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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대학 등록금을 내기 위해 은행에 갔다. 오늘(26일)이 등록 마감일인데 이제서야 내러 간 거다. 나는 늘 이렇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끝에 가서야 바쁘게 몰아친다.

이번 등록금만 해도 그렇다. 등록금 내야할 때가 언젠지 딸애에게 알아보라고 했더니, 역시 나를 닮았는지 미적대다가 느지막히 알려주는 거였다. 등록 마감일을 며칠 안 남겨놓고.

남편은 또 걱정 아닌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등록금이 근 500만원에 육박하니, 아닌 게 아니라 걱정이 되기는 된다. 하지만 난 믿는 게 있었다. 지난 봄에 이번 등록금을 위해 적금을 하나 들었는데 그게 아마도 어림잡아 근 300만원 이상 들어있을 것 같았다.

또 남편이 봉급을 받은 지도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그 정도 돈은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걱정도 없이 차일피일 미루며 오늘까지 온 거다.

대학 등록금 내러 가다가 문득...

 지난 3월 등록금 인하 및 상한제 실현을 위한 '전국대학생 행동의 날' 행사가 열렸다.
 지난 3월 등록금 인하 및 상한제 실현을 위한 '전국대학생 행동의 날' 행사가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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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애의 등록금을 내러 은행에 가다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벌써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일인데 문득 생각이 났다.

몇년 전 2월의 어느 날 다 늦은 저녁때 언니가 전화를 했다. 마당에서 쓰레기 더미를 치우던 나는 흙 묻은 장갑을 벗고 전화를 받았다. 언니는 내 안부를 묻고는 어렵게 입을 뗐다.

"내가 니한테는 아쉬운 소리 안 할라 그랬는데…. 우리 성호 등록 마감일이 내일까진데…. 아직 돈을 몬 구했다. 니, 돈 좀 어떻게 안 되겠나?"

그 때 언니는 무척 어려운 처지였다. 벌써 여러 해째 언니는 살얼음판을 기면서 살고 있었다.

농협의 부장으로 근무하던 형부는 성취 욕구가 좀 강했다. 월급 받아 사는 게 마음에 안 찼는지 돈 벌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의 돈을 끌어서 주유소를 차렸다. 하지만 자기 돈으로 시작하지 않은 사업이라 그랬는지 늘 이자 끄기에 바빴다. 그렇게 몇 년 지나자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나중에는 빚잔치를 하기에 이르렀다.

언제부턴가 언니와 형부는 명절이 되어도 집에 오지 않았다. 형부가 친정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이름으로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았는데, 그걸 갚지 못하니 처가에도 드나들지 못하게 된 거였다. 누가 뭐라 말하지 않았지만 언니와 형부는 우리 집에 드나들 염치가 없어서 못 오게 된 거였다.

명절 때나 아버지 생신 때 친정집에 가면서 언니네 주유소에 들르곤 했다. 언니는 내가 오는 길목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언니는 반가움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워낙 쫓기면서 살다보니 마음이 졸아들었는지, 언니는 반가워도 반갑단 말을 하지 못했다.

언니가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눈을 보면 다 알 수 있었다. 쫓기는 짐승의 눈처럼 불안해 보였다. 총을 맞고 신음하는 짐승처럼 언니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언니는 죽을 힘을 다해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서 겪는 지옥 중에 돈으로 당하는 지옥이 가장 지독할지도 모르겠다. 늘 돈에 쫓기고 빚쟁이들의 독촉 전화에 쫓기는 언니…. 언니는 살아서 지옥을 경험하고 있었다.

빚에 쫓기면서도 돈 이야기 않던 언니가...

그렇게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언니는 나에게만은 돈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내게는 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건 나에 대한 언니의 애정이었고 의리였다.

언니는 그랬다. "내가 마지막까지 가서 더이상 갈 데가 없어지면 그 때 너한테 가겠다"고 그랬다. 언니는 피난처로 나를 남겨놓고 싶었던 거다. 그보다는 나한테만은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했을 거 같다.

 언니는 빚쟁이에게 쫓기며 생지옥을 살았다. 사진은 지난 2007년 1월, 거리에 붙은 대출광고 전단들.
 언니는 빚쟁이에게 쫓기며 생지옥을 살았다. 사진은 지난 2007년 1월, 거리에 붙은 대출광고 전단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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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가 잘 나갈 때는 주변에 사람이 많았는데, 형편이 어려워지자 사람 발길이 차츰 끊어졌다. 누구 하나 언니네 돈을 빌려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언니는 돈을 구하다 구하다 안 되자 내게 전화를 한 거였다. 등록 마감일을 하루 남긴 그 날 저녁에 내게 전화를 한 거다.

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스러움, 그리고 동생에 대한 미안한 마음 등이 뒤섞여서 언니는 속으로 울었으리라.

전화를 받은 그 날은 이미 늦어서 은행 일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날 은행 문이 열리자마자 돈을 보냈다. 마침 수중에는 여분의 돈이 조금 있었다. 그리고 모자라는 돈은 현금 서비스를 받아서 메웠다.

언니는 형편이 나아지면 돈을 돌려주마고 했지만 나는 돈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돈은 내 돈이 아니고 언니 돈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래도 약간의 여유가 있어서 등록금을 내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생각했다.

언니, 이제 울어도 돼

지금도 언니는 여전히 힘들게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돈에 쫓기지는 않는다. 비록 가진 건 없지만 빚쟁이들에게 쫓기지 않으니 그만해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가진 것 모두를 잃고 미래도 잃고 희망까지도 저당잡혔던, 그 길고 힘들었던 날들을 언니는 잘 견뎌냈다. "죽고 싶었던 때도 많았지만 죽을 수도 없었다"던 언니. 오로지 아이들을 바라보며 견디고 또 견딘 세월이었다.

앞으로도 언니는 편하게 살지 못하리라. 늘 몸을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식구들 모두 건강하고 서로 마음 맞춰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잘 살 날도 있을 것이다.

언니, 이제는 내놓고 울어도 돼. 웃을 일이 있으면 환하게 웃어도 되고 힘든 일이 있으면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돼. 친정 식구들이 가슴 아파할까 봐 속으로만 울었던 언니. 아버지 뵙기가 미안해서 집에도 못 왔던 언니.

언니, 건강하기만 하면 좋은 날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언니, 꼭 건강해야 해.

 지난해 9월 '신용불량자와의 타운미팅'에서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이 인사를 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신용불량자와의 타운미팅'에서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이 인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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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등록금#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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