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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기륭비정규여성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 집행위원장이 9월 9일 서울역에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촛불문화제를 앞두고 한가위에도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바라는 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편집자주>
 김소연 분회장은 5일 현재 87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단식농성 65일째였던 지난달 14일 오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오른쪽)이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김소연 분회장은 5일 현재 87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단식농성 65일째였던 지난달 14일 오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오른쪽)이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 유성호

 

"한가위 전에 기륭·KTX·이랜드·성신여대·코스콤·GM대우·도루코·콜트콜텍·하이텍알시디코리아·재능교육·광주시청… 그 모든 비정규 노동자들을 일터로 보내줄 수 있다면. 890만 비정규노동자들에게도 눈물바람 없어도 되는 따사로운 한가위가 될 수 있다면."

 

4월,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기 전 나는 서울 구로동 디지털산업단지 후미진 골목 속 기륭전자에서 몇 사람들과 함께 비정규직 철폐의 촛불을 켜고 있었다. 처음엔 누구도 잘 주목하지 않는 작은 촛불이었다. 작을 땐 열 명이 채 안 되는 이들이 모여 멋쩍어하며 켰다.

 

며칠 후 광화문 촛불이 시작됐다. 처음엔 함부로 생각하고 재단했지만, 하루 나갔을 때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반성했다. 그 때부터 구로동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난 밤 10시경이면 늦더라도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 때부터 시작해 나도 광화문 네거리를 밤새 떠돌다 먼동이 터오를 때면 다시 돌아왔다. 때로는 해산이 끝나고도 미련이 남아 프레스센터 앞 노상에 앉아있다 돌아오기도 했다. 잠시 눈붙이고 다시 기륭으로 향했다. 그렇게 2008년 봄과 여름이 가고 가을 초입이 되었다.

 

구로와 광화문을 오간 나의 촛불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라고 늘 표현하는데, 정말 어쩌다보니 '기륭비정규여성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의 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기륭여성노동자 투쟁 1000일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3월 말부터 공대위를 꾸리는 작업부터 주도적으로 함께 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절반은 기륭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과 한 몸이 되어 버렸다. 5월 11일 하이 페스티벌 마지막 행사가 열리는 시청 앞 광장 조명탑에 그들이 오를 때, 5월 26일 다시 구로역 CC카메라탑을 오를 때, 다시 6월 11일 공장 옥상을 점거하고 전원 무기한 끝장단식을 들어갈 때, 그리곤 이제 단식 80여일이 된 지금까지. 기륭 동지들과 한 몸이 되어, 편파적으로 움직였다. 기륭 동지들을 닮아 시시때때로 눈물 나던 날들이었다.

 

비정규 투쟁은 쉽지 않았다. 특히 기륭 투쟁은 3중고·4중고의 투쟁이었다. 불법파견 판정을 받고도 부당해고 당했지만 대법에서 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법외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3년여를 지나오며 사측은 대부분 라인을 중국으로 이전해 버렸다. 고용을 받아줄 공장이 없다는 얘기 앞에 우리 쪽 사람들도 오히려 수긍하는 쪽이었다. 더더욱 지금의 최동렬 회장은 "기륭을 인수한 지 6개월도 안 되는데 왜 나에게 모두 책임지라고 하냐"고 했다. 타당한 이야기일 수 있다고 우리 쪽 사람들도 눈치를 살폈다.

 

거기다 남은 조합원들도 생계에 나가 있는 사람들을 빼면 10명이 전부였다. 위로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인 투쟁이었다.

 

하지만 기륭 여성 비정규직 동지들은 최선을 다했다. 딱 하나 빼놨던 '죽음을 거는 투쟁'까지를 선택했다. 그 완강함과 진정성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들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2008년 상반기 비정규투쟁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몇명이 외롭게 지켜왔던 농성장엔 이제 나도 모르는 얼굴들이 태반이다. '대학생 릴레이단식단'이 들어와 움직인다. 10개 단체나 모임들이 주도해서 스스로 '기륭을 사랑하는 네티즌연대'를 만들고 독자적으로 사업들을 만들어간다.

 

근자엔 기륭의 주 거래사인 미국 시리우스사 공략을 위한 '원정투쟁단 보내기 모금사업'을 펼치고 있다. <뉴욕타임즈> 지에 1억짜리 광고를 네티즌 모금을 통해 달성해 보겠다고 한다. 가히 제2의 기륭 공대위가 되고 있다. 광화문 촛불 96차와 103차, 그리고 105차 촛불문화제가 기륭 공장 앞에서 열렸다.

