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 회담이 위기에 봉착했다. 북한이 8월 26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핵시설 불능화 작업을 중단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나아가 영변 핵시설의 원상복구를 고려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9월 3일에는 일부 미국 언론에서 북이 영변 핵시설 복구 작업을 개시했다고까지 보도했으나, 다음날 아직 북이 핵시설 복구에 착수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미 국무부는 밝혔다. 그러나 남측 정부는 반대로 북이 핵시설 복구에 착수한 것으로 파악하고 북측에 유감 의사를 표명했다. 현재로서는 당분간 6자 회담이 교착상태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꼬이기 시작한 10·3 합의
북과 미국은 작년 10월 3일, 북이 2007년 말까지 북핵 프로그램에 대해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를 하면 미국이 이에 상응하여 올해 8월 11일까지 북에 대한 적성국 교역법 적용과 테러지원국 지정을 철회하기로 합의하였다(적성국 교역법이 적용되거나, 미행정부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면 대외무역 과정에서 각종 경제 제재를 당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 후단을 참조). 이에 따라 북은 1만 페이지에 달하는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제출했고, 미국 역시 북에 대한 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미국은 올해 중순부터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강도의' 북핵 검증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북측이 이를 받아들일 경우에만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강변하기 시작했다(미국이 북에 요구한 검증 시스템의 내용에는 영변 핵시설 주변 샘플 채취와 불시방문, 미신고 시설에 대한 검증 허용 등의 사항이 포함돼있다). 북이 이에 반발하자 미국은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8월 11일 이후에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북이 이러한 미국의 조치를 '10·3 합의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핵 불능화 의무이행을 중단한 것이다.
보수 언론들, 북에는 차가운 꾸지람, 미국에는 애정 어린 다그침(?)
북의 핵시설 복구 언급과 관련해 남측 보수 언론들은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북이 미국의 정권교체를 노리고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검증 사항들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6자 회담이 난항에 부닥치게 된 책임을 미국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미국은 북한의 이번 조치에 대해 강력 대응하겠다고 천명했다.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납득할 만한 수준’의 검증 없이는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미국의 입장이 부시 대통령의 임기 말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이런 점에서 부시 대통령이 최근 취한 북한 자산 동결 등의 조치는 긍정적이다.(중앙일보 8월 28일자 [사설] 실질 북핵 검증이 ‘테러국 해제’의 관건 中)
북의 주장은 자신들은 10·3합의를 착실히 이행하고 있는데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만 억지일 뿐이다. 북이 거론한 10·3합의는 ‘북이 모든 핵 프로그램에 대해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를 하면 미국은 북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다’는 것이다. 신고는 ‘완전하고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검증을 전제로 한 것이다.(동아일보 8월 27일자 [사설] 6자회담 5년에 다시 ‘核 공갈’ 나선 北 중)
다른 하나는, 미국이 애매하고 불충분한 합의내용을 성급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이번 사태를 자초하였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미국이 북에 요구하고 있는 검증체계가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정당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애당초 이라크 문제로 궁지에 몰린 미국 부시 행정부가 북핵 문제에서 외교 점수를 얻겠다고, 검증에 대한 명문화 없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빼 주는 합의를 한 것 자체가 성급한 일이었다. 한·미 양국은 민감한 핵 협상에서, 더구나 북한과 같은 상대를 마주한 상태에서 국내 정치적 필요 때문에 조급함을 보이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다시 한 번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조선일보 8월 27일자 [사설] 北, 또 핵 위기 조성해 무얼 얻자는 건가 中)
'애매한 용어'로 합의하고 후에 '다른 해석'을 하면서 엉뚱한 요구를 하는 것은 북한 협상 전술의 기본이다. 이를 잘 알고 있을 미국이 이를 용납했다는 것은 성급함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에 발목이 잡힌 데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패하자 북핵 진전에서 외교적 성과를 내겠다는 발상에 부시 정부가 너무 집착했던 것이다.(중앙일보 8월 28일자 [사설] 실질 북핵 검증이 ‘테러국 해제’의 관건 中)
