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국 대륙을 달군 베이징올림픽의 성화가 꺼진 뒤 중국 미래에 대한 적신호가 하나둘씩 켜지고 있다. 위구르인을 위시한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움직임은 갈수록 거세지고, 욱일승천하던 경제도 자산시장 급락과 고인플레이션으로 침체 국면에 들어섰다. 올림픽 후 중국을 뜨겁게 하는 네 가지 이슈의 실상과 전망을 모종혁 통신원이 현지에서 전한다. [편집자말] |
"겉은 평온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과 같이 무거운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습니다."신장 위구르자치구 카슈가르 출신인 오마르(26)는 고향의 현실을 '일촉즉발 위기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는 "베이징올림픽이 끝났다지만 장애인올림픽이 이어지는 데다가, 공산당정권 수립일 국경절(10월 1일)을 앞두고 민중 봉기에 대비해 곳곳엔 군경이 배치됐다"고 전했다.
오마르는 "대테러특공대인 특수경찰은 기관총을 휴대한 채 도심에서 위구르인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불심 검문을 벌인다"면서 카슈가르는 '반계엄' 상황이라고 밝혔다.
위구르인을 압박하는 분위기는 비단 카슈가르만이 아니다. 신장자치구 수도인 우룸치에서도 위구르인을 감시하는 특수경찰의 눈빛은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다.
올해 신장대학을 졸업한 오스만(24)은 "툭하면 검문에, 신분증이 없으면 임의 연행까지 일삼아 중장년층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면서 "테러리스트나 그 동조자로 낙인찍힐까봐 분노만 억누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가오는 라마단이 문제"라며 "전통적인 종교의식이나 중동으로 떠나는 성지순례를 간섭한다면 단순히 분노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무차별적인 불심 검문"... 카슈가르는 '반계엄' 상황지난달 4일 베이징올림픽을 불과 나흘 앞두고 카슈가르에서는 위구르 독립운동단체에 의한 폭탄투척이 일어나 무장경찰 16명이 숨졌다. 올림픽 개막 사흘째인 10일 새벽에는 쿠차에서 17차례의 연쇄 폭탄공격이 벌어져 경찰을 포함, 12명이 사망했다.
같은 달 12일 카슈가르에서 30㎞ 떨어진 수러현 검문소에서는 괴한들의 공격으로 중국 보안요원 3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올림픽이 끝난 27일 카슈가르 인근 자시현에서는 중국 공안과 위구르인 간에 충돌이 일어나 공안 2명이 죽고 다른 2명이 다쳤다. 8월 29일에는 중국 공안이 카슈가르 교외에서 테러용의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총기를 발사, 용의자 6명을 사살했다.
지난 한 달간 신장에서 벌어진 일련의 폭탄투척과 무장 교전은 위구르 독립 문제를 전 세계에 각인시켜 주었다. 면적 166.5만㎢로 중국 영토의 1/6을 차지하는 신장은 유라시아대륙 한가운데에 위치한 고대 실크로드의 중심지다. 예부터 동서 문화가 융합한 사막의 오아시스 문화를 꽃피운 곳이다.
2007년 현재 신장 인구는 2095만1900 명. 그중 900만 명이 넘는 위구르인을 위시해 카자흐·회족·카프키스·타지크·우즈베크·타타르 등 투르크 및 북방유목 민족이 인구 대다수를 점하고 있다. 이들은 생김새부터 한족과 전혀 다르다. 종교도 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어, 인종·종교·언어·문화 등 모든 면에서 한족과 뚜렷한 차이가 난다.
신장은 역사적으로 8세기 이래 줄곧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중국·몽골·아랍 등 주변 강대국의 통치를 받아왔다. 18세기 중엽부터 카슈가르 일대까지 장악한 청나라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은 신장은 42차례에 걸친 격렬한 투쟁을 벌여, 1865년 청을 몰아내고 동투르키스탄 왕국을 건국했다.
1877년 신장은 다시 청에 복속됐지만, 중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현지 민족의 투쟁은 끊이질 않았다. 20세기 초 청이 무너지고 국공내전, 중일전쟁 등 혼란한 틈을 타 위구르인은 1933∼34년과 1943∼49년에 독립국가인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세웠다.
1949년 10월 12일 왕전 장군이 이끄는 중국 인민해방군 제1야전군 제1병단 8만9천 명은 신장으로 진군, 위구르 독립국가를 다시 붕괴시켰다. 본래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 시기 소수민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 자결권을 강조했다. 고도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소수민족 자치정부 수립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그러나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후 중국공산당의 대 소수민족정책은 180도 바뀌었다.
