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철을 잘 이겨낸 식물들과 열매들이 가을 빛을 맞으며 다시 한 번 더 여물어 가고 있습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면서 축제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풍성한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잔치는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풀숲에서 울어대는 가을벌레들의 소리는 가을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매미소리가 요란합니다. 소리는 기운차지만, 변해가는 가을햇살 앞이라서 그런지, 어쩐지 서글프다는 느낌이 앞섭니다.
사람은 똥을 먹고 산다진주 마산방향 남해고속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주말 오전 고속도로는 가을하늘만큼이나 한가합니다. 식구들과 함께 하동 북천 직전들녘 코스모스와 메밀꽃을 구경 가는 길입니다. 광양 집에서 그곳까지는 40여분 정도 소요되는 가까운 거리라 부담 없이 출발을 하였습니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들녘은 점검 얼룩덜룩한 색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아직 태풍한번 없어 올해는 풍년이여…."아버지(73)는 누렇게 변해가는 들녘을 보고 한마디 하십니다. 시골은 이때가 바쁘다고 합니다. 농부로만 사셨던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벼가 점점 고개를 숙여 익어가고 있을 때 수확도 하기 전 내년 농사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산과 들녘에 여름내 잘 자란 키 큰 풀을 베어 퇴비를 장만할 시기라고 합니다. 여름 내내 잘 자란 풀을 이른 아침저녁으로 지게에 가득 실어 나르고, 그것을 여러 날 모으다 보면 커다란 풀 더미가 만들어집니다. 풀 더미는 건초로 만들어 통시(화장실)의 똥을 퍼다 건초와 잘 배합하여 숙성 시키면 식물에 좋은 거름두엄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은 똥을 먹고 살아."
아버지의 말씀에 생각만 해도 역한냄새가 술술 나는 것 같아 식상해집니다. 그러나 일 년 내내 모아둔 통시의 똥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똥 없이 농사를 짓지 못한 그 시절엔 사람 똥이건 짐승 똥이건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은 식물의 열매를 먹고, 식물은 사람의 배설물인 똥을 먹고 공생 공존하는 세상. 옛사람들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엿보입니다.
하동 북천 직전들녘 가을풍경
어느새 남해고속도로 진교 나들목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고불고불한 고갯길로 올라서자 멀리 북천면 직전들녘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고불고불한 고갯길을 보자 양의 내장을 닮았다는 내장산 가던 길이 생각이 났습니다. 꼬부랑 길. 초행자는 안전운전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직전 들녘에도 풍성한 가을이 왔습니다. 하얗게 꽃핀 메밀밭을 금방 만날 수 있었습니다. 19일부터 시작하는 메밀꽃 축제를 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가을을 느끼려는 주말 나들이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습니다. 농가소득도 올리고 관광객을 유치하여 부자농촌을 꿈꾸는 북천면의 노력이 여기저기에서 보입니다.
코스모스 밭과 메밀꽃 밭 사이로 비닐이 없는 하우스가 긴 터널을 이루고 있습니다. 호박, 조롱박, 수세미, 오이 등은 풍성한 가을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습니다. 북천면의 작은 살림 중 예산을 적게 들이기 위해 아는 이웃들로부터 씨앗도 얻고 하우스 자재도 재활용하여 만든 식물터널이라고 합니다.
박은 6종류 호박은 14종류 등 그 종도 다양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박은 조롱박 뿐이었습니다. 에스(S)라인 매끈한 몸매를 자랑하는 조롱박은 쉽게 알 것 같습니다.
"이게 식용도 가능한 뱀 오이입니다."
면에서 나온 여직원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기다랗게 뻗은 오이는 2m는 족히 넘을 것 같습니다. 열대우림 지역에서 초록으로 몸을 위장하여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뱀 같아 소름이 짝 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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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동 북천 직전들녘 오는 19일부터 28일까지 열흘 동안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가 열릴 직전들녘을 영상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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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도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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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 2회째를 맞이하는 축제라고 합니다. 첫해엔 44만여명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19일부터 28일까지 열흘간 진행되는 이번 축제에는 더 많이 알려져 100만 여명이상이 다녀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차량이 몰려들 것에 대비해 도로정비, 주차장 정비를 하는 등 부푼 마음으로 손님맞이 준비를 하느라 주말에도 바쁘기만 합니다.
메밀 꽃밭과 코스모스 밭이 각각 5만여 평이 된다고 합니다. 메밀꽃은 제법 그 자태를 보이고 있는데 코스모스 꽃을 듬성듬성 피어있을 뿐 아직 만개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기다리는 모양인지 조용한 침묵만 지키고 있습니다. 멀리서 왔는데 피지 않은 꽃봉오리만 보고 가기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꼭 결정적인 순간에 일이 성사되지 않는 경우를 종종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축제 전이라 면직원은 사진을 찍기 위해 메밀밭을 들어가는 것을 저지합니다. 아이 아빠는 간신히 메밀밭 입구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허락을 받고 아이를 메밀밭으로 조금 들어가게 했습니다.
예쁜 손가락으로 브이(V)를 그리며 포즈를 취하는 아이. 그런데, 그 결정적인 순간에 일이 터진 모양입니다. 카메라 배터리가 방전된 것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포즈를 취하고 있던 아이는 기다리다 지쳐 짜증 섞인 비명을 지르지만 속 타는 아빠의 심정은 오죽했겠습니까.
‘산허리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 / 메밀꽃 필 무렵> 메밀밭을 배경으로 기구한 운명이 이루어지고 만나는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장돌뱅이 허생원과 동이와 만남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강원도 봉평에 가지 않아도 이곳 하동북천 직전들녘 메밀밭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가위 보름달이 뜰즈음면 하동 북천에서도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의 메밀꽃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