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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 글쓴이 : 서갑숙

- 펴낸곳 : 중앙 M&B (1999.10.15.)

 

 

겉그림 이 책은 왜 이런 책이름에 이런 겉사진에 저런 빨간 딱지를 붙여야 했을까요.
겉그림이 책은 왜 이런 책이름에 이런 겉사진에 저런 빨간 딱지를 붙여야 했을까요. ⓒ 최종규

우리 집에서 딸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옆지기 어머님이 찾아왔습니다. 아기가 궁금하고 당신 딸아이가 딸을 낳은 모습이 대견스러워서 몸풀이를 거들어 주려고 오셨습니다.

 

옆지기 어머님이 우리 집에 함께 머무는 동안, 낮 나절에 곧잘 책을 펼치시곤 했는데, 제 책꽂이에 꽂힌 책 가운데 서갑숙 님 책 <추파>를 읽으셨습니다.

 

.. 그래, 나약한 나의 젊음은 이렇게 간다. 이렇게 중얼거리는 내 곁에서 친구들도 각자의 삶에 절망한 듯 고개를 꺾고 앉아 있었다. 담배 연기가 새어나갔는지, 친구의 어머니가 방문을 두드렸다. “쯧쯧쯧, 벌써부터 이러면 되니?” 너저분해진 방을 보고 친구의 어머니는 혀를 찼다. 대학은 떨어졌고, 나는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국문학과를 지망했지만,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바꿨다. 어차피 짧게 살 목숨이라면, 연극을 통해 다양한 인생이나 경험해 보고 죽자는 생각이었다 ..  (29쪽)

 

벌써 퍽 여러 해가 된 일입니다. 책마을 선배한테 이끌려서 서울 인사동에 있는 ㅍ이라는 술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날 그곳에는 여러 손님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여러 손님들이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술잔도 주거니 받거니 했습니다.

 

서로 이름도 모르면서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 나중에 술값은 어찌할까 걱정스럽지만, 이런 걱정은 저 혼자뿐, 모두들 웃고 떠들며 어울립니다. 한참 술잔을 부딪히다가, 책마을 선배가 제 옆에 앉은 분이 서갑숙씨라고 소개해 줍니다. 처음에 따로 소개를 안 한 까닭은 최종규씨라면 으레 알겠거니 싶어서. 그러나 텔레비전 안 보는 제가 서갑숙씨를 어찌 알아보겠습니까. 원더걸스도 모르고 채연도 모르고 하는데.

 

.. 어쨌든 그런 폭력적인 경험들을 겪으며, 역시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사랑이라는 생각을 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진심어린 사랑이 없는 한, 그 어떤 섹스나 스킨십도 폭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45쪽)

 

이름을 알게 되며 조금 더 찬찬히 이야기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분이 저를 어찌 속깊이 알겠으며, 저 또한 그분을 어찌 속깊이 알랴마는, 그날 그 자리에서는 허물없이 술과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그렇게 만난 뒤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라는 책을 하나 찾아봅니다. 어느 헌책방에 가 보아도 여러 권씩 꽂혀 있는 이 책을, 꽂히기는 많이 꽂혀도 애써 끄집어내어 읽는 이 없는 이 책을.

 

‘18세 미만 구독금지’라는 빨간 띠가 둘러져 있는 이 책을 찬찬히 넘겨봅니다. 그날 그 술집에서 보고 느낀 서갑숙씨 외로움과 고단함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헤아려 봅니다.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보면서 사귀고 싶어하고, 사람을 사람 그대로 느끼면서 어우러지고 싶어하던 그 눈매를 곱씹어 봅니다. 사람 많은 세상이고, 사람 넘치는 서울이며, 사람 복닥이는 이 땅인데, 왜 서갑숙씨 여린 가슴에 사랑과 믿음이 고이 내려앉아 열매를 맺도록 어깨동무를 하려는 손길이 보이지 않을까 뒤돌아 봅니다.