중국이 신장으로 진군하면서 내세운 구호는 한족과 이슬람교도가 떨어질 수 없는 형제라는 '불분회한'. 중국정부는 "위구르인이든 티베트인이든 조선인이든 중국 영토내 모든 소수민족은 중화민족"이라며 민족간의 우애와 상호 단결을 강조했다.
1954년 제정한 중국 헌법을 통해 소수민족에 대한 강력한 통치를 정당화했고, 한족을 변방의 소수민족 지역으로 대거 이동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1950년대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과 대약진운동 실패로 인구 증가세가 둔화했지만, 신장의 인구 증가세는 폭발적이었다.
특히 대약진운동으로 중국 대륙이 기근에 허덕였던 1950년대 후반 신장의 연평균 인구 증가율은 5.351%에 달했다. 이는 당시 중국 전체 평균의 2배에 가까운 수치였다.
당시 신장의 높은 인구 증가율은 타 지역으로부터의 이주에 따른 결과였다. 중국정부는 신장을 개발하고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한족을 대상으로 신장으로 하방 캠페인을 벌였다. 1954년부터 집중적인 캠페인을 통해 다수의 한족을 이주시켰는데, 1954년에는 16만여 명, 1959년에는 51만여 명에 달했다.
한족의 신장 이주는 1955년 준가리아 북부 커라마이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고 톈산산맥 기슭에 무진장한 석탄이 매장된 것으로 확인되자 급격하게 늘었다. 1962년 간쑤성 란저우와 우룸치를 잇는 란신철도의 개통은 한족 이주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1949년 신장 인구의 6.7%에 불과했던 한족의 비율은 1990년에는 37.58%로 높아졌고, 2005년에는 41%로 위구르인 인구수(43%)를 넘을 기세다.
정책적인 대거 이주에 한족 인구 6.7%에서 41%로중국정부는 한족을 신장으로 대규모 이주시키면서 독특한 공동체를 만들어 통제했다. 독자적인 정치·경제·군사·사회·문화·교육 시스템을 지닌 공산당·행정조직·인민해방군·국영기업이 합일된 신장생산건설병단이 그것.
본래 1950~70년대 중국정부는 광활한 영토와 중앙정부의 미약한 통치력, 외세의 간섭, 미개발지의 경제 낙후 등을 우려하여 전국에 총 12개의 생산건설병단을 창설했다. 신장병단은 1954년 12월 5일 설립된 전국 최초의 병단이다. 1970년대 말 폐지됐다가 1981년 부활하여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다.
현대판 둔전병이라 할 수 있는 신장병단은 중국정부의 신장 개척과 경영의 첨병이다. 병단은 신장 각 지역과 도시에 분산 배치되어 행정 지배와 농공업 생산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02년 현재 병단엔 14개 생산건설사, 174개 농·목장, 427개의 독립적인 공업·교통·건설·상업 기업 및 여러 개의 사회사업체가 있다. 병단이 운영하는 기업 중 6개가 증시에 상장되어 있고, 2개 대학과 1개 농간과학원까지 병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신장에서 병단의 경제적 지위는 면화 생산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신장은 중국 최대의 면화 산지로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데, 그중 병단의 면화 생산량은 50%를 넘는다. 현재 병단은 약 66개 국가와 경제무역 관계를 맺고 100여종의 상품거래를 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인민해방군의 식량 자급자족과 변강 안정에서 출발했던 신장병단을 한족의 대 신장 정착과 대 소수민족 압력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1994년 중국 국무원 문건을 통해 "신장병단은 특수한 조건 하에서 생긴 특수집단으로 경제 실체가 아니고 정규부대도 아니지만 양자를 겸비하고 있고 둔간수변(황무지 개척)·변강보위·민족단결을 촉진하고 있다"고 규정했다.
17만5천명으로 출범했던 병단은 1990년에는 230만 명이 넘는 방대한 조직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병단 구성원의 90% 이상이 한족이다. 최근 들어 가입하는 소수민족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하나, 약 25만 명 정도에 불과해 철저한 한족 위주의 조직임을 알 수 있다.