 

그러다 보니 근래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기륭이 광화문 촛불과 만나게 되었는지를 묻는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어떻게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네티즌들과 연대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광화문에 촛불 하나 밝히기까지

 

기실 광화문 촛불은 그간 민중민주 운동을 해왔던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은 투쟁이었다.

 

전혀 의외의 조직 경로와 여타 전투적 운동들을 넘어서는 완강함, 모두가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운동, 지도부가 없는 상태에서도 창조적으로 자기를 생성해 가는 새로운 자율적 운동.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평범한 촛불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지가 관건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광화문 촛불운동을 처음에 시작했던 사람들을 만나자 의문이 풀렸다. 우연히 4월 말 처음 오프라인 집회를 기획했던 네티즌들을 만났다.

 

촛불이 튀어나온 것은 4월 말이었지만, 나름 지난한 준비가 있었다. 처음 아고라 토론방을 중심으로 광우병 소와 관련한 문제 제기를 꾸준히 올리는 이들이 있었다. 금세 여론이 형성되었다. 광우병 문제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민주주의와 관련한 문제 제기였다.

 

오프라인에서 갈 곳을 딱히 찾지 못한 수많은 민주 시민들이 토론과 소통에 참여했다. 자연스레 카페 모임들이 제안됐고, 네댓 개의 소통 카페들이 조직되었다. 네티즌들은 이 카페 공간을 통해 다양한 자체 학습과 공동 행동들을 실험했다. 리플 달기부터, 사이버 리본달기 등등.

 

어느 정도 조직력이 형성되자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동호회 카페들 조직에 들어갔다. 목적의식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결집해 있는 생활 관련 카페들에 접근해 갔다. 유명한 패션카페, 음식카페, 유 명연예인 팬카페들이었다. 그 곳에서 읽을 만한 글들을 꾸준히 올리며, 베스트만들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과 함께 다시 초보적인 수준부터 사이버 공동행동을 실험· 조직해 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일상에서 관계와 생동하는 삶을 느낄 수 없었던 수많은 이들이 밥상머리에서조차 죽음을 느껴야 한다는 현실에 분노했다. 수위가 점점 높아져 위력적인 사이버행동들이 진행되었다.

 

이제 거리로 나설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날짜를 정하고, 전체 카페들에 공지를 올렸다. 4월 26일, 광화문에서 만납시다. 조직 확인을 해보니 1만에서 3만이 확인되었다. 누가 주역이 아니었다. 모두가 놀라면서 2008년 광화문 촛불이 시작되었다.

 

모든 새로운 운동은 물론 정세가 밑바탕이 되겠지만 의외의 정성과 노력, 믿음과 꿈에 의해 실현된다. 사이버라고 무슨 신화적 관계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일상의 연장일 뿐이다. 사이버 영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소통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편지를 통해 오가듯 오갈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도 유령이 아닌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 만나고자 하면 만나질 수 있다는 믿음. 우리 모두는 평범하다는 사실. 결핍이 그리움과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존중을 연다는 믿음을 가졌다. 서로 외롭고 소외된 존재들이라는 사실. 그런 소외된 현실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 소외되지 않는 만남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지난달 11일 광화문의 촛불이 기륭의 촛불과 만났다
지난달 11일 광화문의 촛불이 기륭의 촛불과 만났다 ⓒ 박영신

 

비정규 투쟁은 2중 3중으로 소외된 투쟁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이들의 연대와 힘이 필요했다. 그 간절함이 촛불 네티즌들을 만날 수 있게 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어디로도 갈 곳이 없고, 가고 싶은 곳이 없는 뿌리뽑힌 마음으로 새벽을 맞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간절함은 기륭여성비정규직들이 고공에서, 공장 앞에서 1100일씩 노숙하며 가져온 외로움과 간절함과 같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용적으로도 같다. 둘 다 일부 자본들의 초과 착취를 위해 기획된 일이다. 그래서 촛불이 막 시작되던 5월 11일, 서울시청 광장 조명탑에 올랐을 때 허공에 내걸은 플래카드에도 그렇게 썼다.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하라"

 

그 때부터 우린 광우병 촛불과 비정규직 촛불의 만남을 염원했다. 2차 고공농성 당시 구로역 광장에서 자연스런 지역 촛불을 켜들었다. 7월 초 아예 '1040인 동조단식단'을 조직해 시청 광장으로 나아가 청와대로 진격하는 희한한 선도투쟁을 결행했다.

