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민주당 재선 의원(부평을)이었으면서도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이국의 땅 우크라이나로 건너간 최용규 전 의원이 그곳에 있는 무국적 고려인들을 위한 학교 신설 등을 비롯해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최근 돌아왔다.
우크라이나의 무국적 고려인은 1937년 9월 7일 스탈린 정권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의 지역에 정착한 고려인을 말한다. 연해주 지역에 모여 살던 한인들이 훗날 국경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한 스탈린 정권에 의해 취해진 조치다.
이들은 빠르게 정착해 성공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91년 옛 소련 붕괴 후 민족주의의 발로로 독립국가연합이 출범하면서 꼬였다. 독립국가는 자국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해 주로 러시아어만 가능한 고려인들은 직장 등에서 쫓겨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고, 상당수가 국적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됐다.
현재 러시아 등에서 볼 수 있는 고려인들은 보통 교포 3, 4세 정도다. 최 전 의원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 모여든 무국적 고려인들은 대략 2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 시작 연도에 대해서는 1862년, 1863년, 1864년 등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이는 제정러시아와 조선 사이에 공식 외교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고려인들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나들어도 그 수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통상 알려진 학설은 한인 농민 13가구가 1863년 겨울에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강 유역인 노보고르드(Novogord)에 정착한 것이 이민의 시초로 보고 있다.
최 전 의원의 이번 입국은 무국적 고려인의 정착을 위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재원이 턱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명예와 돈(?)을 포기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정작 돈이 부족해 돈을 만들기 위해 입국한 최 전 의원. 8월 15일 광복 63주년을 맞아서 그런지 최 전 의원은 인터뷰 전에 방송국 등으로부터 전화를 계속 받았다.
최 전 의원은 지난 3월 <부평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가장 어렵게 사는 우리 동포 2만명의 영혼이 달린 문제인데, 이걸 장난삼아 하면 날벼락을 맞는다. 우크라이나 무국적 고려인들의 영혼을 다 건져놓고 나면 그때는 혹여 다른 생각(=정치활동 재개)이 있을지 몰라도 지금으로선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최 전 의원이 우크라이나 고려인에 대해 애정을 갖기 시작한 것은 최 의원이 한-우크라이나 의원 친선협회 일을 하면서부터다. 이 과정에서 최 전 의원은 2006년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부터 무국적 고려인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당시 최 전 의원은 자신의 재산을 투자해 우크라이나에 유통시장을 만들어 낙농업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현지 생산물을 유럽시장을 통해 유통시키고 이를 통해 무국적 고려인의 경제적 자립, 후세를 위한 학교 신설과 국적 회복을 단계적으로 진행할 계획이었다.
또한 제주도 기후와 비슷한 현지 사정을 감안해 쌀농사를 하고 도정공장도 신설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조정래 작가나 김한길씨 등을 초청, 고려인의 아픈 삶의 역사를 대하소설로 쓰게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다음은 최 전 의원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 우크라이나로 출국했다 입국한 지 얼마나 됐는지, 국내 활동은?
"3월 출국했다가 5월 말에 입국했다. 우크라이나 무국적 고려인의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정상회담 온기가 남아 있었을 때는 상황이 좋았지만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정부의 관심이 절실한 실정이다.
솔직히 고려인 돌보는 것은 엄두도 못낸다. 고려인을 돕기 위한 사업 모델을 모색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농장을 구입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현재는 960만평 정도의 농장을 계약했다. 우선은 거기서 시작할 것이고, 필요에 의해서 늘려나갈 것이다. 모자란 땅 값을 준비하러 왔다. 결국 집 등을 담보로 돈을 마련했다. 뜻 있는 사람은 돈이 없고, 투자할 사람은 없는 처지다.
입국해 우크라이나 사람들 초청해 양국간 이해를 높이는 사업과 부족한 재원을 위해 돈을 꾸러 다녔다. 추석 특집으로 SBS 등에서 고려인에 대한 방송을 준비중인데, 대충하지 말라고 했다. 이제는 심금 울리는 방송보다는 희망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방송이 됐으면 한다. 과거 반성은 뛰어 넘어야 한다."
- 현재 무국적 고려인의 상황과 정부의 대응은?
"나아진 것이 전혀 없다. 편히 잘 사는 것을 건드리는 꼴이 됐다. 어차피 돕지 못하면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는데(잠시 침묵), 존재를 몰랐으면 편했는데, 존재가 알려져 더 걱정이다. 더 이상 도와줄, 그들에게 힘이 될 사람이 없는데, 존재만 드러내서 어렵게 만든 것 같아 안타깝다. 정부 차원에서 도와주면 좋을 것 같은데, 우리 정부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보인다. 촛불 끄는 데 정신이 없어 보인다.
해외 식량기지 마련한다고 하는데, 우리와 기후가 비슷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개발 등에 대해서도 적극 고민했으면 한다. 기왕에 그 노력을 버려진 동포들이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했으면 한다. 기업들도 해외 식량 개척에 관심이 있어 현지에 남해화학, CJ, 동부그룹, 농협 등을 안내했다. 현대중공업의 경우는 구체적 의향을 밝히고 있다. 최근에는 농심을 만났다.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고려인을 고용해 국적 회복에 도움이 됐으면 된다."
-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고려인 중 기억에 남는 고려인이 있다면?
"양딸이 생겼다. 12살 여자 아이로 이름은 김월가다. 그 아이는 크림반도 벽촌에 산다. 크림 자치 공화국에서 150km 떨어진 시골에서 사는데, 국내의 전국 수학능력 시험 같은 시험에서 전체 8등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무국적자 딸인데, 엄마 아빠가 노력한 덕에 국적회복 신청을 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작지만 장학금을 후원하는데, 30불을 준다. 사실 이 후원금은 과제물 주고 받아 오는 차비 수준이다.
절망적인 상황에도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 아이의 부모는 같이 일하게 될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월가에게는 여동생이 2명 더 있다. 이런 식(=개인 후원)으로 돌보면 너무 많고 힘들 것 같아 걱정이다.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정부와 국민의 관심이 많았으면 한다."
- 국내는 3개월 동안 촛불 민심이 요동쳤다. 국내 소식을 자주 접했는지, 현 정국을 평가한다면?
"인터넷을 통해 국내 소식은 꾸준히 접하고 있었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된다. 첫째 우려는 분풀이 투표의 대가를 국민이 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두 번째는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 역사를 후퇴시킨 것이 짜증이 난다. 더 이상 정치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 부인과 가족들의 반대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향후 계획은?
"아내는 이미 포기했다. 아내가 힘들게 아이들을 혼자 키워나가고 있어 미안하다. 나는 혼자니 지방에서 싼 호텔이나 민박집에서 지내는데, 가족들을 위해 집을 지을 계획이다. 가족들을 데려가기 위해서는 현지에 집이 필요하다."
- 출국 계획과 향후 일정은?
"9월 3일경 출국할 예정이다. 이번에 가면 매수한 농장 수확하는 것을 둘러보고, 필요한 농기계와 건축 자금 파악해서 다시 들어와야 한다. 밀, 보리, 해바라기, 콩 등을 수확한다.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만들어야 한다. 물가가 비싸다. 지금 수확한 것은 지금 농장 주인이 심어 놓은 것을 수확한 것이다. 원예 화훼를 해서 다른 나라에 판매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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