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보강 : 9일 밤 9시 40분]
태권도 창시자 최홍희 장군이 만든 국제태권도연맹(ITF) 최중화(54) 총재가 8일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의 한국방문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한국을 떠난 지 34년 만의 일이다.
최중화 총재는 1982년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했으며 전두환 암살미수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그동안 한국방문이 어려웠다.
최 총재는 1974년 캐나다로 이민을 간 후 부친인 최홍희 장군을 따라 전 세계를 돌며 태권도를 보급하는데 열중했다. 그는 태권도 창시자인 최홍희 장군의 인생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그는 8일 인천공항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뭐라 표현할 수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남에게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 그의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를 가늠케 했다.
태권도는 최홍희 장군이 1955년 4월 11일 대전 3군관구 사령관으로 근무할 때 명칭제정위원회를 열어 '발로 차고 뛰며 주먹으로 때리는 도'라는 뜻으로 창시했다. 최 장군이 태권도를 만들게 된 동기에 대해 최중화 총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친께서는 1944년 일본중앙대학을 다닐 때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강제 징집당했다. 선친이 학병으로 평양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중 당시 조선인 학병들과 함께 '실탄을 지급받으면 일본군을 쏘아 죽이겠다'는 '평양학병의거'를 주도했다가 체포돼 사형언도를 받고 군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때 태권도를 만들 결심을 했다."
그는 또한 "선친께서는 한민족이 과거에는 무예를 익혀 기상이 늠름해서 900여 차례의 전쟁에도 꿋꿋하게 살아났는데, 조선말에 와서 유약해지는 바람에 일본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며 "한민족을 강하게 하는 민족의 무도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훗날(1955년) 태권도라는 무도가 되었다"고 말한다.
태권도의 탄생은 이와 같다. 태권도는 현존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브랜드다. 하지만 태권도를 만든 순간부터 최홍희 장군과 그의 가족들, 특히 오늘 34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최중화 총재의 일생은 태권도와 관련해 희생을 당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굴레를 쓰게 됐다.
그러나 최중화 총재는 '태권도는 나의 운명'이라며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다. 오히려 그는 '태권도는 대한민국의 자산이자 한민족의 자랑'이라고 말하며 남은 일평생을 태권도 발전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또한, "또 하나의 태권도인 세계태권도연맹(WTF)의 발전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밝혀 과거 두 단체가 경쟁과 반목을 하던 때와는 달리 한국이 만든 두 개의 태권도가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발전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태권도연맹 최중화 총재의 이번 방문은 여러 가지로 큰 의미를 갖는다. 태권도는 창시자 최홍희 장군이 2002년 서거한 후 캐나다에 본부를 둔 국제태권도연맹, 북한을 중심으로 한 장웅 국제태권도연맹, 베트남인인 트란콴을 중심으로 한 태권도연맹 등 3개 분파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최중화 총재가 서울 방문을 성공적으로 마칠 경우 최 총재를 중심으로 한 국제태권도연맹이 확고한 주도권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3개의 국제태권도연맹 중 태권도 사범으로 전세계를 누비며 태권도를 몸소보급한 사람은 최중화 총재가 유일하다. 실제로 그는 한국을 방문하기전에도 노르웨이에서 세미나를 개최해 사범들을 지도하는 등 선친인 최홍희 창시자를 이어 태권도 지도에 열중하고 있다. 무도의 가장 큰 특성은 함께 땀을 흘리며 강한 자에게 복종하는 것인데, 최중화 총재는 다른 두 단체와 이런 점이 확연히 다르다.
최중화 총재는 이번 한국방문에 대해 "태권도는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며 2009년부터 순차적으로 국제태권도연맹 본부를 서울로 옮길 수 있음을 시사했다. 또한, 그는 2010년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할 것임을 8일 오후 서울의 한 호텔에서 밝히기도 했다.
이번 최중화 총재의 방문은 지난 7월 2일 청주에서 열린 제10회 세계태권도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인 오경호 충청대 이사장의 노력과 오창진 (사)국제태권도연맹 사무총장 등 한국 내 3천여 명의 국제태권도 사범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중화 총재는 9일 충청대를 방문하고 태권도 발상지인 대전에 간다. 이 기간 동안 서울의 형님 가족과 함께 조모 산소를 방문한다.
최중화 총재는 "오늘 그토록 오고 싶었던 한국땅을 밟은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전세계 3500만명의 ITF태권도인들과 함께 한 기쁨이며, 하늘에서 이 장면을 보고 계실 최홍희 태권도 창시자도 좋아하실 것이다"며 이번 한국 방문을 요약해서 말했다.
최홍희 총재 서거 후 국제태권도연맹이 세 그룹으로 나뉘어
최 총재의 방한을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그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전두환 암살사건에 가담한 것처럼 보도하고 있으나 그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1980년 5월, 진압군에 의해 학살당하는 광주시민의 처참한 모습을 지켜 본 26세의 청년 최중화는 전두환 육군 소장을 살해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가 캐나다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광주학살피해유가족협회'에서 일한다는 사람이 "자금을 댈 테니 거사(전두환 암살)를 치를 만한 사람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최 총재는 혼자 고민하다가 이들에게 유태계 마피아조직을 연결해 주었고 기꺼이 통역을 해줬단다.
최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밝힌 대로 수차례 통역을 하면서 전두환 암살을 계획한 사람들이 당초 신분을 밝힌 '광주학살피해유가족협회'가 아닌 북한당국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 총재는 "그만 두려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해 전두환 암살미수 사건이 처음부터 북한의 지령을 받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캐나다 법정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1년 만에 모범수로 출소했다.
최 총재는 1981년 북한에 파견한 2차 사범진에 포함돼 북한을 처음 방문하고 태권도를 보급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당시 약 2년간 북한생활을 했는데 이때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됐다고 지난해 8월 영국 버밍엄에서 있었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최 총재는 특히 세계 각국으로 파견되는 국제태권도연맹 사범들 중 북한사범들이 통일전선부 요원들로 둔갑하는 것을 자주 보면서 "북한이 태권도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 연맹이 북한과 손을 잡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을 선친인 최홍희 총재와 연맹간부들에게 자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최 총재는 1990년대부터 북한당국의 태권도 이용을 비판했기 때문에 국제태권도연맹 내부에서 북한을 옹호하는 세력들로부터 견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을 비판하는 최 총재의 입장은 훗날 최홍희 총재 서거 후 국제태권도연맹이 세 그룹으로 나뉘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 총재는 2002년 당시 선친인 최홍희 전 총재가 중병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북한으로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만류했으나 최홍희 전 총재의 친북 측근들에 의해 평양으로 가게 됐다고도 밝힌 바 있다.
그는 "선친께서는 점점 병환이 깊어지자 서울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 남한정부에 서울행을 타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2002년 태권도 창시자인 최홍희 전 총재의 서울행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