 

우리가 광화문으로 나선 수많은 촛불소녀·촛불시민들을 함께 동지로 삼고 도울 수 있는 길은 "촛불들의 배후에는 비정규직 투쟁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었다. 6월 촛불의 배후에서 7·8·9노동자 대투쟁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물론 준비는 충분치 않았지만 기륭 동지들과 기륭 공대위는 끊임없이 그런 입장과 의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광화문 투쟁만큼이나 절박하고 끈질기며 완강하게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언젠가 광화문 촛불들이 운동권들 탓에 동력을 잃고 실망하며 갈 곳을 잃을 때 올 수 있도록 만드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 씁쓸한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자연스레 그런 마음이 한편에 남는 것은 이 시대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여하튼 광화문 촛불도 시들해지고 기륭 투쟁도 어려워지던 때, 우리는 이제 활력과 분노를 잃지 않는 광범위한 촛불들과 수평적으로 만나 가자는 기조를 택했다. 그리고 시도했다.

 

이미 네티즌들도 기륭을 알고 있었다. 미안했다고 한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거대한 촛불이 연일 타오를 때는 듣는 시늉도 않던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에서도 요청을 받아주었다. 96차 촛불과 103차 촛불, 105차 촛불이 구로동 조그마한 공단 골목 안에서 지펴졌다. 더 이상 많은 수도 아니었다. 갈 곳을 잃어버린 촛불들이 조금씩 모여들었다. "기륭이 아니었으면 오늘 평일 촛불이 꺼졌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마음 서늘했다.

 

마지막 촛불을 지키는 이들은 두 부류였다. 마음이 강건한 숨은 일꾼들이거나, 정말 갈 곳 없는 이들이었다.

 

기쁘게 기륭에서는 이 두 부류의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껏 여러 도움들과 나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남지 않은 광화문 촛불의 마지막 지킴이들이었다. 가슴아픈 건 후자의 분들이었다. 수많은 운동 과정에서, 얼굴은 다르지만 성정은 말할 수 없이 착한 그들을 많이 보아왔다. 의식과 생활의 간극 사이에서 안주하는 삶을 잃어버린 수많은 이들.

 

말하자면 허세욱 열사 같은 분들이었다. 그보다도 어렵고 외로운 삶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KBS 앞에서의 노숙도 힘들어졌을 때 이 분들이 여러 분 기륭 농성천막에서 며칠을 기거하기도 했다. 아무도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하는 분들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농성장 앞 밥집 아주머니에게 얘기해 두었다. 누구든 식사를 달라고 하면 묻지 마시고 밥을 내주시고 수량만 적어놔 달라고. 그게 우리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2라운드가 시작되고 있다

 

이런 네티즌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기륭 투쟁의 전기를 맞기도 했다. 그들이 조금씩 기륭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사이버 상에서 움직여주는 힘이, 그간 여러 언론들에서 조금씩 기륭 문제를 다루어주었던 것보다 훨씬 큰 힘을 주었다.

 

그들은 기륭 문제를 국내만이 아니라 국제적 투쟁으로 만들어 주었다. 기륭의 주 거래사인 미국의 시리우스사에 대한 항의메일, 자발적 릴레이 동조단식 등은 그간 기륭 투쟁이 사측과 사회를 향해 했던 도덕·사회·정치적 타격을 넘어 자본 타격의 실마리를 풀어 주었다.

 

그 분들은 광화문의 상징들을 기륭으로 불러주기도 했다. 아프리카TV가 자발적으로 들어와 나흘간에 걸쳐 기륭 농성장에 상주하며 동지들의 일상을 네티즌들에게 송출해 주었다. 네티즌들을 따라 컬라TV가 들어오고, 촛불다방이 들어오고, 다인이아빠 차가 들어왔다. 며칠 전에는 80그릇의 삼계탕을 끓여주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 분들이 기륭 농성장의 주인이 되었다. 명색이 집행위원장이라지만 사실 몇 분 빼놓고는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광화문 촛불 대열에서 그랬듯이, 나도 그냥 기륭 농성장을 찾은 한 사람일 뿐이었다.

 

누구도 그들을 통제하려 하거나, 지도하려 하거나, 질서 지우려 하거나 지휘하려 하거나 통계 내려 하지 않았다. 작은 대추리처럼, 작은 광화문처럼 늘 농성장은 편했고, 모두가 주체였다.

