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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레, 한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는 것도 서럽고 아픈 역사인데, 어찌 이 아무 죄 없는 어린 아이를 죽였을까?
▲ 거창사건 추모공원 빗돌 한 겨레, 한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는 것도 서럽고 아픈 역사인데, 어찌 이 아무 죄 없는 어린 아이를 죽였을까?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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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살 어린 소녀가
할머니 등에 업혀
언니와 같이 국군의
총에 맞아 숨져
여기에 묻히다

- 동생 종환

해발 450m, 끈끈한 밤티재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 경남 거창군 신원면까지 갑니다. 10km 남짓 되는 길을 땡볕과 싸우며 밟아갑니다. 양지 삼거리를 지나 과정 삼거리에 닿았을 즈음, 드디어 신원면이 보입니다. 아주 작은 산골마을,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안에 여느 시골마을과 다를 바 없는 소박한 곳이지만, 이 깊은 마을에 그토록 아프고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니.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이곳엔 지난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아무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이 국군의 총칼에 집단으로 죽임을 당해 무려 719명의 넋이 잠든 곳이랍니다. 한국전은 그 시작부터 같은 나라, 한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싸운 전쟁이었지만, 우리 국군이 여러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니, 어찌 이렇게 놀라운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것도 아무런 죄도 없고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착하기 그지없는 산골마을 사람들을….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551번지. 지난 1951년 2월9일부터 2월11일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어요. 아무 죄 없이 순박하게 살아오던 산골마을 사람들이 우리 국군의 총칼에 끔찍하게 죽었어요. 이곳은 1996년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을 한 뒤에 2004년에 준공된 추모공원입니다.무려 719명의 넋을 기리는 곳이랍니다.
▲ 거창사건추모공원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551번지. 지난 1951년 2월9일부터 2월11일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어요. 아무 죄 없이 순박하게 살아오던 산골마을 사람들이 우리 국군의 총칼에 끔찍하게 죽었어요. 이곳은 1996년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을 한 뒤에 2004년에 준공된 추모공원입니다.무려 719명의 넋을 기리는 곳이랍니다.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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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불태우고, 마구잡이로 죽이고, 또 확인사살까지

이런 슬픈 역사는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추모공원을 돌아보는 내내 가슴을 억누르는 슬픔때문에 참으로 아팠어요.
▲ 위령탑 곁에 있는 조각상 이런 슬픈 역사는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추모공원을 돌아보는 내내 가슴을 억누르는 슬픔때문에 참으로 아팠어요.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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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초등학교 앞에서 냉면으로 점심을 먹고 '거창사건추모공원'으로 들어갔어요. 한나절 동안 뙤약볕에 시달려 얼굴과 맨살을 드러낸 다리는 벌겋게 달아올랐어요. 공원 변소에서 낯을 씻고 찬 물수건을 목에 걸어도 좀처럼 열기가 식지 않더군요.

추모공원 역사교육관에서 짤막하게 소개하는 영상자료를 보면서, 한낮 뜨거운 뙤약볕보다 더한 뜨거움이 가슴 저 밑바닥부터 치솟아 올랐어요. 참을 수 없는 슬픔과 화가 밀려와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답니다.

신원면은 매봉산, 바랑산, 감악산, 월여산….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에요. 6·25전쟁이 한창인 1951년 2월 5일, 육군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에 들어왔어요. 때마침 설날을 앞두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제사 때 쓸 음식까지 내주며 국군을 대접했지요. 또 마을 남정네들은 손수 군수품을 옮기는 데에도 힘껏 도왔답니다.

그렇게 대접을 잘 받고 돌아갔던 군인들이 나흘 뒤인 9일, 다시 돌아와 느닷없이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모조리 마을 앞 논과들로 끌어내어 전투용 기관총으로 무참하게 쏴 죽였어요. 그야말로 '학살'이었지요. 눈 깜짝할 사이에 하얀 눈밭이 온통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끔찍하게 죽인 것도 모자라서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어요. 같은 민족을, 그것도 아무 죄 없는 순박한 시골사람을 그렇게 죽이다니, 이건 국군이 아니라 짐승이나 다름없었어요.

이 청연마을에서 살아남은 이, 남자 1명과 여자 5명을 빼고 무려 84명을 죽였어요. 마을 사람 가운데에는 청·장년 뿐만 아니라 어린이도 있었고 노인들도 있었어요. 이도저도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죽였던 거였어요. 그러나 이 미친 듯한 3대대 병력의 학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어요.

