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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고종 13년(1876년)에 서(徐)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입도하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이전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잠시 군인들이 머물렀던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비양포구 섬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주민들은 이 포구를 기반으로 삶을 지탱한다.
비양포구섬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주민들은 이 포구를 기반으로 삶을 지탱한다. ⓒ 장태욱

해방 전후로 이 섬에는 80여 가구에 주민 3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50여 가구에 11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할 때부터 이 섬은 농사를 지을 땅이 부족해서 주민들 대부분은 바다에 의지해서 삶을 지탱했다. 현재 이 섬 주민들의 주 수입원은 어업과 민박이다.

비양도에 들어가기 위해 비양호에 승선했는데, 배안에서 초등생으로 보이는 어린이를 만났다. 이름은 '권우'라고 했으며 현재 비양분교 4학년에 다닌다고 했다. 권우는 배의 선장과는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권우를 통해 비양분교에 대해 정보를 얻고 싶었는데,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발동했는지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비양포구 어선 한 척에 벽돌을 싣고 포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선은 섬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하다.
비양포구어선 한 척에 벽돌을 싣고 포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선은 섬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도 하다. ⓒ 장태욱

비양포구에 도착했다. 비양호 계류장 바로 앞에서 어린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 마을 아이들이냐고 물었더니, 다른 곳에서 놀러왔다고 답했다. 포구에 벽돌을 실은 어선이 계류장 근처로 들어왔다. 주민들은 어선을 교통수단으로도 활용하고 있었다.

포구 입구에는 방문객들을 위해 넓은 규모의 새 휴게실이 지어져 있었다. 휴게실 2층은 전망대를 겸하고 있었는데, 아직 공사 마무리가 다 안 되었는지 이용할 수 없었다. 휴게실 바로 서쪽에는 이 섬의 유일한 의료시설인 비양도 보건 진료소가 있었다.

새로 지어진 비양도 휴게실 바로 앞에는 같은 내용이 적힌 공덕비 2기가 세워져 있다. 이 섬 주민들의 생활난을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허승룡 제주해군경비대사령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기존에 세워진 비석이 손상되어 1998년에 새로 세운 것이라고 적혀있다.

허승룡 사령관은 제주경비대사령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이 마을 주민들과 결연을 맺고 무료 진찰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965년 북제주군 당국과 협조하여 비양도와 협재리 간 해저 상수도를 건설하여 주민들로 하여금 제주도 본섬으로부터 날마다 깨끗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게 했다. 비로소 100년 간 이 섬 주민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생활용수 공급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파종 섬 아주머니가 텃밭에 가을 감자를 파종하는 모습이다.
파종섬 아주머니가 텃밭에 가을 감자를 파종하는 모습이다. ⓒ 장태욱

비양도는 온통 바다다. 어디에서도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푸른 바다가 눈에서 떠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봉숭아꽃이 심겨진 길모퉁이 화단도 소라 껍질과 전복 껍질로 장식되어 있어서 마치 해저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주변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가운데 봉우리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이 섬에서도 농사는 이루어지고 있다. 마치 도시인들이 마당에 텃밭을 일구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작은 규모로 집집마다 밭을 일구고 있었다. 주민들은 그 텃밭에 고구마, 콩, 참깨 등 비교적 해변에 잘 적응하는 작물을 가꾸고 있었다. 돌담길을 지나다가 10여 평 남짓한 텃밭에서 일을 하시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이 텃밭 절반 면적에는 고구마가 자라고 있었는데, 나머지 절반에 가을감자를 파종하고 계셨다.

"아주머니가 이 동네에서 가장 큰 농사를 지으시네요."

다른 곳에서 10여 평 텃밭을 가리켜 '큰 농사'라 하면 놀리는 말로 들리겠지만, 이 밭이 이 섬에서 내가 본 텃밭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요 안에 들어가면 우리보다 더 크게 농사하는 집도 있어. 우리는 이 동네서 두 번째라니까."

해녀 비양도 서쪽 해변에서 물질하는 해녀의 모습이다.
해녀비양도 서쪽 해변에서 물질하는 해녀의 모습이다. ⓒ 장태욱

이 농사가 이 집 가족에게 며칠의 식량을 공급하게 될지 모르지만 이 조그만 농사를 위해서 주민들은 거름도 준비하고 벌레도 잡을 것이다. 지금 시장에서 국내 농산물이 헐값에 거래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보면 주민들의 수고를 섬 밖의 사람들이 이해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 섬 어느 구석에도 농사를 짓지 않고 방치된 땅은 없었다. 예로부터 농토가 부족했기에 땅의 소중함을 다른 곳에서 보다 훨씬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섬을 둘러보는데, 해녀 한 분이 뭍에서 가까운 곳에서 '물질'을 하고 계셨다. 어릴 적 우리 동네 바닷가에서 자주 들었던 숨비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채취한 해산물을 보관하는 그물자루를 '망태'라고 한다. 태왁에 매달린 망태가 물속에 잠겨 있어서 해산물을 얼마나 잡았는지 볼 수는 없었다.

