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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조벌로 나가는 입구에 서면 맞은편에 매화동 아파트가 보인다.
호조벌로 나가는 입구에 서면 맞은편에 매화동 아파트가 보인다. ⓒ 이연옥

매일 다니기로 했던 (경기도 시흥시) 호조벌 산책이었는데 어느 땐가부터 뜸해지더니 몇 달을 들길을 걸어보지 못했다. 엊그제 늘 함께 하던 친구가 오랜 만에 논길 산책을 나가자고 한다. 일찌감치 식구들 저녁식사를 끝내고 설거지까지 다 끝내고 집을 나섰다. 가다말 동네 입구에서 일곱 시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 두 명이 멀찌감치 어른어른 보이기 시작한다. 친구들도 내가 어슴프레 보이는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우리들 세 명이 모이면 일명 '길마재 아줌마 삼총사'가 된다. 또래 친구들인데 길마재에 시집와서 이사를 한 번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같이 늙어가고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은 벗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요즘은 무슨 일들이 그리 많은지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게 지내왔다. 그래서 서로들 벼르다가 저녁시간에 논길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호조벌 바깥으로 도시의 풍경이 보인다.
호조벌 바깥으로 도시의 풍경이 보인다. ⓒ 이연옥

우리들 셋은 만나자마자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가다말 마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모르게 이야기 속에 빠져 있었다. 마을을 막 지나서 호조벌로 나가는 논길을 들어섰다.

 

호조벌 논길을 들어서면 우리들은 더욱 정신없이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 아무리 떠들고 큰소리를 내도 옆에서 들을 사람들도 없고 또한 넓은 들이어서 아무리 떠들고 고성방가를 해도 소리가 넓게 퍼져나가서 크게 들리지 않는다는 장점을 믿고 우리들은 마음껏 큰소리로 웃고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렇게 논길을 조금 더 가자 친구가 말했다.

 

 벼 익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기는 넓기만 한 호조벌 풍경
벼 익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기는 넓기만 한 호조벌 풍경 ⓒ 이연옥

"야. 이 냄새 죽여준다."

"이거 벼 익는 냄새지?"

"응. 그래. 요즘 벼 알이 드느라고 이렇게 구수한 냄새가 난다."

"그동안 우리가 논길을 너무 안 왔어."

"그래 벼가 한창 자랄 때 와보고 이제 왔으니."

"세월이 빠르기도 하지."

"논에 모를 심는가 보다. 한 지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벼가 익으니, 빠르긴 빠르다."

 

논의 중간쯤에 들어섰다. 사방에서 구수하게 벼 익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어두운 밤 논길에서 맡는 벼 익는 냄새는 특별하다. 한 친구가 말했다.

 

 호조벌은 사방으로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논길이 나 있어서 어느쪽으로든 갈 수 있다.
호조벌은 사방으로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논길이 나 있어서 어느쪽으로든 갈 수 있다. ⓒ 이연옥

"세상이 참 편해지고 어려운 게 다 없어졌지?"

"난 이렇게 벼 익는 냄새를 맡으니 어렵기만 하던 옛날이 생각난다."

"그래. 정말 우리들 어렸을 땐 어렵게 살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넓은 들에서 구수한 쌀 냄새를 맡지만 예전엔 그게 참 어려웠지?"

"까만 꽁보리밥에 한 줌 쌀을 넣어서 밥을 짓고 아버지만 한 그릇 달랑 떠들이던 그 옛날 말야."

"그래. 우리 아버지는 식사 때마다 그 하얀 쌀밥을 꼭 몇 수저를 남기셨는데 그 남기신 밥 한 수저가 어린 우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밥맛이었지?“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땐 몰랐는데 이젠 알 것 같다."

 

벼 익는 냄새를 맡으며 걷는 산책길에서 모처럼 만난 우리들은 다른 이야기 다 접어두고 구수한 냄새의 기억을 더듬어 먼 옛 이야기들을 끝없이 꺼내며 미산동 앞을 걸어 포동 송신소 쪽을 향해 걷는다.

 

    벼 알을 이고 있는 들판은 푸른 밥상이다.
벼 알을 이고 있는 들판은 푸른 밥상이다. ⓒ 이연옥

어두운 밤이라서 멀리 아파트며 호조벌 바깥 풍경들에서 비치는 불빛과 송신소에서 비치는 불빛만이 호조벌을 밝히는데 오히려 밝은 빛이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걷기엔 안성맞춤이다.