참으로 부끄럽지만, 우리 국군의 총에 맞아 숨진 이들이에요. 청연마을, 탄량골, 박산골 골짜기에서 아무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몰아넣고 죽였어요.
▲ 집단 학살 참으로 부끄럽지만, 우리 국군의 총에 맞아 숨진 이들이에요. 청연마을, 탄량골, 박산골 골짜기에서 아무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몰아넣고 죽였어요.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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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골, 탄량골에 이어 박산골에서도

거창양민학살 사건 희생자와 피해 내역
◎ 1차 학살
 1951년 2월 9일 청연마을 앞 논들
희생자 - 84명
살아남은 이 - 6명(남자1,여자5)
재산피해 - 방화 75동
가축피해 - 27두(강탈 포함)


◎  2차 집단학살
 1951년 2월 10일 탄량골 골짜기
희생자 - 100명
살아남은 이 - 여자 1명
재산피해 - 중유리 196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60두
                대현리 366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542두
                와룡리 215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96두


◎ 3차 집단학살
 1951년 2월 11일 박산골 골짜기
희생자 - 517명
살아남은 이 - 남자3명(문홍준, 신현덕, 정방달)
재산피해 - 과정리 109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76두
                청수리 88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2두
                덕산리 2동을 모두 불태움, 가축피해 3두

다음날(1951년 2월 10일),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 주민들을 끌고 '신원초등학교'로 연행해 오던 가운데 힘이 빠져 뒤처진 주민 100여명을 탄량골 골짜기에 몰아넣고 또 다시 더할 수 없이 끔찍하게 죽입니다.

이처럼 끔찍한 일을 하고도 또 다시 시체 위에다가 삼대와 솔가지를 얹고 불까지 질렀으니, 그 악한 죄를 어찌 다 씻을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어요.

또 다음날(1951년 2월 11일), 제3차 집단학살이 박산골 골짜기에서 있었는데 무려 517명이나 죽였어요.

국군(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들어간 마을(과정리, 청수리, 덕산리)마다 집을 모조리 불태우고 집짐승을 강제로 빼앗거나 또 죽이고, 사람은 닥치는 대로 잡아끌고
왔어요. 사흘 동안 무려 일곱 개 마을을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만들었답니다.

신원초등학교까지 끌려온 사람들은 모두 800명쯤 되었는데,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24시간 동안 꼬박 갇혀 있었지요. 무엇보다 무서움에 떨며 실신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예까지 끌려오면서 뒤처진 사람들은 길에서 쏴 죽였으니 이 끔찍한 일을 본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 비참한 광경을 눈앞에서 보면서 두려움에 얼마나 떨었을까?

군인들은 이들을 데리고 박산골 골짜기로 끌고 가서 모조리 죽였어요. 그 가운데에 군경 가족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비참하게 죽어야 했지요. 또 두 시간 동안이나 확인사살까지 한 뒤에 시체 위에 나무를 올려놓고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우기까지 했습니다.

무려 517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인 곳이에요. 지금은 그 억울한 죽음을 기리는 빗돌이 서 있답니다.
▲ 박산골 학살터 무려 517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인 곳이에요. 지금은 그 억울한 죽음을 기리는 빗돌이 서 있답니다.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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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여년 앞서, 이곳에 끌려왔던 800명 남짓 되는 이들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이곳까지 끌려오면서 길가에서 총으로 쏴 죽인 이들도 여럿 있었고, 24시간 동안 꼬박 갇혀 있으면서 추위와 굶주림, 두려움에 떨며 보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요. 심지어 군인, 경찰 가족 나오라는 말에 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답니다. 지금은 이렇듯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 있지만,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지요.
▲ 신원 초등학교 60여년 앞서, 이곳에 끌려왔던 800명 남짓 되는 이들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이곳까지 끌려오면서 길가에서 총으로 쏴 죽인 이들도 여럿 있었고, 24시간 동안 꼬박 갇혀 있으면서 추위와 굶주림, 두려움에 떨며 보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요. 심지어 군인, 경찰 가족 나오라는 말에 나갔다가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답니다. 지금은 이렇듯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 있지만,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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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운섭
▲ 신원국민학교 학생들 사진(1954년) 사진- 김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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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동안 우리 국군의 손에 끔찍하게 학살당한 사람은 모두 719명, 이 가운데 어린이가 359명, 16~60살이 300명, 예순이 넘은 노인이 60명(남자 327명, 여자 392명). 이 모두가 아무런 죄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농사를 지으며 오순도순 평화롭게 살아가던 산골마을 순박한 사람들이었어요.