해산물 해녀 한 분이 손수 채취한 해산물을 마당에서 분류하는 모습이다. 고동과 소라가 대부분인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그 양이 많았다.
해산물해녀 한 분이 손수 채취한 해산물을 마당에서 분류하는 모습이다. 고동과 소라가 대부분인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그 양이 많았다. ⓒ 장태욱

그런데 그 궁금증은 다른 곳에서 해소되었다. 비양봉 산책로 입구에 들어섰는데, 해녀 할머니가 마당에서 그날 채취한 해산물을 종류와 크기별로 구분하고 계셨다. 소라와 고동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그 양이 훨씬 많았다. 이 섬 주변 바다에 아직도 수산물이 풍부하게 서식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양포구 인근에서 슈퍼마켓과 민박을 겸하고 있는 김영배씨를 만났다. 이 섬에 온 대부분 방문객들이 김씨가 운영하는 가게를 들렀다 가기 때문에 여행객들 사이에서 그는 '비양도 도지사'로 통한다. 비양도 도지사라는 애칭에 걸맞게 김씨는 과거에 비양리 이장을 지내기도 했고, 비양분교의 학부모회장을 10년간이나 역임했다. 김씨가 학부모회장직에 '장기집권'하게 된 사연도 흥미롭다.

김영배씨 비양도 포구 앞에서 수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 이장과 비양분교 학부모회장을 역임했다.
김영배씨비양도 포구 앞에서 수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 이장과 비양분교 학부모회장을 역임했다. ⓒ 장태욱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아이들이 한 학년에 1, 2명밖에 안 되는 비양리의 환경 하에서는 자녀들의 학업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이 분교에 입학시키지 않고 친척들이 살고 있는 다른 마을에 소재한 학교에 입학시킵니다.

저는 이 비양리에 분교가 꼭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 셋을 모두 비양분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재학생이 우리 아이들 셋 밖에 없게 된 겁니다. 큰 아이가 입학하면서 시작된 학부모회장을 작은아이가 졸업할 때가지 맡았습니다."

비양분교 재학생이 한 명인 학교다.
비양분교재학생이 한 명인 학교다. ⓒ 장태욱

김씨의 말에 의하면 지금 이 학교에는 재학생이 한 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나와 비양호에 동승해서 섬으로 들어왔던 권우라는 아이가 이 학교의 유일한 재학생이었던 것이다. 김씨는 권우가 졸업하면 학교가 폐교될지도 모른다며 우려했다.

권우 비양도에 들어가는 도중 도항선에서 우연히 만났다. 비양분교에 등록된 유일한 어린이다.
권우비양도에 들어가는 도중 도항선에서 우연히 만났다. 비양분교에 등록된 유일한 어린이다. ⓒ 장태욱

이 마을의 지난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윤만선(74) 할아버지를 만났다. 윤 할아버지는 전에 마을 노인회장을 역임하시기도 했다. 연세에 비해 건강해 보이시는 윤 할아버지는 마을회관 앞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계셨다. 어선을 운영하는 아들을 돕는 일이라고 하셨다.

윤만선 할아버지 이 마을 노인회장을 역임하셨다. 이 섬에 대해 많은 증언을 들려주셨다.
윤만선 할아버지이 마을 노인회장을 역임하셨다. 이 섬에 대해 많은 증언을 들려주셨다. ⓒ 장태욱

이 섬에 농토가 부족했을 텐데 과거에 곡식이 부족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다.

"비양도는 땅이 비옥해서 농사는 잘 되는 편이야. 그런데 땅이 원채 부족해서 이곳에서 농사짓는 곡식으로는 3개월을 버티기 어려웠지. 이 섬에 많이 나는 것이 물고기, 소라, 전복인데 옛날에는 그것들을 팔아서 돈을 만들 판로가 없었어. 배고프면 해산물을 '금악'이나 '명월' 같은 산간 마을로 가지고 가서 곡식과 바꿔왔던 거지."

윤 할아버지는 11살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기 이전에 이 섬에는 일본군 소대가 비양봉 중턱에 반공호를 파고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군이 이 섬에 주둔하는 것을 알아차린 미군 폭격기가 자주 이 섬 상공을 비행하면서 폭격을 가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일본군대로 굴을 팠고,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살기위해 굴을 팠지. 집집마다 가족단위로 굴을 팠어. 주민들은 자기들이 판 굴 안에 식량, 이불, 옷을 감춰뒀어. 우리 가족이 판 굴은 섬의 서쪽에 있었는데, 삼촌과 고모까지 모두 숨을 수 정도로 꽤 컸어.