 

언젠가 같은 문학을 하는 동료가 '푸른 밥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시를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아. 어떻게 이 들판을 보며 그런 기막힌 발상을 떠올렸을까? 했지만 생각하면 지금 호조벌은 그 제목에 꼭 어울리는 푸른 밥상이었다.

 

우리들도 그 호조벌 한 쪽을 걸으며 그 밥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을 걸으며 그 밥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작가도 벼알 하나하나 이고 있는 들판을 푸른 밥상이라 부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난 이 호조벌을 걸으면 그 푸른 밥상이란 시가 자꾸 떠오른다.

 

  물알을 안고 영글고 있는 벼이삭
물알을 안고 영글고 있는 벼이삭 ⓒ 이연옥

한 친구가 하얀 쌀밥을 그리던 이야기를 한다.

 

"그 시절 친구를 찾아 서울에 갔을 때야. 친구가 상을 차려 내오는데 밥그릇을 보니 보리알라곤 한 알도 없는 몽탕 다 하얀 쌀밥이었어. 난 그 때까지 그렇게 하얀 쌀밥을 본적은 없거든. 그런데 눈처럼 하얀 쌀밥을 내놓은 거였어. 그 때 내 입안에 도는 매끈매끈하고 달콤했던 하얀 쌀밥의 기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그리고 그 때 그런 생각을 했어. 세상사람 모두가 그 까끌까끌한 보리밥만 먹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 그 때부터 나는 도시를 내 맘에 품고 살았지 뭐니. 결국은 이런 도시로 왔지만 말야. ㅎㅎ."

"그래. 까만 보리를 가마솥에 삶아놓고 매 끼니마다 삶아놓은 보리를 꺼내어 다시 밥을 지을 때 쌀 한 줌만 씻어서 보리쌀 속에 콕 박아서 밥을 했지. 아버지를 드리기 위한 쌀 한줌.ㅎㅎ?"

"도시에선 그 귀한 쌀 한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먹고 살더라고.ㅎㅎ"

 

         저녁볕에 눈부신 벼알들.
저녁볕에 눈부신 벼알들. ⓒ 이연옥

우리들의 보리밥과 쌀밥에 대한 기억은 끝이 없는데 벌써 한 시간 반 거리의 송신소를 돌아 다시 마을 앞까지 오고 있었다. 가을이 오는 밤 호조벌 산책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수한 벼 익는 냄새에 옛 시절 생각을 끝없이 불러내는 걸음들이었다. 호조벌 벼들도 우리들이 흘리던 웃음과 이야기에 밤새도록 자부심으로 흐뭇했으리라.

 

날이 밝자 시간을 내어 호조벌을 나갔다. 밝은 날의 호조벌은 이제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 누른 빛을 띄우기 시작하고 있다. 익어가는 벼이삭 위로 바람이 불어온다. 사방에서 구수한 벼 익는 냄새가 확 끼쳐온다. 마음이 혼미해져온다. 따뜻해져온다. 푸근해져 온다. 우리 한국인이 가장 푸근하게 느끼고 식욕을 동하게 하는 냄새가 호조벌에 가득하다.

 

    속내를 보이지 않고 저들끼리 수근 거리지만 곧 또록또록한 벼이삭이 되어 농민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줄 벼이삭들.
속내를 보이지 않고 저들끼리 수근 거리지만 곧 또록또록한 벼이삭이 되어 농민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줄 벼이삭들. ⓒ 이연옥

벼이삭에 렌즈를 가까이 대고 저물어가는 석양 빛에 비추어 셔터를 눌렀다. 익어가는 벼이삭의 속내까지 보고픈데 벼알은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대체 제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저 벼알 속에는 달디단 물알이 가득차서 또록또록 영글고 있는 걸 우린 다 알고 있다.

 

이렇게 벼알이 익어가고 있는 호조벌이다. 까만 보리밥 시절 하얀 쌀밥을 그리던 그 시절이 그리운 사람들은 지금 호조벌 산책을 나가면 아마도 우리 길마재 삼총사가 흘려대던 이야기를 또다시 흘리게 되리라. 벼 익는 냄새 진동하는 호조벌에서의 데이트. 이 가을에 아마도 호조벌은 아주 구수한 이야기들과 함께 황금벌판이 되리라.

덧붙이는 글 |  시흥시민 뉴스에도 게재합니다.


#호조벌# 벼 익는 냄새# 구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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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민뉴스에 기사를 20 건 올리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마이 뉴스에도 올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올렸던 기사는 사진과 함께 했던 아이들의 체험학습이야기와 사는 이야기. 문학란에 올리는 시 등입니다. 이런 것 외에도 올해는 농촌의 사계절 변화하는 이야기를 사진을 통해서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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