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당초 내겐 휴학중 계획이란 게 있었다. 실행에 옮기지 못해 그저 꿈으로 끝난 계획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내용은 꽤나 멋졌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과도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계획이란 바로 영국 유학이었다.
사실, 휴학생들에게 유학은 하나의 관례였다.(휴학→유학→졸업=취업)은 휴학생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공식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성공을 꿈꾸는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해외 유학러시를 이루고 있다. 내 친구였던 K·L·Y도 얼마전 각각 영국·일본·중국으로 떠났다. 그렇기에 나도 그에 맞춰서 유학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휴학생의 꿈은 영국! 현실은 방콕!계획은 환상적이었다. 우선 학교를 휴학하고 영국으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맨체스터 근방의 어느 소도시에 작은 방을 얻고 유유자적 공부를 하면서 영국 축구도 즐기려 했다. 영어 실력과 취미생활. 일석이조를 다 얻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꿈같은 휴학생활이 나의 장밋빛 미래라고 믿었다.
그런데 오마이갓. 정작 나의 휴학계획은 꽃도 피지 못한 채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영국을 꿈꿨던 한 젊음이의 꿈은 그저 방콕(방에 콕박혀 있는 것)에 불과했다. 꿈이 틀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경제 사정상 도저히 영국에 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유학비용. 적어도 2000-3000만원은 잡아야 하는데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교직에서 퇴직하시고 환율은 미친 듯 올라 여러 모로 근검절약을 지표로 삼아야 할 때가 도래했다. 물론 어머니는 다녀오라고 말씀하시지만 아무리 철없는 나라도 그 정도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암흑기(?)에 유학을 가는 것은 왠지 내 욕심만 차리는 것 같았다.
"엄마. 어차피 가봤자 프리미어리그만 보다가 왔을 거예요. 차라리 여기서 공부하는 게 낫죠. 외화낭비 하면 뭐해요!"광 축구팬인 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어설픈 변명, 하지만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신다. 나는 다행이다 생각하고 웃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저린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넌 일본 가니? 난 방콕 간다
이렇듯 현실은 바람과는 정반대로 돌아간다. 때론 다친 상처를 덧내기도 한다.
얼마전 따르릉. 대학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성규였다.
그런데 휴대폰으로 들려온 말이 뜻밖이다. 성규는 9월 말에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고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기 전에 한번 보자고 한다. 그런데 왜일까? 다른때 같으면 냅다 약속을 잡았을 텐데 이번엔 조금 고민이 되었다. 유학 못간 상처가 덧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친구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성규의 일본 출국을 이주정도 앞두고 삼인방(나, 성규, 현우형)이 모여 일종의 환송파티를 열었다. 출국이란 소리에 마음이 조금은 아리다. 아마 내 유학계획이 취소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규는 뜨끔한 말을 쏟아낸다.
"아, 진성아! 너 영국 유학은 언제 가는 거야?""나, 못가.(ㅠ.ㅠ) 집안 사정도 그렇고, 환율도 미쳤고 (ㅡ.ㅡ)!"문득 영국 갈 것이라고 이리 저리 자랑질(?) 작렬했던 내 과거가 생각났다. 친구들이고, 아는 지인이고 대부분 곧 내가 유학을 떠날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미 영국행이 결정된 유학파 친구들은 "넌, 언제 가는 거야?"라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때 대충 얼버무리는 심정은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아…. 그렇구나. 진성아. 뭐, 사실은 나도 유학 고민고민하다가 워킹 홀리데이로 가는 거야!"그런데 이런 경제적 고민이 나만의 문제는 아닌 모양이다. 일본으로 유학가는 성규는 한가지 놀라운 말을 전해준다. 알고보니 성규의 유학은 그냥 연수가 아닌, 1년 동안 워킹홀리데이로 가는 것이었다. 워킹홀리데이란 일을 해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즉 자급자족 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스스로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한다는 친구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성규의 선택은 내게도 희망적으로 들렸다. 다시 유학을 계획해볼까란 생각이 머릿속에 새록새록 피어났다.
"와, 그럼 일본에서 거의 공짜로 공부하고 오는 거네? 휴, 나도 워킹이나 할까?"겉으론 웃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갑작스러웠지만 문득 나도 해볼까? 하는 마음이 은근히 들었다.
"그런데….""응, 뭔데?"약간의 희망을 가지면 던진 내 물음에 친구가 뜸을 들이다 말한다.
"그런데 말야. 집값이 좀 비싸. 동생이랑 같이 가는데 약 1300만 원 정도 들것 같아. 위치가 도쿄라서 더 그런 것 같아""으악. 1300만원? 미친 것 아니야?"차라리 안 듣는 게 나았을 그말. 세상에 1년치 방을 얻는데 무려 1300만 원이나 든다고 한다. 나는 깜짝 놀라 투덜거리듯 말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방값이 200만원 정도였는데 무려 6배가 넘는 것이다.
"세상에, 뭐야. 그럼 결국 일해도. 유학비용이 1300만원 넘게 드는 거잖아, 뭐.""응, 그렇지 뭐. 나도 부모님한테 미안해 죽겠어."결국 기분좋게 시작했던 성규의 유학 환송회는 '푸념 작렬 유학 한탄회'로 바뀌어 버렸다. 기분좋게 칵테일을 먹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칵테일이 코로 넘어갔는지, 귀로 넘어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일본 유학을 앞둔 성규는 지금 경제 문제를 비롯한 여러가지 고민이 많았다. 생각해 보면 비단 성규뿐이랴, 유학을 꿈꾸는 휴학생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서 겉으론 웃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웃는 게 웃는 게 아닐 것이다.
성규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유학을 못가는 것도 문제지만, 가는 것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고 말이다. 수천만에 달하는 유학 경비는 결코 만만치 않은 금액이니까 말이다.
유학 못 간 방콕족으로 살아남기바야흐로 돈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사회라는 것을 실감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돈도없고 빽도없이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이, 유학 안 가고 언어천재가 됐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시대인지를 알 것 같다. 소위 투자한 대로 견적이 매겨지는 시대 아닌가.
그 씁쓸한 논리는 휴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돈의 액수로 휴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돈이 많다면 유학을 할 수 있고 뭐 조금 모자라다면 워킹 홀리데이나 단기 연수를 통해 공부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만약 돈이 아예 없다면 어찌하나? 그것은 답이 딱 하나뿐이 없다. 그저 방콕족으로 살아가야 한다. (방에 콕 쳐박혀 있다고 붙여진, 이름만 들어도 참 암울한 방콕족!)
내 현실은 방콕족이다. 한때 영국유학이란 일장춘몽을 꿨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황은 영어책과 시사용어책을 철근같이 씹어먹으며, 방에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국내파(?) 휴학생일 뿐이다. 그렇기에 부단히 노력해서 생존해야 할 것 같다. 빙하기가 도래한 듯한 방 한 구석에서 차디찬 화석으로 남지 않으려면 말이다
빙하기를 보내고 있는 방콕족의 미래에는 과연 꽃피는 봄이 올까? 돈의 액수로 희망사항이 결정되는 사회라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믿고 있다. 작은 좌절을 이기면 반드시 더 큰 희망이 자리잡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땀방울은 '유학'보다 더 중요한 성공의 보증수표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 뜨거운 열정이 우리 방콕족들의 꿈을 이뤄줄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어느 CF의 '되고송'처럼 부정보다는 긍정으로 휴학 생활을 보내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까짓 것 영국에 직접 못 가도 블러그 통해 체험하면 되고, 프리미어리그 관람 못하도 TV 통해 보면 되고, 유학 못 가도 방콕족으로 성공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좀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