판까지 한다면 재판 기간 동안 산모가 아기를 데려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은근슬쩍 말했습니다. '머리 아프게 재판할 것 없이 이 정도에서 그만 떨어지는 것이 어떠냐'는 투였습니다.

 

시댁 측에서는 아기를 키울 의사도 없는데, 양육권 소송 운운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협박이나 진배없었지만, 아기를 한시라도 빨리 안고 싶어 하는 융 앞에서 괜한 말싸움이 될 것 같아 일단 참고 넘어갔습니다.

 

10여 일만에 다시 엄마 품에 안긴 아이

 

변호사는 말로는 아기의 미래를 위해 하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아기의 미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상속권을 강탈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 시댁 식구들과 한통속이 됐을 뿐입니다. 그는 한 아기의 인생에서 엄마와 할아버지, 할머니를 빼앗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한 치의 양심의 가책도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도도하던 K 변호사는 전화 통화 이후 한 풀 죽더니, "아기를 애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잘' 키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라며, 합의서 작성에 대해 한 발 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시댁 측에서도 융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가 변호사를 통해 대응하자 일이 커질 것을 우려했는지, K 변호사가 설득했는지 모르지만, 몇 시간의 설전 끝에 합의서 작성을 포기하고 아기를 돌려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0여 일 만에 엄마 품에 안긴 아기의 표정은 안온해 보였고, 눈시울이 붉어진 융은 여전히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고기복 기자는 용인이주노동자쉼터 대표입니다.


#결혼이주민#변호사#산모#양육권#상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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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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