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습 얄궂다고 비아냥거리지 마라 너는 못 생긴 게 맛이 좋다는 CF도 보지 못했느냐갈바람 시청 앞 촛불로 깜빡이는 저물녘전경들 휘두르는 곤봉에 맞아 하늘마저 우는 밤막걸리 한 모금 마신 뒤 입술로 날 안아보라 바삭바삭 부서지며 스르르 휘감기는 내 몸 고소하고 달착지근하게 하나가 되는 네 혀나는 청와대에서 홍보용으로 시식하는 미친 쇠고기가 아니라 나폴리 장사치들이 먹었던 물컹한 피자가 아니라 대한민국 피눈물 꼭꼭 다져넣은 부침개이니라-이소리, '부침개' 모두 선선한 가을바람이 이마와 목덜미를 스칠 때면 광장시장으로 가자.
이명박 정부가 낳은 3중고, '고유가·고물가·고금리'로 시름에 젖어들 때, 무언가 배불리 먹고싶은데 주머니가 짤랑거릴 때 광장시장으로 가자. 이 세상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핑핑 잘 돌아가는데 나만 홀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생각이 들 때 광장시장으로 가자.
가을바람 애인처럼 옆구리에 끼고 지하철 1호선 동대문행을 타고 가다 종로5가 8번 출구로 나서면 거기 민초들이 아웅다웅 살갑게 살아가는 세상이 보인다.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가 바삭바삭 부서지며 고소하게 혀를 까무러치게 하는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 마셔보자. 온갖 시름이 '걸음아 날 살려라' 혀빼물고 내빼리라.
'대한민국 피자' 부침개과 '대한민국 와인' 막걸리. 돈 걱정 별로 하지 않고 즐겨먹는 음식 중 이보다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 또 있을까.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들선들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막걸리 한 잔에 갓 부쳐낸 부침개가 그리운 계절이 돌아왔다.
부침개는 예로부터 신분·직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즐기는 우리나라 특산품이다. 우리나라 전통음식은 예로부터 튀기거나 볶는 음식이 드물고 부치거나 삶는 음식이 많았다. 이는 기름이 귀했기 때문이다.
그 중 부침개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우리 고유의 음식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피자를 더 좋아하지만 어른들은 대부분 피자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고소하면서도 깔끔한 부침개에 비해 피자는 느끼하기 때문이다.
300원짜리 부침개 먹고 호박전·고구마전 덤으로 먹던 시절 1987년 이맘 때였을까. 길라잡이(나)는 문학운동단체 총무간사를 맡고 있었다. 그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집회에 참석해야 하는 것은 물론 문화6단체 회의, 연행 구속 문인 성명서 발표, 철야농성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식사도 하루 점심 한 끼 먹으면 잘 먹었다고 여겨야 할 때였다.
까닭에 늘상 배가 고팠다. 나이 또한 한창 새파란 20대 후반에다 여기저기 열심히 뛰어다니다보니 세 끼를 꼬박 챙겨 먹어도 허기가 질 때였다. 하지만 너무 얇았다. 운동단체 일이란 게 일종의 노력봉사를 담보로 하는 것이어서 월급이 아주 적었다. 아니, 월급이 아니라 활동비라고 보는 게 더 맞는 말이다.
그 때 자주 찾은 곳이 아현시장 부침개 골목이었다. 그 부침개집은 칠순 할머니가 파전·부추전·감자전·호박전 등을 즉석에서 부쳐 막걸리와 함께 팔고 있었다. 길라잡이는 저녁 무렵 배가 슬슬 고파오기 시작하면 그 부침개집에 가서 300원짜리 부침개 3장에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켜 먹었다. 그렇게 막걸리 한 주전자에 고소하면서도 감칠 맛 깊은 부침개 몇 장 먹고 나면 배가 든든했다.
이마에 굵은 주름이 부추전을 닮았던 그 할머니는 인심도 참 좋았다. 부침개를 다 먹어갈 때 즈음이면 호박전과 고구마전 등을 덤으로 접시에 수북이 얹어주었다. "총각이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막걸리 한 주전자와 부침개 세 장을 눈 깜빡할 새 다 먹느냐"라며.
앉는 순간 부침개에게 사로잡힌 포로가 된다서울에서 부침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광장시장이다. 그렇다고 광장시장에 부침개만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 시장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곤' 다 있다. 값도 싸고, 품질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거지가 돈 5만원 들고 광장시장을 한 바퀴 휘이 둘러나오면 번지르르한 신사가 된다는 말까지 떠돌겠는가.
1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광장시장(1904~). 1904년 고종 41년 '을사조약' 뒤 남대문시장 경영권을 장악한 일제에 맞서 김종한 외 3명이 각각 현금 10만 원을 내 만들었다는, 민족 자주경제가 움튼 광장시장. 지금은 서울을 찾는 수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반드시 한 번쯤 들러 간다는, 국제적으로도 이름 높은 광장시장.