 

.. “얼마나 남았어요? 아직 멀었나요?” 그러다 진통이 잦아지고 심해지자, 나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이리 좀 와 봐요!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런 내 곁을 냉랭한 태도로 지나치는 간호사가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몰랐다 … 간간이 잠이 깨어 눈을 떠 보면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고마워요.”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  (85∼86쪽)

 

비 퍼붓던 어제 아침, 인천으로 볼일 보러 가려고 부지런히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저는 2000번 빨간버스가 씨잉 빠르게 지나가며 거님길 안쪽 깊이까지 튀겨 주는 물보라를 흠씬 뒤집어씁니다. 저녁나절 일산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건널목 신호가 바뀌어 건너는데 아랑곳않고 제 앞으로 휭 지나가는 까만 자동차를 몰며 한손으로 손전화로 수다를 떠는 아줌마를 봅니다.

 

버스를 기다리다가 탈 때에는 마구 밀치기까지는 안 하지만 먼저 타려고 안달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버스에서는 둘레 사람이 시끄러워하거나 말거나 작지 않은 목소리로 “존나 씨발 짜증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내뱉으면서 자기 남자친구가 지저분하네 뭐네 하고 수다를 떠는 아가씨를 봅니다. 전철로 갈아탄 자리에서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있다가 내릴 때가 되어 가방을 영차 하며 메는데 내 뒤쪽으로 갑자기 지나가면서 가방을 툭 쳐서 미는 아저씨를 봅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꼭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분들 마음결이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이대로 살아도 당신들 먹고사는 데에는 아무 걱정이 없을지 모르겠는데, 이대로 살아가는 당신들 모습은 아름다움하고는 자꾸만 멀어지는구나 싶어 안타깝습니다.

 

..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동안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원치 않는 고통을 한탄하며 자기를 학대하고 비하해 왔기 때문이다. 나의 노화는 세월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노화에서 온 것이 틀림없다 … 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섹스에 대해 무지했던 것일까? 그저 상대방이 이끄는 대로 섬세한 교감 없이 치러내는 섹스, 소극적인 섹스만 나누다 보니 진정한 육체적 사랑이 찾아왔을 때 적응을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  (169쪽)

 

헌책방 책시렁에서 찬대접을 받는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한 권 장만해서 읽은 뒤, 헌책방 나들이를 할 때마다 이 책이 보이면 한 권씩 더 사 두게 됩니다. 가방에 한 권씩 넣고 다니면서, 만나는 이들한테 이 책을 아느냐고 물어 본 다음, 아직 안 읽었다고 하면 선물로 내밉니다.

 

이 책을 고맙게 받아들고 읽어 줄는지, 귀찮게 뭔 책이냐 할는지, 썩 재미도 없어 보이는 책을 왜 주느냐고 할는지, 얄딱구리한 책을 자기한테 선물하는 꿍꿍이가 뭐냐고 할는지 모릅니다만, 조용히 내밀고 조용히 서갑숙씨 이야기를 들려주고 조용히 우리가 걸어가는 삶과 가꾸는 삶을 짚어 보자고 말합니다.

 

.. 내가 그렇게 흥분했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한 개인의 삶이 구겨지든 찢어지든 상관않고 멋대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정말 싫었어. 돌아서서는 금세 잊어버릴 말들을, 남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까지 내뱉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  (212쪽)

 

<추파>를 읽은 옆지기 어머님은 어떤 느낌 어떤 마음 어떤 생각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옆지기 어머님한테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선물해 드리면 즐겁게 읽으실지, 그냥저냥 받아들이실지 궁금합니다.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즐겁게 읽어 주신 분이 있으면 <추파>도 선물해 주고 싶은데, 여태껏 스무 권 가까이 선물해 오는 동안, ‘읽은느낌’을 들려주는 분이 없습니다. 책이름만 보고 덮었을지, 머리말 몇 줄 읽다가 덮었을지, 책 몸글 몇 쪽이나마 읽다가 덮었을지, 아예 들여다보지 않고 덮었을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 한몸 먹고살기에도 바쁘고 빠듯한데, 서갑숙이든 누구든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껴안고 있는지 돌아볼 틈이 어디 있어?’ 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드시 서갑숙씨를 알라고 이 책을 건네지 않았습니다만. 구태여 서갑숙씨 삶이나 생각을 알라고 이 책을 내밀지 않았습니다만. 딱히 서갑숙씨 길을 돌아보라고 이 책을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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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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