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은 '정치와 종교에 관한 종교지도자 설문조사'라는 주목할 만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종자연은 지난 2004년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헌법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범종교·범시민 조직으로 결성된 종교정책 연구기관이다.
종자연이 불교·개신교·천주교의 주지스님, 담임목사, 본당 주임신부 3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특정 종교에 편향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역대 대통령은 김영삼(42.7%)-이승만(30.0%)-전두환(8.6%)-박정희(7.5%) 순으로 나타났다(표본오차는 95% 신뢰구간에 ±5.5%).
그런데 이를 종교별로 보면, 불교 응답자의 70.8%가 김영삼 전 대통령을 특정 종교에 편향적인 대통령으로 꼽은 반면에, 개신교 응답자의 경우 8.9%만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꼽았다. 오히려 개신교 응답자들의 절반(50.0%)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편향적인 대통령으로 꼽았다. 반면에 천주교 응답자의 절반(48.9%)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특정 종교에 편향적인 대통령으로 꼽았다.
종교 편향, 김영삼>이승만>전두환>박정희 순서울 충현교회 장로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통성이 부족했던 역대 정권과는 다른 차별성을 강조한 때문인지 자신의 신앙생활을 거침없이 드러내 특히 불교계에 위화감을 빚었다.
그는 청와대 안에서의 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국군 통수권자이면서도 공공연하게 국방부 청사 내의 국군 중앙교회에서 예배를 봤다. 김영삼 정부 들어 청와대 내의 불상이 치워졌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해방 직후 대대적인 대처승 사찰 정화에 나서 태고종 등 불교종단과 마찰을 빚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종교를 갖지 않았으나 불교신도인 부인(육영수)의 영향을 받아 친불교적 성향을 보였고 당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선 천주교 측과 갈등을 빚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불교 신자였지만 이른바 '10·27 법난'의 최종 명령권자였다. 지난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10·27법난 사건'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노태우 합수본부장과 전두환 대통령은 이른바 '불교계 정화추진방안'을 담은 '45계획'을 보고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불교 신자 대통령이 건국 이래 최대의 법난 사건을 일으킨 것은 역사의 역설이다. 하지만 이들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에 80년 이른바 3단계 사회정화계획을 추진하면서 '종교계 중 하나를 수사한다'는 계획을 세워 불교계를 희생양으로 삼았고, 이 때문에 이들은 집권후 상당 기간 불심 잡기에 공을 들여야 했다.
김영삼 장로 '편향기록' 갱신한 이명박 장로
그렇다면 현재를 기준으로 같은 조사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마도 서울 소망교회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록을 갱신할 것으로 보인다. 여러 지표들과 설문조사 결과가 이를 반증한다.
우선 <경향신문>(3일자)과 동아시아연구원(EAI)의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의 종교정책에 대해 전체 응답자의 58.9%가 '편향적'이라고 평가한 반면에 '편향적이지 않다'는 응답은 15.4%에 불과했다. 국민의 대다수가 '이명박 정부가 종교편향 행위를 하고 있다'는 불교계의 주장에 공감을 표시한 것이다.
또 한승수 총리 및 15개 부처 장·차관의 종교를 조사한 <한국일보> 2일자에 따르면, 전체 39명 중 기독교(개신교) 신자는 13명으로 33.3%를 차지한 반면 불교 신자는 2명(5.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천주교 신자는 9명으로 23.1%, 종교가 없는 사람은 15명(38.5%)이었다.
이에 비해 통계청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4704만여명 중 불교 신자가 22.8%, 기독교 18.3%, 천주교 10.9%, 원불교 0.3% 등의 순이었다. 일반 국민의 종교는 불교가 가장 많은데도 정책을 입안·집행하는 정부의 고위직에는 불교도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다.
이 대통령이 장·차관의 종교가 무엇인지까지 따져서 인선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개각 초기 '고소영 내각'이라는 비판에서 보듯, 불교계 입장에서는 불만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대통령은 이미 서울시장 시절부터 '서울시 봉헌' 등 수많은 종교 편향적인 발언으로 물의를 빚어왔다.