 

물론 기륭에서의 경험은 작은 실험일 뿐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시도일 뿐일 수도 있다. 이런 시도들과 실험, 새로운 만남들이 곳곳에서 진행 중임도 알고, 그렇게 이어져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정형화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고, 만남이고, 투쟁일 뿐이다. 투쟁이 이어져 나간다면, 이런 만남은 지속될 것이다. 투쟁이 사그라지면 만남도 사그라질 것이다. 그리고 사그라져도 좋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믿음이며, 삶일 뿐이다. 삶이 있다면 만나질 것이고, 삶이 없다면 쓸쓸해질 것이다. 그냥 이렇게 무턱대고 시적으로 말해 버리고 말고 싶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투쟁이라고. 만날 박 터지며 소리 지르며 싸우기만 하는 투쟁만이 아니라, 이 부정한 구조와 체재와 제도를 넘어서는 꿈을 꾸는 운동이라고.

 

 지난달 14일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이 단식농성중인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 농성 천막 앞에 '근조'라고 쓰인 관이 놓여있다.
지난달 14일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이 단식농성중인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 농성 천막 앞에 '근조'라고 쓰인 관이 놓여있다. ⓒ 유성호

며칠 전 회의에서 기륭공대위는 기륭 단사 문제를 넘어 비정규직을 만들고 은폐하며 양산하는 이 사회 구조 자체를 문제 삼는 투쟁으로 나아가자는 결정을 내리고,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만인 선언, 만인 행동'에 모두가 힘 모아 나서자고 결의했다.

 

제 2의 촛불을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통해 만들어 보자고 얘길 하고 있다. 촛불 시민들에게 함께 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다시 노래하자고, 그 선봉에 890만 비정규직들과 이 시대의 양심들이 함께 떨쳐 일어서자고 호소하고 있다.

 

이 모든 게 꿈일 수 있다. 하지만 꿈은 꾸는 순간, 그만큼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꾸지 않으면 실현 가능성 0%이지만, 꾸는 순간만큼은 100%의 고밀도다. 그 밀도가 새로운 현실을 만들 수도 있다.

 

2008년 촛불로 나섰던 수많은 이들을 유령으로 만들고, 신화화·우상화시킬 필요 없다.

 

그들도 890만 비정규세상이 싫어서 나왔던 것이다. 일상이 죽음으로 점철되는 신자유주의 세상이 싫어 나왔던 것이다.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나왔던 것이다. 견결한 이들을 만나고 싶어 나왔던 것이다. 반성하며 나왔던 것이다. 정말 헌신적이고 살아있는 운동이 있다면 그 운동에 함께 하고 싶다고 그렇게 목청껏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쳤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싸우고 있다

 

자, 이제 공안탄압과 후퇴해버린 사회운동들에 실망해 실의에 빠진 '위대한 촛불'들에게 누군가 말들을 걸어 갈 때다. 우리 서로에게 말들을 걸어갈 때다.

 

운동이 폭발할 때 그 파도 위에서 파도타기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정세를 타고 올라 앉아 묘수를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새로운 정세,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운동의 계기, 지점을 만들어가는 운동을 안 보이는 곳에서부터 끌어올려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야 한다.

 

87년 6월 21주년을 얘기하는 목소리는 그렇게 많은데, 왜 87년 7·8·9를 만들자는 목소리들은 소수인가? 왜 6월의 이데올로기에 7·8·9가 밀리는가. 왜 소수 정규 세상에 다수 비정규 아픔들이 밀리는가?

 

명백한 객관 사실보다 꿈을 더 이야기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엄혹하고 폭력적이며 부조리한 세상이라면 있는 객관에 대한 쓸데없는 재단과 평가, 인정보다는 그 시간에 신기루 같을지라도 더 많은 새로운 꿈이나 꾸며 살고 싶다. 차라리 실패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조금은 더 양심적인 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것을 버리는 게 실패는 아니라는 것쯤이냐 모두가 알겠지. 타협하지 않고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길과 대지가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다.

 

이제 모두가 떨쳐 일어서고 있다. 제2라운드가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이명박과 한나라당, 그렇다면 지난 시기 노무현당과는 안 싸우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누구와 어떤 정신으로 싸워나갈 것인가? 우리는 우리와 싸운다. 나는 나와 싸운다. 소심한 나와.

 

이명박 대통령에게 부탁한다. 제발 9월 9일 서울역 앞에서 890만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나서는 우리를 쥐 잡듯 잡아다오. 제발 한번만 더 우리의 동지, 우리의 배후가 되어다오.

 

참, 기륭 김소연 분회장 단식이 오늘(5일)로 87일째다. 응급처치로 링거를 가끔씩 맞으니 단식이 아니란다. 시시때때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 바보야. 정말 죽으라는 소리인지. 참 무감하다. 이 사회가.


#비정규직#기륭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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