정말 놀랍고 두려운 일이었어요. 지나간 역사이지만, 참으로 가슴 아프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에요. 어떻게 이처럼 끔찍한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났을까? 워낙 깊은 산골이라 전쟁이 났다는 소식조차도 제대로 듣지 못했던 이들한테 북한군도 아닌, 우리 국군의 총칼에 쓰러졌다니! 어린아이를 죽일 때, '조준사격'까지 했다니 너무나 무섭고 살 떨리는 일이에요.

국군이 도대체 왜 이런 끔찍한 일을?

사흘 동안 무려 일곱 개 마을을 돌면서 집과 집짐승까지 모조리 불태우고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 생지옥으로 만든 이 끔찍한 일이 왜 일어났을까? 그 까닭을 알고 나니 더욱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어요. 그때(1951년2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육군 제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공비토벌작전)'을 펼치고 있었어요.

전북 남원에 사령부를 두고, 경남 산청에 본부를 둔 제 9연대(연대장 오익경 대령)는 3대대장 한동석 소령을 내세워 신원면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던 거였어요. 이른바 '견벽청야작전'의 하나로 공비를 토벌한다는 구실을 삼아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거였어요. 이 '견벽청야작전' 명령문에 매우 눈여겨볼만한 것이 있어요.

[견벽청야작전(堅壁淸野作戰) 명령문 일부]
   
1. 작전중 대대장은 작전 지역에서 이적행위자를 발견시는 즉결하라.
2. 식량과 가옥을 확보하라.


그러나 실제로는 작전명령(작명 제5호)에는 이런 명령문이 있었다고 하네요.

첫째, 작전지역내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
둘째, 공비의 근거지가 되는 가옥을 모두 소각하라.
셋째 식량은 안전지역으로 운반하여 확보하라.


[견벽청야작전의 뜻-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 거점은 벽을 쌓듯 견고히 확보하고 부득불 포기하는 지역은 인원과 물자를 철수하고 적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애 빈 들판을 남겨 준다.]

그때 그 사건은 어쩌면 영영 묻힐 수도 있었으나, 거창 출신 신중목 의원이 국회에서 밝힘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요. 그러나 이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끝까지 변명과 속임수로 주장하며 거짓으로 꾸며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지요. 또 이때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희생자와 유족들은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명예롭지 못한 일을 겪어야 했답니다.
▲ 여러 가지 보고서와 문서 그때 그 사건은 어쩌면 영영 묻힐 수도 있었으나, 거창 출신 신중목 의원이 국회에서 밝힘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요. 그러나 이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끝까지 변명과 속임수로 주장하며 거짓으로 꾸며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지요. 또 이때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희생자와 유족들은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명예롭지 못한 일을 겪어야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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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신원면 마을 사람들은 공비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이적행위자'도 아니었고, '적과 내통한 자'도 아니었다는 거였어요. 단지 '공비토벌작전'에서 공을 세우려고 한 군 지휘관(9연대장(오익경 대령), 3대대장(한동석 소령))의 어처구니없는 욕심(?) 때문에 이처럼 끔찍한 일이 일어났던 거였어요.

더 가슴 아픈 건, 그해(1951년)3월29일 제 54차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출신 신중목 의원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 끔찍한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국회에서 알렸어요. 그러나 이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끝까지 변명과 속임수를 쓰며 사실과 다르게 주장했대요.

또 경남계엄민사부장이었던 김종원은 신원면에 부분계엄령을 내리고 학살당한 어린이 시체만 따로 골라내어 학살현장에서 2km 떨어진 홍동골 골짜기로 옮겨 암매장하여 숨기고, 마치 공비와 전투를 하여 희생자가 나온 것처럼 거짓으로 꾸몄어요.

그리고는 '통비분자 187명 사살'이라는 거짓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답니다. 하물며 국회합동조사단이 현장에 조사를 하려고 왔을 때, 미리 소식을 들은 김종원이 국군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신원면으로 들어오는 골짜기 수영더미재에서 총을 쏘아대어 조사도 못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대요.

이처럼 많은 희생자를 낸 이 사건에서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기회만 되면 탄압을 했다고 해요. 이 끔찍한 일이 진실로 드러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사건이 일어난 지 세 해 만에 겨우 유골을 거두어 뼈만으로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어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어린이로 나누고 화장을 하여 517명을 큰 무덤 3기로 합장해서 '박산골 합동묘소'를 만들었지요.

그런데 지난 1961년 5월 18일. 5·16 군사정부는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단체로 지정하여 구속시키고, 같은 해 6월 25일에 무덤을 파헤쳐 유족들한테 흙 한 줌씩 나누어주면서 따로 묻으라고 했답니다. 이도 모자라 죽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려고 세운 위령비에 새겨진 글자를 하나하나 정으로 쪼아 땅속에 파묻기까지 했어요.

