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웬조리에서의 세 번째 아침 해가 밝았다. 오지탐사대원들은 전날 밤 대원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바람에 잠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출발 시각을 늦출 수는 없었다. 제시간에 엘레나(Elena) 산장(4430m)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어둠이 깔린 위험한 산에서 대원들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진흙길, 바위, 그리고 고소 증세와의 사투를 벌이다
이번에는 진흙길과 더불어 축축한 바위가 대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원들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 바위를 올랐는데, 물 때문에 매우 미끄러웠다. 차라리 넘어진다면 바위보다는 진흙탕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걱정했던 바대로, 점점 고도가 높아지면서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걷는데 땀이 많이 흐를 뿐이었지만, 이제는 숨을 고르기도 쉽지 않았다. 산소가 부족하다보니 몸이 금세 지치기도 했다. 일부 대원들은 약간의 두통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원들은 물을 마시며 고소 증세와 힘겨운 사투를 벌였다.
다행히도 산행 5시간 후, 대원들 모두가 커다란 바위를 수차례 넘어서 무사히 엘레나 산장에 도착했다. 4000m가 넘는 높은 곳답게 엘레나 산장은 바위에 불안하게 지어져 있었다. 다른 바위에 지어진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는 바윗골에 놓여 있는 사다리를 오르내려야 했다.
게다가 산장 내부는 다른 산장보다 상당히 좁은 편이었다. 방 두 칸으로 이뤄진 산장 안에는 침대가 아닌 매트리스가 있었는데, 방 한 칸에 8개 정도를 깔고 나면 더 이상의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방 두 칸을 대원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원들은 자리 부족으로 불편을 겪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발고도 4000m에서 보는 산 속의 경치는 크고 웅장했다. 산장 아래로는 하얀 구름이 깔려 있었는데, 그 아래로 산봉우리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산 앞에서 한없이 경건해진다는 이야기는 이럴 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산장 위로는 다음 날 우리가 올라야 할 마르게리타(Margherita) 봉(5109m)의 만년설이 보였다. 봉우리는 엘레나 산장이 있는 곳과 약 700m의 차이가 났는데, 그곳까지 가는 길이 왠지 내 눈에는 까마득하게만 보였다.
대장님은 대원들에게, 다음 날 마르게리타 봉을 올랐다가 키탄다라(Kitandara) 산장(4023m)으로 내려간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하루 만에 그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 때 ‘까르페디엠’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걱정은 내일로 미루고, 지금의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걱정하고 불안해하기에는 산의 전경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고도 4430m에서 흥겨운 춤을!
엘레나 산장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진철 오빠가 바깥으로 대원들을 불러내었다. 같이 춤을 추자는 것이었다. 갑자기 여기서 웬 춤? 정말 의아하고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꾸만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결국 고소 증세가 있었던 일부 대원들을 남겨두고, 나머지 대원들이 밖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가보니, 산장 옆 바위에서는 가이드들과 포터들이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높은 곳에서 라디오가 나온다니.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이윽고 라디오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간다 시내에서 흘러나오던 강한 비트의 노래였다. 가이드들과 포터들이 하나둘씩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대원들도 널따란 바위 무대에 올라가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몸치인 나는 한동안 망설였다. 나가서 춤을 추려니 왠지 부끄러웠다. 하지만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바위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즐겁게 환영해 주었다. 부끄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 바위 위는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춤을 잘 추든, 못 추든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춤을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어느덧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음악과 함께 끊임없는 웃음소리와 아우성이 산속으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열정의 무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원들은 얼마 뒤 무리한 운동으로 고소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둘씩 바위 위에 벌러덩 누워버리고 말았다. 힘이 부친 나도 바위 위로 맥없이 쓰러졌다. 빈혈에 걸린 것처럼 머릿속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가이드는 달랐다. 모든 사람이 해산한 뒤에도, 가이드인 가브리엘(Gabriel)은 혼자서 라디오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의 춤사위는 곧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처럼 자유롭고 가벼웠다. 구름보다 더 높은 바위에서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은, 마치 풍류를 즐기는 장난기 가득한 신선 같기도 했다.
