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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다리 헌책방이라는 곳을, 우리들은 몸으로 겪어 보지 않고 겉핥기로만 대충 이야기하면서, 정작 헌책방에 깃든 멋과 맛을 모두 놓치고 있다고 느낍니다.
책과 사다리헌책방이라는 곳을, 우리들은 몸으로 겪어 보지 않고 겉핥기로만 대충 이야기하면서, 정작 헌책방에 깃든 멋과 맛을 모두 놓치고 있다고 느낍니다. ⓒ 최종규
헌책방에 갑니다. 등에는 가방, 손에는 사진기를 들고 헌책방에 갑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난해까지는 혼자서 가던 헌책방이고, 지난해부터는 옆지기하고 함께 찾아가는 헌책방입니다. 혼자서 헌책방을 찾아가던 때에는 예닐곱 시간씩 온 골목을 거닐며 책방 마실을 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여러 시간씩 이 동네 저 동네로 옮겨다니며 책방 마실을 하기도 했습니다.

둘이서 헌책방을 찾아가는 지금,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 다른 책을 살펴봅니다. 제가 고른 책을 옆지기가 더듬어 보고, 옆지기가 고른 책을 제가 더듬어 봅니다. 이런 책을 이렇게 찾아서 읽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내가 바라거나 좋아하는 책은 얼마나 내 둘레 사람들한테도 건네줄 만한가를 곱씹습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삽니다. 헌책방이니 ‘헌책’을 사는데, ‘헌’책이라서 ‘새’책과 견주어 값이 쌀 때가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월 때를 먹은 책은, 이 책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서 다른 값이 매겨집니다. 열 해를 먹은 책은 열 해에 따른 값을, 스무 해를 먹은 책은 스무 해에 따른 값을, 쉰 해를 먹은 책은 쉰 해에 따른 값을 받습니다.

이냥저냥 읽어치우는 책이 아니라, 쉰 해가 지났음에도 읽을 만한 책을 만나는 헌책방입니다. 값싸게 사들이는 책이 아니라, 누군가 처음 손길을 내밀었던 책을 옛임자 손때를 느끼며 만나는 헌책방입니다. 때로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라 하는 책을 눅은 값에 사는 헌책방이고, 때로는 판이 끊어지거나 묻혀져 버린 보물을 캐내는 헌책방이며, 때로는 우리 세상이 흘러온 발자취를 곱씹는 이야기가 담긴 책을 반갑게 마주하는 헌책방입니다.

첫 아이가 입은 옷을 둘째가 물려서 입듯, 둘째가 입은 옷을 이웃집 아이가 물려서 입듯, 헌책방 헌책은 여러 사람을 돌고 돌면서 읽힙니다. 새책방 새책은 오로지 한 사람한테만 읽히고 책꽂이에 꽂히지만, 헌책방 헌책은 ‘적어도 네 사람’ 손길을 탑니다. 맨 먼저 이 책을 알아보고 산 사람, 이 책이 버려진 뒤 건져낸 샛장수, 샛장수한테서 이 책을 사들이는 헌책방 일꾼, 그리고 헌책방을 찾아가는 책손.

책꾸러미 헌책방은 '추억'이 아닌 '현실'이 녹아내고 묻어나는 책이 깃든 곳입니다.
책꾸러미헌책방은 '추억'이 아닌 '현실'이 녹아내고 묻어나는 책이 깃든 곳입니다. ⓒ 최종규
우리나라는, ‘책을 좋아하고 아끼는 분’들이 헌책방에 당신 책을 기꺼이 내놓는 일이 드뭅니다. 폐휴지더미에 책을 끼워넣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책 좋아하던 바깥양반이 세상을 뜨면 ‘아이구, 귀찮은 짐더미를 이참에 치워야지’ 하면서 버렸고, 아파트 문화가 널리 퍼지면서 ‘종이 재활용’으로 내놓습니다. 요사이는 알맹이를 읽는 책이 아니라 돈벌이를 하는 물건이 되어서, 비온 다음 무럭무럭 자라는 대나무싹처럼 ‘개인 인터넷 헌책방’을 여는 이들이 늘어납니다.

이러는 가운데, 말없이 ‘자원 다시쓰기’를 해 오고 있던 헌책방은 설 자리를 빼앗깁니다. 힘과 돈이 있는 시민단체에서 뒷배를 하는 ‘ㅇ 가게’에서도, 헌책방 일꾼이 보물 같은 책 하나 먼지구덩이에서 코를 찌르는 냄새를 뒤집어쓰면서 찾아내고 건져내던 땀방울을 하루아침에 가로챕니다. 값싼 물건이 아니요, 추억 어린 물건이 아닌 헌책입니다. 우리 삶을 담고 우리 얼이 담기며 우리 손길이 묻어난 헌책입니다. 되읽힐 만한 무게가 있어서 헌책방 품에 안기는 헌책입니다. ‘잘 안 팔리니 매대에서 빼내어 버리는 새책방 책’과 달리, ‘언젠가 알아볼 책임자 하나를 기다리면서 책꽂이 한 자리를 내어주는 헌책방 책’입니다. ‘자리만 넓게 차지하고 빌려가는 사람이 없으니 내다 버리는 도서관 책’과 달리, ‘지금 곧바로 사 가는 사람은 없어도 우리 책 문화와 사회에서 알뜰한 열매라고 느끼니 열 해고 스무 해고 얌전히 갖추어 놓는 헌책방 책’입니다.

