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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맛있다니까. 안 믿네. 냉라면 맛있어."

대학교 다닐 때 일본어과 학생회장을 하던 선배가 축제 때 자신들은 냉라면을 만들어 팔 것이라고 했다. 당시 난 '냉라면'이란 걸 처음 들어보았기에 처음엔 그냥 농담인줄 알았다. 그런데 축제 시작 후 일본어과에서 하는 상점에 들렀더니 진짜로 냉라면을 팔고 있는 게 아닌가. 그다지 맛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신기해서 한 번 사 먹어 보았다. 역시 생각보다 맛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 한동안 냉라면이라는 존재를 잊고 지냈다. 그러다 하루 식단을 어떻게 짤까 고민을 하던 중 한 요리 사이트에서 '냉라면'이란 단어와 재회하게 됐다. 이 요리, 저 요리 만드는 법을 봐도 쉬운 게 하나도 없었기에 혼자 사는 남자에게 가장 쉬운 요리인 라면이라는 단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허나 '물을 끓인다, 면과 스프를 넣는다, 기다린다'라는, 그야말로 간단하기 그지없는 라면 끓이기도 '냉'이라는 낱말 추가로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싶은 순간, 한 회원이 남긴 요리 자랑이라는 글이 보였다. 요리 사이트에 나온 요리법은 대부분 간단한 요리도 굉장히 복잡하게 설명되어 있는 반면, 요리 자랑이라는 코너에 올라온 글들은 정말 간단한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전문가와 전문가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질까 걱정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차이라고 보인다.

어쨌든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생긴 것이다. 잔뜩 기대를 품고 그 회원이 쓴 요리 비법을 읽어보았다.

냉라면 일반 라면보다 국물이 다소 맑아보이는 것이 특징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얼음은 이미 거의 다 녹아 버린 상태, 의외로 맛있다.
냉라면일반 라면보다 국물이 다소 맑아보이는 것이 특징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얼음은 이미 거의 다 녹아 버린 상태, 의외로 맛있다. ⓒ 양중모

1. 라면은 끓는 물에 넣고 꼬들꼬들하게 삶은 후 찬물에 헹군다.
2. 냄비에 물을 반 컵정도만 붓고 라면스프를 넣고 한소끔 끓인다.
3. 끓인 국물에 얼음을 왕창 넣고 차갑게 만든다.
4. 삶은 면을 넣어 골고루 저어 먹는다.

'끓인다, 넣는다, 기다린다'라는 그냥 라면을 끓일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보였다. 그래도 직접 해 보았으니 이런 글을 올렸겠지라며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그 아래 달린 다른 회원의 댓글에 잠시 심한 갈등을 해야 했다.

'조리법은 무지 쉬운데, 어떤 맛일까 궁금하면서도 걱정되는 것은 왜일까요?'

전문가들이 올린 방법보다 쉬운 것을 사실이나 어째 신뢰가 전혀 가지 않았다. 그래도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한다고 직접 냉라면 만들기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일단 라면을 준비했다. 중국에 있어 촛불 집회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촛불 집회 참석자들이 애용했던 라면이라도 쓰자는 심정으로 S사 라면을 이용했다.

일단 끓는 물에 라면을 삶고 찬 물에 헹궜다. 아, 잠깐 그런데 이거 뭔가 이상했다. 면을 먼저 삶고 찬물에 헹구어 놓으면 스프를 끓이는 동안 면발이 불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면을 다 삶아 버린 상태였다. 면을 찬물에 잘 헹구어 일단 다른 그릇에 모셔두었다.

냉라면 얼음을 넣자 마자 빠른 속도로 녹기 시작했다.
냉라면얼음을 넣자 마자 빠른 속도로 녹기 시작했다. ⓒ 양중모

그리고 이어 스프를 끓였다. 마지막으로 얼음을 넣었다. 불을 껐는데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면 국물에 얼음을 넣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요리법이기는 한 것일까. 얼음을 넣자마자 잠시 버티던 얼음들이 녹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 수가! 얼음이 녹아 버리면 어찌 찬맛을 내는 냉라면이 완성된단 말인가! 녹으면 안 된다고! 애타게 외쳐보았지만 얼음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다. 얼음을 '왕창' 넣어야 한다는데 이 '왕창'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아니,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왕창'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얼음을 얼마만큼 넣으라고 조언을 해주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얼음이 다 녹기 전에 재빨리 얼음을 세기 시작했다.

모두 15개! 다 세고 나서 흐뭇한 심정으로 뒤로 돌아서니 얼음을 얼리는 판이 보였다. 이런, 그 판에 몇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지만 그걸 세면 굳이 그렇게 다 녹기 전에 빨리 세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쓴 웃음을 지었으나 어쨌든 그보다 중요한 건 냉라면을 완성시키는 일이었다.

요리 비법을 쓴 사람이 차갑게 해둔다라고 했으니 분명 보다 긴 시간을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이겠지만, 왕창이 아닌 고작 15개의 얼음을 넣은 나로서는 얼마 남지 않은 얼음이라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드디어 얼음으로 푹(?) 식힌 라면 국물을 그릇에 담겨 있던 면과 만나게 해주었다. 만들고 보니 그럭저럭 그럴싸 해보이기는 했다. 물론 중요한 것은 맛이지만.

드디어 완성된 냉라면 한 젓가락을 살짝 집어 먹어 보았다. 이럴 수가! 생각보다 맛있었다. 면이 쫄깃쫄깃한 것이 씹는 맛이 있었다. 그렇다면 국물 맛은 어떨까? 비록 내가 만든 것이기는 했으나 국물을 입에 가져가 목으로 넘기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어쩐지 생전 처음 먹어보는 괴상한 맛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왕 만들었으니 살짝 맛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는가. 두 눈을 딱 감고 국물을 그릇째 들이켜 보았다.

"훕~"

어라? 의외로 괜찮았다. 원래 라면 국물이 얼큰하고 시원한 맛이라면 냉라면 국물 맛 역시 그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맛과 비슷했다. 굉장히 독특한 맛이었다. 결국 한 젓가락 먹기도 두려웠던 냉라면을 국물까지 남김없이 깨끗하게 먹었다. 역시 도전은 두렵지만, 성공하면 짜릿한 쾌감이 느껴진다. 이것은 요리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 아닐까.

이미 여름은 다 지나갔다. 그래도 여름의 끝자락이 어딘가에 걸려 있을 요즘, 더 늦기 전에 시원한 냉면이 아닌 냉라면 한 번 만들어 먹어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경제 위기설, 국제중 설립으로 인한 사교육비 증가 등 이런 저런 우울한 뉴스로 꽉 막혔던 가슴이 잠시라도 이 냉라면 먹고 시원해질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덧붙이는 글 | 아, 제가 상당히 배가 고픈 상태였다는 것도 참고하시기를^^



#냉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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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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