산 속이 적막하고 고요한 가운데 오직 라디오 음악만이 무거운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나는 바위 위에 앉아 한 폭의 그림 같은 가브리엘의 춤과 산의 경치를 감상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식물 외에는 어떤 생명체도 발견하지 못한 그곳에서, 가브리엘은 우리에게 활기찬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생명력은 지친 대원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대원들, 르웬조리판 '러브 액츄얼리'를 찍다
한편, 산장 뒤로 몇몇 대원들이 스케치북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도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언가 재밌는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 현호 오빠와 정태 오빠가 감동적인 이벤트를 마련하는 중이었다. 정태 오빠가 든 스케치북에는 여자 친구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구름이 보이는 산을 풍경삼아, 대원들은 르웬조리판 '러브 액츄얼리'를 재현하고 있었다. 아주 기발하고 로맨틱한 아이디어였다. 이런 프러포즈라면 짝사랑도, 헤어진 연인도 감동시킬 것 같았다.
어쨌든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 나오는 명장면처럼, 대원들은 순서대로 메시지가 담긴 스케치북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나도 그 자리에 빠질 수 없었다. 그래서 남자친구와 18박19일간 한국에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스케치북을 들었다. 사람들 앞에서 프러포즈를 사진으로 찍으려니 여간 쑥스러운 것이 아니었지만, 남자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니 다시 한 번 용기가 났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커다란 눈덩이가 날아왔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진철 오빠와 대하 오빠가 눈을 뭉쳐 우리를 향해 던지고 있었다. 솔로들의 질투 섞인 선전포고였다. 이렇게 해서 바윗골을 사이에 두고 커플들과 솔로들의 눈싸움 대결이 펼쳐졌다. 커플 대표로는 정태 오빠와 현호 오빠가 솔로들을 향해 눈을 던졌다.
하지만 추운 날씨와 시린 손 때문에 눈싸움은 곧 끝이 났다. 결국 이렇게 해서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지만, 로맨틱한 '러브 액츄얼리'는 난데없는 공격으로 인해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래도 이미 찍어둔 사진은 무사하게 한국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사진을 본 남자친구의 반응은,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다.
정상공격 D-1. 마르게리타, 내가 간다!
곧 전기가 없는 르웬조리에는 또 다시 어둠이 깔렸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정상에 들고 갈 물건들과 정상에 다녀오는 동안 산장에 두고 갈 물건들을 분류했다. 여태까지 짐처럼 들고만 다녔던 아이젠과 바라클라바가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오지탐사대원들은 평상시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정상 공격을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게 잠이 들지는 못했다. 평소보다 취침 시간이 빨랐기 때문인지, 고소 증세 때문인지, 마음이 설레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매일 말로만 언급하던 정상을 다음 날이면 오르게 된다니 가슴이 매우 두근두근하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정상을 오르는데 특별한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산을 오르면서 충분히 많은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마르게리타 봉에 가면 여태껏 디뎌보지 못한 만년설과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 것이었다. 그리고 정상까지 이어지는 만년설과 암벽 구간이 르웬조리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라고 했다. 즉, 나는 르웬조리를 오르면서 끊임없이 더 새로운 것, 그리고 더 힘든 도전을 갈망했던 것이었다.
마르게리타 봉은 분명 내게 있어 최고의 도전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기회를 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행복한 마음으로 침낭 속에 누워 있자니 엘레나 산장에 오기까지 함께 시험을 치르고 함께 산을 올랐던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 내게 큰 격려가 되 준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사람들은 결국 안타깝게 오지탐사대원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 대신 이곳에 와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 그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 정상에 올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산장 위 마르게리타 봉을 향해 마음 속으로 크게 외쳤다. 아마 마르게리타는 들었을 것이다.
'마르게리타, 기다려라! 나 이지수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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