조선일보 8월 28일 [기사] 북 핵불능화 중단은 '예고된 탈선(脫線)'; 韓·美 성급한 협상으로 검증방법 합의 못해
진정 10·3 합의를 지체시키는 것은 미국의 '채무불이행'
10·3 합의 내용에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가 북핵 신고 내용 '검증'에 발맞춰 이뤄져야 한다는 문언은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보수언론들도 동의하고 있다. 다만 10·3 합의 내용 중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라는 문구와 관련하여 미국은 '검증절차가 이루어져야만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아일보 역시 "북의 주장은 … 억지일 뿐이다. … 신고는 '완전하고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검증을 전제로 한 것이다"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문언상 명백하게 '신고'라고 규정해 놓은 것을 '검증절차를 거친 신고'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확대해석이다. 게다가 북핵 검증체계에 대한 합의내용을 담은 6자 수석대표 회담 발표문(올해 7월에 합의된 발표문임)은 '시설 방문, 문서 검토, 기술인력 인터뷰 및 6자가 만장일치로 합의한 기타 조처'만 명시하고 있고, 미국이 북측에 요구하고 있는 사항(영변 시설 시료 채취, 불시 검문 등)은 포함하고 있지 않다. 나아가 이러한 검증체계 수립이 테러지원국 해제의 전제조건이라는 내용은 올해 회담 발표문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합의 사항을 위반하고 있는 것은 분명 미국이다. 미국이 합의사항을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북측에 함으로써 북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수 언론들은 합의사항 자체가 불충분하다면서 미국이 주장하는 검증체계가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합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합의의 상대방과 다시 협상을 해야 할 일이지, 일방적으로 합의를 깨뜨리거나 합의내용에 없는 사항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은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니다.
더구나 10·3 합의 내용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의문이다. 10·3 합의의 핵심 취지는, 미국이 북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함으로써 대북봉쇄정책 철회 의지를 보임과 동시에, 이에 발맞춰 북도 핵프로그램 신고서를 제출하여 핵 불능화 의지를 표명한다는 것이다. 즉, 북의 핵 신고 의무는 핵 불능화 의사를 표시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북의 핵 보유 상황을 완벽하게 파헤쳐놓는 것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종국에 가서는 북의 핵 보유 상황이 완벽하게 공개·검증돼야 하지만 그것은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를 통해서 북미화해 의지를 표명한 뒤에 이루어질 일이다. 그것이 6자 회담에서 합의된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부합하는 방향이다. 6자 회담의 기본 취지가 무조건적 북핵 폐기가 아닌, '한반도 평화분위기 조성'(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철회되어야 한다)과정 속의 북핵 폐기임을 상기해 봐도 그렇다.
보수 언론은 한반도 비핵화 논의 제대로 보아야
보수 언론들의 논조에는 북의 핵을 샅샅이 뒤져 전부 없애는 것만이 6자 회담의 목표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길이라는 생각이 전제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일단 현실적이지 못하다.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을 그대로 놔두면서 북에게만 일방적으로 핵 포기를 요구한다면 북은 당연히 반발할 것이고 이는 한반도의 갈등구조를 악화시키기만 할 것이다. 종국에 가서는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가 실현되어야 하지만, 그 과정은 차근차근, 공평하게 진행돼야 하는 것이다. 보수 언론들은 진정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참고1> 테러지원국
- 미국이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국가들을 분류하여 지칭하는 용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만한 화학 무기나 생물학 무기,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거나 고도의 컴퓨터 해킹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로서 국제적인 테러 행위에 직접 가담하였거나 지원하고 방조한 혐의가 있는 국가가 대상이 된다.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나라에는 ① 무기수출 금지, ② 테러에 사용될 수 있는 이중용도 품목에 대한 수출통제, ③ 대외원조 금지, ④ 무역 제재 등의 제재를 가한다. 현재 북한·쿠바·이란·수단·시리아가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2> 적성국교역법
- 1917년 제정된 미국 연방법으로 특정한 나라를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하여 적용된다. 적성국으로 규정한 나라의 미국내 자산을 동결하고 교역을 금지함은 물론, 그 나라와 교역하는 상대국에도 경제적 제재를 가함으로써 해당 나라를 국제사회에서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효과를 노린다. 북한은 6·25전쟁 발발 직후부터 이 법의 대상국이 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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