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 입도 비뚤어진다는 처서(處暑)이자 주말인 지난 23일 부모님 산소에 가서 벌초를 하고 왔습니다. 형님, 동생 내외, 조카들과 함께 했는데요. 2002년 부산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추석에 성묘만 몇 번 다니다 해서 그런지 느낌이 남달랐습니다.
수원 사는 조카가 비가 내릴 것이라는 기상대의 예보를 듣고 걱정하자 "비를 맞으며 벌초를 하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형님의 권유로 강행했는데, 온종일 산들바람이 불고 구름이 햇볕을 가려줘 땀을 흘리면서도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처서(處暑)에 날이 좋으면 농작물이 풍성해지고, 비가 오면 십 리에 곡식 천 석을 감한다. 라는 속담처럼 예부터 처서의 비는 흉년을 예고한다는 믿음이 전해져 오는데요. 산들바람이 부는 잔잔한 날씨가 풍년을 예약하는 것 같았습니다.
8월 초부터 조카들과 함께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이사한 집에서 산소까지 승용차로 10분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먹고 이삿짐을 정리하는데, 동생이 제수씨와 함께 데리러 왔더군요.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산소에 도착해서 조금 있으니까 형님이 오셨습니다. 왼팔에 힘이 없어 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도 무거운 예취기를 들고 차에서 내리는 형님에게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형님과 동생 내외 그리고 저는 곧바로 한적한 비탈길을 따라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으며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부모님 산소는 오성산 줄기가 둘러싼 성덕리 마을에서 3분 정도 오르는 위치에 있는데요. 묘소를 지키는 괴석 위로 금강하굿둑과 지금은 담수호가 된 금강, 충청도 산하가 한눈에 들어와 풍광이 좋습니다.
산소에 도착하자 형님은 쉴 겨를도 없이 예취기 엔진에 기름을 넣고 작업을 준비했고, 동생은 낫, 호미, 면장갑, 팔에 걸치는 토시와 아카시아와 억새 뿌리에 뿌릴 '근삼이'를 배낭에서 꺼냈습니다.
반소매 차림으로 따라간 저는 동생이 건네주는 토시와 면장갑을 끼고 낫으로 잡초를 베다 땅벌인지 말벌인지 이름도 모르는 벌레에게 쏘였습니다. 순간적이었는데요. 얼마나 놀라고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만 쏘인 게 아니라 형님도 여러 군데를 쏘여 팔과 등에서도 피가 나더라고요. 옷에 피가 번질 정도로 상처를 입었는데도 제가 이름도 모르는 벌레에 쏘여 아프다는 말을 꺼낼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거운 예취기를 메고 벌초에 여념이 없는 형님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돈네 산소까지 벌초하는 형님 조금 있으니까 경기도 수원에 사는 조카 부부가 도착했고 이어 파주에 사는 큰 조카 부부가 도착해서 합류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조카들은 벌초하는 날 성묘도 하겠다며 음식을 준비해왔더라고요. 조카들 아버지(큰 매형) 묘소가 부모님 산소와 붙어 있거든요.
올해 쉰다섯 살인 큰 조카가 형님에게 후계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제의해서 예취기를 넘겨받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용법을 배워 풀을 베었지만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형님에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큰 조카의 손놀림이 형님이 보기에 무척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큰 조카에게 다시 예취기를 넘겨받은 형님은 어디에서 힘이 나오는지 큰 매형을 비롯한 사돈네 산소까지 벌초를 해서 동생과 조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덕에 조카들은 힘들이지 않고 벌초를 마치고 성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조카들이 성묘를 마치고 둘러앉아 휴식을 취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요. 오랜만에 형님, 조카들과 함께 벌초를 하니까 그런지 표현하기 어려운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하드디스크에 보관되어 있던 기억의 칩이 자동으로 나오듯 저도 모르는 사이에 충청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섞인 고향 사투리가 튀어나왔고 분위기는 무르익어갔습니다.
풀을 벤다는 뜻인 '벌초'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묘한 풍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초를 하면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망자는 잠시나마 부활합니다. 풀을 베며 부모에게 못다 한 아쉬움을 전하고 넋을 기리기 때문입니다.
무덤 주위의 풀들을 베어내며 돌아가신 부모는 잠시나마 자식의 기억에서 환생합니다. 그래서 벌초는 생과 사의 공간을 넘나드는 초월적인 의식이며, 자식이 부모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셈입니다.
해서 저에게 잡초들을 베어내는 벌초는, 꼭 풀을 베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부모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고 가족을 만나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훗날 자식이야 어떻게 하든 저에게 주어진 임무이니 책임감도 작용했을 것이고요.
안전사고 예방과 응급조치 추석을 보름여 앞두고 있어 이른 성묘나 벌초를 하러 가는 분들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따라서 벌에 쏘이거나 뱀에 물리는 등 안전사고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어 산에 갈 때 주의할 점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산에 갈 때는 벌이나 뱀 등을 자극하는 밝은 색 계통의 옷이나 진한 화장은 피하는 게 좋다고 합니다. 특히 예취기를 사용하기 전 긴소매 옷, 긴 바지, 장화, 보안경, 장갑 등 안전 장구 착용은 필수이고요. 예취기를 메고 작업하는 사람 어깨에 물수건을 걸쳐주면 좋습니다.
베어낸 잡초와 나뭇가지를 구석에 버리는 사람은 흙이나 이물질이 눈에 들어가거나 작은 돌멩이가 몸에 맞으면 부상을 당할 수 있으니까 예취기 앞이나 옆으로 접근하지 말고 뒤를 따라다니며 작업을 하는 게 안전합니다.
벌에 쏘이는 사고는 추석을 전·후한 8월과 9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고 하는데요. 냄새가 진한 화장품이나 향수는 벌을 불러 모으기 때문에 산에 갈 때는 화장품이나 향수를 피하는 게 좋습니다.
산소 주변에 흙을 뿌려 보면 벌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양지바른 곳에 집을 짓기 좋아하는 벌은 주위에 흙이 뿌려지면 벌집 밖으로 나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성묘나 벌초를 하기 전 확인하면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벌집을 건드렸을 때는 벌을 쫓으려고 손을 움직이지 말고, 그늘 등 어두운 곳으로 피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최대한 낮추어야 합니다. 벌에 쏘이면 당황하지 말고 부위에 남아 있는 침을 손톱이나 핀셋으로 제거하고 물수건 등으로 차갑게 해줍니다. 특히 노약자가 벌에 쏘여 호흡이 곤란하거나 두드러기 증상이 나타나면 즉시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뱀은 예취기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사람에게 수세적인 뱀은 발걸음 소리가 크거나 기계 소리가 크면 도망을 하거든요. 그래도 풀숲에서 조용히 있는 뱀을 건드리면 물릴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요즘 뱀들은 독성이 가장 많이 올라 있으므로 뱀에게 물리면 움직이지 말고 즉시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뱀독은 체내에서 혈액응고, 신경마비 등 부작용을 일으키므로 물린 부위를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고 술 같은 음식은 먹지 않아야 합니다.
벌 독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벌에 쏘이면 1시간 이내에 사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알레르기를 경험한 사람은 벌초나 성묘 전에 반드시 해독제와 지혈대 등을 준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