누가 헌책방을 가벼이 봅니까. 누가 헌책방 헌책을 업수이 여깁니까. 누가 헌책방 일꾼 투박하고 거칠어진 손을 얕잡습니까. 누가 헌책방 문화를 고작 ‘철지난 추억’으로만 깎아내립니까.

매무새를 낮추어 손님을 맞아들이는 거룩한 책쉼터인 헌책방입니다. 가슴을 넉넉히 열어멎히고 어느 손님이라도 기꺼이 껴안는 따순 책놀이터인 헌책방입니다. 기나긴 세월과 넓디넓은 세상을 한 자리에 그러모으는 탁 트인 책만남터인 헌책방입니다.

저는 이 헌책방에서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헌책방 헌책 하나에서 빛줄기를 찾았습니다. 헌책방 일꾼 얼굴과 손과 몸뚱이에서 사랑을 배웠습니다.

책 고르기 마음에 드는 책을 찾고, 마음을 움직이는 책을 찾으며, 마음을 살찌우는 책을 찾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새책'이나 '헌책'이 아닌 '책'을 찾아야 합니다.
책 고르기마음에 드는 책을 찾고, 마음을 움직이는 책을 찾으며, 마음을 살찌우는 책을 찾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새책'이나 '헌책'이 아닌 '책'을 찾아야 합니다. ⓒ 최종규

조그마한 헌책방이 있으며, 널따란 헌책방이 있습니다. 개미소굴 헌책방이 있으며, 시원시원한 헌책방이 있습니다. 조금 어두운 헌책방이 있으며, 아주 환한 헌책방이 있습니다. 동네 골목길 헌책방이 있으며, 신촌이나 보수동 같은 큰길가 헌책방과 저잣거리 헌책방이 있습니다.

힘 많이 들고 먼지 많이 먹으며 사회에서 푸대접을 하니, 대학 나오고 유학 다녀온 똑똑이들은 좀처럼 뛰어들지 않는 헌책방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헌책방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많이 배운 사람들이고 글쟁이들이고 책쟁이들입니다. 가방끈이 긴 헌책방 일꾼은 드물지만, 마음결이 좁은 헌책방 일꾼은 없습니다. 이와 달리, 우리 세상에서는 가방끈이 긴 사람은 많지만, 마음결이 넓은 사람은 드물다 못해 찾아보기 아주 힘듭니다.

이리하여, 저는 헌책방 나들이를 하는 동안 책 하나에 담는 땀방울부터 책 하나가 어떻게 마무리가 되어서 우리 가슴에 빛줄기가 되어 뿌리내릴 수 있는가를 배웁니다. 책 하나를 고맙게 사들이면서도 배우고, 책 하나를 여러 해에 걸쳐서 여러 차례 되읽으면서도 배우지만, 책 하나 다루는 헌책방 일꾼 매무새와 헌책방에 자기한테 소중한 책을 대가 없이 내놓아 준 수많은 분들 마음결로 훨씬 많이 배웁니다.

책은, ‘읽어서 내 마음에 담아야 할’ 그릇입니다. 책은, 집구석에 꽂아 놓고 사람들한테 내보이거나 자랑하는 겉치레가 아닙니다. 헌책방 헌책은 겉치레가 얼마나 볼품이 없는지를 넌지시 일러 줍니다. 속치레를 않는 지식이 얼마나 몹쓸 장삿속이며 못난 껍데기인지를 살며시 알려줍니다. 헌책방에 깃든 헌책 하나를 돌아보면서 날마다 수없이 쏟아지는 새책이 우리 삶에 얼마나 값을 하는가를 가만히 곱씹습니다. 허울만 좋은 ‘새’책인지, 겉으로만 ‘새’책인지, 알맹이와 속살로까지 ‘새’책인지, 우리한테 들려주거나 나누려는 마음으로도 ‘새’책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책손 만화책을 보러 헌책방에 오는 아이들은 그냥 '책을 보러 옵'니다. 이와 달리 우리 어른들은 헌책방에 가든 새책방에 가든 또 도서관에 가든 '어떤 굳어 있는 생각'을 털어내지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찾아가고 있습니다.
책손만화책을 보러 헌책방에 오는 아이들은 그냥 '책을 보러 옵'니다. 이와 달리 우리 어른들은 헌책방에 가든 새책방에 가든 또 도서관에 가든 '어떤 굳어 있는 생각'을 털어내지 못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찾아가고 있습니다. ⓒ 최종규

모든 책이 헌책인 까닭, 모든 책이 헌책이면서 새책인 까닭, 모든 책은 그저 책인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헌책방을 다닙니다. 헌책방을 다니며 이 고맙고 사랑스러운 헌책방을 내 마음에 느껴지는 모습 그대로 사진에 담아야겠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지난주 8월 16일에 태어난 우리 첫 아이 ‘사름벼리’가 무럭무럭 자라서 혼자서 걸을 나이가 되면, 세 식구가 손 잡고 헌책방 나들이를 함께 즐길 생각입니다.

덧붙이는 글 |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손 안 愛書> 사진 공모전(2008)에서 대상을 받게 되면서, 제가 찍은 사진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를 풀어내는 이야기로 적어서 보내 준 글입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헌책방#책#책 문화#헌책#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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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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