신장병단은 둔간수변의 경제조직이면서 병농합일의 반군사적인 민병조직이다. 병단은 기동성이 있어 유사시에 바로 군사조직으로 변경이 가능하다. 실제로 병단은 186개 근무소대를 편성하고 군사훈련도 실시하여 군·경·병·민 사위일체의 '제복 입지 않은 국경방위군'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병단원이 나서서 소수민족의 봉기를 진압한 사례는 허다하다. 1962년에 일어난 이타사건, 1989년 우룸치에서 발생한 5·19 시위사건, 1990년 바런향을 해방구로 만든 독립운동사건, 1997년 굴자에서 발생한 2·5 독립투쟁사건 등 수많은 소수민족 봉기를 병단조직이 개입해 압살했다.
굴자 출신인 구리(여·가명) 신장대학 교수는 2·5사건을 회고하며, "1997년 병단조직원이 봉기한 소수민족에게 가한 폭력과 만행은 경찰보다 더 악랄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주정책에 따라 신장에 온 한족 병단 구성원은 단결력이 아주 강하고 이슬람교도에게 적대적이다"면서 "거의 군대조직이나 다름없어 소수민족은 병단원과 접촉도 거의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오스만은 "위구르인이 중국에 저항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차별적인 한족 이주정책과 위구르인의 종교·문화를 무시하는 군경이나 병단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슬람교도인 위구르인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고 타인을 배척하지 않는다"면서 "중국과 한족이 위구르 문화와 이슬람 공동체를 억압하기에 각종 봉기가 끊이질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립봉기 압살에 앞장서는 신장병단지난달 전 세계에 존재를 알린 위구르 독립운동은 그 역사적 유래가 깊다. 한족 통치에 대항하는 위구르 독립운동은 1950년대 말부터 '동투르키스탄'을 기치로 내걸고 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 옛 소련으로 탈출한 20만 명의 위구르인은 1963년 동투르키스탄 해방군을 조직하여 간헐적인 투쟁을 벌여왔다.
1990년 바런향 대규모투쟁에서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당이 "성전(지하드)을 일으켜 중국인을 동투르키스탄으로부터 몰아내자"고 외치며 시위를 주도했다. 1992년 12월 30여 개 국가에서 온 해외 망명 위구르인들은 터키 이스탄불에 모여 '동투르키스탄 민족대표대회'를 개최, 동투르키스탄국 국명·국가·국기 등을 결정했다. 1999년 18개국에 흩어진 위구르 독립세력들은 무력으로 독립국가를 건국하는 노선을 재확인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조직원을 중국 내에 잠입시켜 테러를 일으키고 있다.
한때 신장 위구르 사회 내부에서는 해외 망명자를 중심으로 한 테러 노선에 반발의 움직임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분위기를 잠재운 것은 다름 아닌 중국정부였다. 21세기 들어 서부대개발을 내건 중국정부는 신장의 무진장한 자원을 중국 내지로 옮기는 자원 약탈적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신장은 중국정부로부터 '양식창고' '육식창고' '기름단지' '석탄바다'로 불릴 정도로 자원의 보고다. 채굴할 수 있는 석유 매장량은 100억 배럴 이상이고 미개발 유전도 세계 1급이다. 신장의 자원 매장량은 중국 내에서 석유는 1/2, 천연가스는 1/3, 석탄은 35.9%를 점한다. 중국에서 발견된 171개 광물질 중 신장에만 138종이 있어 전체의 80.7%를 차지하고 있다.
무진장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최근 5년간 신장은 연평균 1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문제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이 신장 현지주민에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5년 석유 생산으로부터 얻은 조세 수입 148억 위안(한화 약 2조3680억원) 가운데 신장자치구에 나눠진 돈은 2억4000만 위안(384억원)으로 1.6%에 불과하다. 나머지 수입은 모두 베이징의 중앙정부에 귀속됐다.
우룸치를 비롯한 카슈가르·쿠차·굴자 등 신장 대도시 상권은 중국 내지에서 온 한족이 장악한 지 오래다. 도시 상점 간판에서 아랍어를 빌려쓴 위구르어 간판은 한자에 점점 밀려나고 있다. 위구르인은 한족 주인 밑에서 종업원으로서 급여가 낮고 하찮은 일에 종사한다.
지난달 29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한 현지정부 공무원의 입을 빌어, "석유와 천연가스는 신장에서 나오지만 이익은 모두 공산당 정부가 있는 동쪽(중국 내지)으로 넘어간다"고 보도했다. 무차별한 한족 이주, 병단으로 대표되는 한족 우대정책과 민족 격리정책, 자원 약탈적인 개발정책으로 촉발된 위구르인의 분노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중국정부를 겨눌 전망이다.
덧붙이는 글 | 기사 내 대부분 인명과 지명은 위구르어 현지 발음대로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