이렇다 보니 정치·사회적 갈등과 반목을 치유하는 기능을 가진 종교가 오히려 갈등과 반목을 증폭시키는 '종교간 균열'이 위험 수위에 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향신문-EAI 조사결과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개신교 신자는 45%가 잘하고 있다고 답한 반면, 불교 신자는 33.3%, 가톨릭 신자는 29%, 무종교는 26.2%만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 이명박 정부의 종교정책에 대해서는 불교 신자의 72%, 가톨릭 신자의 62%가 '편향적'이라고 본 반면 개신교 신자는 40%만이 '편향적'이라고 답변해 종교별로 정치·사회 현안에 대한 인식 차이가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불교·기독교·천주교 등 각계 종교인과 종교학자 등으로 구성된 '한국종교간대화학회'는 3일 "최근 불교계에서 잇따라 종교차별에 반발하는 등 종교간 갈등이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악의 위기상황에 놓여있다"고 평가하고 대책 마련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불상과 단군상 훼손 등으로 물밑에서는 종교간 갈등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종교간 갈등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된 적은 없었다는 것이 이 학술단체의 진단이다.
스님 경고했지만 이 대통령에겐 '쇠귀에 경읽기'이같은 '종교간 균열'의 원인 제공자는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부터 '서울시 봉헌' 발언 등으로 불교계의 깊은 우려를 샀으면서도 정부 출범 이후에도 여전히 불교계의 근심을 살 만한 언행을 계속해 왔다.
이른바 고소영 내각 등 정부 요직의 기독교 편중인사 논란(2월)을 시작으로, 김성이 장관 후보자의 '양극화는 신앙심이 부족한 탓'이라는 기고 논란 및 뉴라이트 김진홍 목사와 청와대 예배(3월), 청와대, 정무직공무원 종교조사 실시로 물의(4월), 이 대통령 조찬기도회 참석으로 '불교 홀대' 논란(5월), 국토해양부, '알고가' 교통정보에 교회·성당만 표기, 사찰 누락 및 '제4회 전국경찰복음화금식대성회' 광고 포스터에 어청수 경찰청장 사진 게재(6월) 등으로 이어졌다.
오죽했으면 서울 강남의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이 지난 6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종교색깔을 드러내지 않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극렬하게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면서 "불자들은 해방 이후 최악의 대통령을 만났다"고 일갈했을까 싶다.
이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은 이때 이미 명진 스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뒤에 벌어진 이명박 정부와 대통령의 언행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불교계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7월에는 경찰이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차량을 검문·검색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 지난 6월의 국토해양부 교통정보 누락 지적에도 불구하고 8월에는 교육과학기술부의 교육지리정보서비스 학교현황 서비스에 교회는 아이콘으로 상세히 표시된 반면에, 조계사와 봉은사 등 전통사찰과 대형사찰 정보가 누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모든 것이 이 대통령이 불교계를 고의로 자극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언행은 알게 모르게 혹은 '이심전심'으로 공직자들의 언행과 종교정책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최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범불교도대회'가 열린 다음날 보란 듯이 김진홍 목사 등 뉴라이트 회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함께 함으로써 오히려 불교계 민심을 자극했다.
불교계는 8월 27일 범불교도대회에서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어청수 경찰청장 파면 등 관련자 처벌 ▲공직자의 종교차별 근절을 위한 입법 조치 ▲촛불시위 수배자에 대한 수배 해제 등을 정부에 공개 요구해 놓은 상황이다.
불교계는 이어 "납득할 만한 정부의 답변이 없을 경우 추석 연휴 이후에 권역별 '범불교도대회'를 개최할 예정"임을 밝혔다. 이명박 정부의 지지기반인 대구·경북 지역을 시작으로 영남·호남·충청·제주·경기·강원 등으로 반(反)이명박 불심을 확산시켜 나가겠다는 것이다.
9일 생방송되는 이 대통령과 국민의 대화에서 이 대통령은 어떤 식으로건 불교계에 유감이나 사과를 표명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교계는 어청수 청장의 사퇴 없이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모든 종교는 보편적인 사랑의 메시지를 전파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의 거듭되는 평화 촉구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는 여전히 반목과 전쟁, 그리고 문명간의 대립으로 점철돼 왔다.
하물며 현재 조계사에는 소지(燒指) 공양을 넘어 소신(燒身) 공양까지 하려는 승려들이 줄을 서 있고, 지관 총무원장 스님도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분명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 대통령은 지금 역대 정부에서 누적된 지역과 계층간 분열을 가속화한 데 이어 자칫 '종교 분쟁'까지 초래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순간에 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