그 광장시장에 들어서서 왼편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왁자지껄 몰려 앉아 마치 잔칫집 분위기가 나는 곳이 있다. 이곳이 빈대떡·파전·부추전·호박전·고구마전·두부전·고기전·고추튀김 등이 수북이 쌓여있는, 광장시장이 자랑하는 부침개 골목이다.
그 중 가장 눈에 띠는 집이 커다란 쟁반 크기의 빈대떡을 구워내는 집 맞은편에 자리잡은 부침개집이다. 한 평을 넘을락 말락 할까. 이 부침개집 길고 좁은 간이의자에 앉으면 금세 고소한 내음을 풍기는 부침개와 튀김에게 사로잡힌 포로가 된다.
전북 부안이 고향이라는 육십 대 중반 남짓한 이 집 할머니는 "요새는 손님이 많이 줄었어"라며 한숨을 포옥 내쉰다. 그냥 '부안댁'이라고 불러달라는 할머니의 짤막한 말 한 마디가 몹시 서글프게 다가와 가슴을 툭 친다.
주문 안 해도 부침개에 막걸리 척척척"이 정부 들어 다들 먹고 살기 힘든가 봐. 이렇게 값싼 부침개조차도 마음 놓고 사먹을 형편이 못되는 것 같으니…. 식기 전에 어여 먹어. 우리집은 모든 재료를 국산만 써. 그랑게 걱정 말고 많이들 먹어. 부침개는 금방 부쳐냈을 때가 파삭파삭 씹히는 게 가장 맛이 좋아. 막걸리도 마셔야지? 부침개는 뭐니뭐니 해도 막걸리가 찰떡궁합이지."이 집 특징은 부추전·파전·녹두전·감자전·고구마전·두부전·고기전·고추튀김 등 여러 가지 부침개(1접시 1만원)를 섞어 접시에 푸짐하게 담아내는 할머니 큰손이다. 그리고 손님이 부침개를 따로 시킬 때만 빼놓고, 그저 자리에 앉기만 하면 묻지도 않고 막걸리 한 주전자와 함께 부침개 한 접시를 낸다.
8월 초, 맛객 김용철과 같이 간 날도 그랬다. 그날 저녁 6시께 맛객과 함께 그 부침개집에 들렀을 때에도 할머니는 묻지도 않고 부침개 여러 가지를 그 자리에서 지글지글 부쳐 쟁반 가득 내놓았다. 물론 막걸리 한 주전자도 빠뜨리지 않았다. "더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 해"라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맛객과 막걸리 잔을 부딪친다.
시원한 막걸리 한 잔 꿀꺽꿀꺽 비운 뒤 부추전을 입에 물자 향긋한 부추향과 함께 바삭바삭 부서지는 고소한 감칠맛이 혀를 까무러치게 한다. 막걸리 한 잔 더 먹고 노릇노릇한 고구마전을 입에 물자 고소한 기름향과 함께 군밤처럼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맛이 혀를 또 한 번 까무러치게 만든다. 막걸리 한 잔 더 쭈욱 들이킨 뒤 길쭉한 고추튀김을 입에 물자 매콤하면서도 향긋한 고추 맛이 혀를 세 번 까무러치게 만든다.
부드러우면서도 깔끔한 맛이 나는 감자전, 홍합·굴·쇠고기 위에 어슷어슷 썬 붉은 고추가 꽃처럼 피어난 파전, 노릇노릇 구워낸 두부전 등을 깨소금 뿌린 간장에 찍어먹는 맛도 별미 중 별미다.
현장의 맛을 노트북에 담는다그렇게 막걸리 한 주전자와 부침개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나자 배가 든든해진다. 그때 할머니가 빈 접시에 마악 부치고 있던 부침개를 덤으로 푸짐하게 얹어준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더 시킨 뒤 맛객의 빈 잔에 마악 부어주려는데, 맛객이 노트북을 꺼낸다. "현장에서 기사를 쓰려구요?" 하자 "현장의 맛을 노트북에 담아야죠"라며 빙그시 웃는다.
그즈음 일본 여성 둘 옆자리에 앉는다. 할머니가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고 있는 부침개를 손짓하자 둘 다 고개를 끄덕한다. 맛객이 말을 붙인다. 일본 여성들은 까르르 웃으며 뭐라뭐라 쫑알댄다. 맛객이 "한국에 오면 이 곳에 꼭 들러보고 싶었다고 그러네요, 한국 부침개가 참 고소하고 맛있다고 그래요"라고 번역한다.
맛객의 일본어 솜씨 또한 최고다. 맛객 김용철씨는 "부침개가 생각날 때마다 이 집을 찾는다"고 말한다. 맛객은 "이 집 부침개의 참맛은 아무리 먹어도 느끼하거나 물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며 "전국 부침개를 다 먹어 보았지만 이 집처럼 깊은 감칠맛이 나는 집은 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요즈음 '외국산 부침개' 피자에 밀려 우리 부침개가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피자보다 우리 부침개가 입에 더 잘 맞는다고 한다. 왜일까. 이는 외국 것만 사족을 못 쓰는 일부 사람들의 선입견 때문은 아닐까. 그래. 갈바람 부는 오늘 저녁은 우리 고유의 전통음식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