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외갓집은 봄햇살처럼 따뜻하다. 외갓집 안마당에 내리쬐던 햇살은 안방 문 창호지에 나른하게 머물고, 그리고도 남은 햇살은 소 여물통에도 머물렀다. 외숙모는 종종 걸음으로 정지(부엌)에서 도장(광)으로 또 새미깐(우물)으로 오갔다.
사랑방에는 외할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외할아버지 얼굴은 기억이 안 난다. 나를 부를 때 뭐라고 부르셨는지, 내가 가서 "외할배요" 하면서 인사드리면 좋아하셨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외할아버지는 기억 속에서만 흐릿하게 남아 있다.
봄햇살처럼 따스한 외갓집
우리 외할매는 그 때 사람이 아니었다 한다. 통도 크고 속이 넓어서 어지간한 남자보다 더 시원시원했다 한다. 여자는 바깥출입을 잘 안하던 옛날 그 시절에도 외할매는 서울이고 부산이고 다 다니셨다. 외할매 꿈은 조선 팔도를 유람해 보는 거라고 하셨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도 늘 어딘가를 여행하고 싶어 한다. 내 피 속에는 외할매의 유전인자가 많이 들어 있나 보다.
외갓집을 떠올리면 외사촌 오빠의 댁인 올케 언니가 많이 생각난다. 외갓집의 큰 오빠는 나랑 나이 차가 많이 났다. 올케 언니 역시 내겐 거의 엄마 뻘이었다. 그런데도 언니는 나만 보면 꼭 "애기씨 애기씨"라고 불렀다. 언니가 그렇게 불러주는 게 참 좋았다. 어쩌면 나는 올케 언니의 애기씨 소리를 듣고 싶어 외갓집에 자주 놀러갔는지도 모르겠다.
결혼하고 나서 엄마랑 외갓집에 간 적이 있다. 엄마는 새로 맞은 사위를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그게 엄마와 함께 간 마지막 외갓집 나들이였다. 그리고 몇 달 뒤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고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외갓집과 멀어졌다.
가을 여행을 갔다 외갓집에 가다
몇 해 전 설날에 외갓집에 인사드리러 간 적이 있었다. 올케 언니는 여전히 나를 보며 "애기씨야 애기씨야" 불렀지만 외숙모도 없고 외할매도 없는 외갓집은 허전하기만 했다.
그러고 또 세월이 흘렀다. 가끔씩 외갓집의 소식을 듣기는 했다. 명절 때면 친정 아버지를 뵈러 고향에 갔지만 친정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있는 외갓집에는 잘 가지지 않았다. 식구들 일정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외갓집까지 찾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외갓집에 갈 일이 생겼다. 외사촌이랑 같이 여행 겸해서 외갓집에 간 것이다.
중국에 살고 있는 내 외사촌은 방학이면 한국에 나오는데, 올 때마다 꼭 우리 집에 들렀다 가곤 한다. 그 날도 우리 집에 온 외사촌이랑 식사 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날은 비 온 다음날이어서 그랬는지 햇살이 참 깨끗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초록 들판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햇살에 가을 냄새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가을 냄새가 나니 여행 이야기가 나왔고 기차 여행이 가을 여행의 백미라는 말도 했다. 그러자 문득 기차를 타고 가을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대구에 갈 일이 있으면 고속열차를 타곤 했는데 그 날은 마음 맞는 동행도 있고 하니 무궁화 열차를 타고 느릿느릿 가을여행을 하자고 우리는 그랬다.
기차를 타고 내려가며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외갓집도 들르고 우리 집에도 들러서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 오래는 못 앉아 있더라도 잠깐씩이라도 앉았다 오자고 그랬다.
외삼촌은 내게서 우리 엄마를 보신다
외사촌이랑 함께 외갓집에 갔다. 오빠 내외만 있는 큰 외갓집엔 못 들르고 외삼촌 내외분이 다 계시는 작은 외갓집에 들렀다.
마당으로 들어서며 외숙모를 부르자 안에서 "누고?"하며 사람이 나왔다. 외숙모는 오이 짠지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입담이 좋고 사설이 좋아서 좌중을 울렸다 웃겼다 하던 작은 외숙모였는데 세월 앞에 머리 허연 노인이 되어 있었다.
"하이고 야야, 니가 우얀 일이고?"
외숙모는 내 손을 잡아끌며 연신 "니가 우얀 일이고" 그러셨다.
"니는 너거 엄마를 마이 닮았다. 너거 옴마가 오래 살았으마 얼매나 좋았겠노. 그래도 니가 이래 오니, 너거 엄마 보는듯이 반갑네."
마실 나가셨던 외삼촌이 오셔서 나를 보며 그러셨다.
외삼촌은 그저 내가 하는 양만 바라보셨다. 내가 웃으면 내 웃는 모습에서 우리 엄마 모습을 찾는 거 같고 내가 말하면 말하는 입매에서 또 우리 엄마를 보는 거 같았다.
그 날 그 자리에는 우리만 있었던 게 아니고 우리 엄마도 함께 한 거 같다. 나는 외삼촌에게서 엄마를 찾고 외삼촌은 내게서 여동생인 우리 엄마를 찾으셨다. 문득 보니 외삼촌 눈에 물기가 어려 있는 거 같았다. 우리 엄마가 잠깐 왔다가 가신 모양이다.
잠깐 앉았다 선걸음에 일어서는 내게 외숙모는 뭔가를 챙겨주신다. 보니 하얗게 말린 백도라지였다. 두 노인네가 무릎 맞대고 앉아서 껍질을 까고 잘게 쪼개서 곱게 말리셨을 백도라지를 두 뭉치나 주셨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내게 "또 오거래이, 또 오거래이"하시며 연신 손을 흔들어 주시던 두 분의 모습이 생각난다. 오래 오래 건강하시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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