그런데 어느 날 미군 전투기가 폭격을 가해 오는 거야. 난 누나와 함께 몸을 숨기기 위해 우리 굴이 있는 곳으로 뛰었어. 그런데 나와 누나가 굴 입구에 이르기 전에 전투기가 바로 내 머리위에서 떠 있는 거야. '이제 죽는구나'하고 생각했지. 그런데 기관총을 난사하는 소리는 들려도 총알이 우리 쪽으로는 떨어지지는 않더라고. 폭격기 조종사는 (우리가) 불쌍했던지 차마 총을 쏘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우리 머리 위에 있던 그 폭격기가 갑자기 동쪽으로 날아가더니 한림항을 폭격했어. 순간 큰 소리가 나더니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오르는데, 정말 무섭더구먼."

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이라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미군 폭격기가 한림항을 공습한 날은 1945년 7월 6일이다. 당시 한림항에는 탄약저장고가 있었는데, 이날 폭격으로 탄약저장고와 함께 인근 민가 40호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자칫하면 이 날이 윤 할아버지 제삿날이 될 뻔했다.

당시 2차 대전에서 일본군과 독일군의 패망이 거의 확실해지고, 미군의 일본 본토에 대한 점령이 확실해질 즈음 일본군은 최후의 결전지로 제주를 선택했다. 제주도 전역을 군사기지로 만들고 관동군 제111사단을 비롯한 병력을 제주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일본의 의중을 알아차린 미군은 제주도에 배치된 일본군에게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해서 공격을 가했다.

한림항 폭격이 가하지기 이전인 1945년 4월 14일 미군은 잠수함을 동원하여 일본군 군함과 수송선을 폭격했다. 당시 중국 본토 작전을 지휘하던 일본군 수송선 수산환(壽山丸)과 삼택환(三宅丸), 해방함(海防艦) 31호, 해능미(海能美) 등의 군함이 병력을 수송하던 도중 제주 근해에서 미군 잠수함 '데이트란트'호에게 포착되었다. 일본 해군함정들은 미군의 공격을 피해 비양도와 한림항 사이로 대피하였지만 미군 폭격기와 잠수함 어뢰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당시 폭격을 받은 일본 군함의 파편이 비양봉 정상에 떨어질 정도로 충격이 강했지. 죽은 일본군 시신들이 죽은 생선처럼 물 위에 떠다녔고…, 일본이 항복하기 전이라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시신을 수습하라고 했어. 어민들이 배를 타고 다니면서 시신을 건져냈는데, 이 시신들을 땅을 파서 매장하거나 화장을 시켰어.

그런데 당시 일본 수송선에 타고 있던 시신들은 대부분 물 밖에 떠다녔는데, 군함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서 배 안에 갇힌 시신이 많았던 것 같아. 해방이 되었을 즈음에 옹포리에 사는 어느 어민이 좌초된 군함을 뜯어서 고물로 팔 마음을 품고 군함에 접근한 다음 배의 수밀문을 열었는데, 안에 갇혔던 시신들이 수압에 의해 한꺼번에 위로 쏟아져 나온 거야. 고철을 뜯으러 갔던 그 옹포리 주민은 흉한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지 이듬해 병을 얻어서 죽었다고 해."

해방이 되고 4·3의 광풍이 제주를 휩쓸었지만 비양도는 4·3의 회오리를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마을에 좌익 사상을 가진 인사가 없었고, 외부와 고립되어 있어서 당국에게 의심받을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출어 저녁에 만조가 찾아오자 어선 한척이 포구를 떠나는 모습이다.
출어저녁에 만조가 찾아오자 어선 한척이 포구를 떠나는 모습이다. ⓒ 장태욱

비양포구 앞에는 유명 연예인이 출연한 드라마 <봄날>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상징물이 건립되어 있다. 그 드라마를 본 적이 없지만 비양도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훌륭한 배경이 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겉으론 한없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 섬에 사는 주민들 가슴 속엔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의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고통을 몸소 체험한 세대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료를 수집하고 이들의 상처를 위로할 만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저녁이 되어 섬 주변에 어둠이 짙게 내리자 달그림자가 포구를 가득 메웠다. 마침 보름이라 달은 둥글고 포구에 평소보다 더 많은 물을 들어왔고 이를 기다렸다는 듯 배한 척이 비양 포구를 출항하고 있었다. 이 배는 또 어디에선가 비양도 주민들 삶의 자취에 한 줄을 더 보탤 것이다.

주변이 온통 조용했다.


#비양도 주민#비양분교#비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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