세월이 지난 1961년, 5?16군사정부는 또 다시 탄압을 했어요. 무덤을 파헤치고 흙 한 줌씩 나눠주며 따로 묻으라고 했지요. 그것도 모자라 죽은 이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에 새겨진 글자를 하나하나 정으로 쪼아내고 땅 속에 파묻어버렸답니다.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요. 저렇게 훼손된 위령비를 산 교육으로 삼고자 그대로 두었어요. 위령비 뒷면을 살펴 보니, 참말로 정으로 깨고 쪼아서 글자를 못 알아보게 했더군요. 지금 이 곁에는 새롭게 세운 위령비가 하나 더 있답니다.
▲ 박산함동묘역 세월이 지난 1961년, 5?16군사정부는 또 다시 탄압을 했어요. 무덤을 파헤치고 흙 한 줌씩 나눠주며 따로 묻으라고 했지요. 그것도 모자라 죽은 이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에 새겨진 글자를 하나하나 정으로 쪼아내고 땅 속에 파묻어버렸답니다.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요. 저렇게 훼손된 위령비를 산 교육으로 삼고자 그대로 두었어요. 위령비 뒷면을 살펴 보니, 참말로 정으로 깨고 쪼아서 글자를 못 알아보게 했더군요. 지금 이 곁에는 새롭게 세운 위령비가 하나 더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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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슴 아프고 슬픈 사건이 일어난 지 60년 남짓이 지났어요. 처음 이승만 정권 때부터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고, 2004년 '거창사건추모공원'이 준공되기까지 갖가지 어려운 일들이 매우 많았다고 해요. 이곳 신원면 대현리에 희생자들의 억울함이 진실로 밝혀지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고, 남겨진 유족들조차 '반국가단체'라는 명예롭지 못한 대접을 받아야만 했어요.

같은 겨레끼리 총칼을 겨누는 것도 모자라 아무 죄 없는 어린이, 어른, 노인들을 끔찍하게 학살한 이 슬픈 역사를 어찌 감당할까? 거창사건추모공원을 돌아보는 내내 슬픔을 가눌 수 없었어요. 남편과 함께 죄 없이 죽은 719명의 넋을 기리며 위패를 모셔둔 위패봉안각에서 향을 피우고 묵념을 하면서 오랫동안 기도를 했답니다. 부디 끔찍했던 지난일과 그 설움을 모두 잊고 편안하게 잠드시라고….

억울한 죽음, 오랜 세월 동안 설움을 안은 채, 명예회복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힘든 나날을 보냈어요. 719명 그 소중하고 안타까운 넋! 어린이부터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 가두고 집단학살까지 했어요.
이 많은 이의 위패가 모셔진 이곳에 서서 향을 피우고 참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답니다.
▲ 위패봉안각 억울한 죽음, 오랜 세월 동안 설움을 안은 채, 명예회복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힘든 나날을 보냈어요. 719명 그 소중하고 안타까운 넋! 어린이부터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 가두고 집단학살까지 했어요. 이 많은 이의 위패가 모셔진 이곳에 서서 향을 피우고 참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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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잊어버리려 하네

기억의 힘은 또렷하게 원혼의 마디마디를 재며
온몸에 천형의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네.

형해(形骸)같은 아지랑이 베어 물고
어김없이 반세기를 넘나들고도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들이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돌고 있네

붉은 피 물들어
진달래 흐드러진 골을 보며
당신은 웃었는가?

척박한 땅 소리낼 수 없는 울음으로
머뭇머뭇 촉수 드러내는
밤나무들의 수근거림을
당신은 들었는가?

뜨거움 삭이며 안았던
한 줌 뼛조각의 가벼움과
단단하게 뭉쳐진 죽음의 무게를
당신은 무엇으로 저울질 할 것인가?

원혼의 뼛조각 봄빛에 내놓으면
스르르 스르르 꿈틀거리며
봄기운에 젖어
잊어야 한다고,
기약 없는 기다림의
설운마음 눕힐 수 없다면
차라리
차라리 잊어버려야 한다고.


신 승 희 (거창사건 희생자 2008년 4월15일 제 57주기 추모식 추모시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쓰면서, '거창사건추모공원'에서 본 것들과 (사)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에서 지난 2008년 4월15일에 펴낸 '거창사건희생자 제 57주기 함동위령제 및 추모제' 자료집에 있는 글을 참고했습니다.

뒷 이야기와 더욱 많은 사진은 한빛이 꾸리는'우리 말' 살려쓰는 이야기가 담긴 하늘 그리움(http://www.eyepoem.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태그:#거창양민학살사건,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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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두 바퀴에 싣고 온 이야기보따리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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