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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의 다른 점

김영세는 학교로부터 여러 차례 경고를 받고 있었다. 그는 강의는 소홀히 한 채 학생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주입시키는 교사로 낙인 찍혔다. 하지만 그는 전혀 괘념치 않고 소신대로 강의를 계속했다. 형과 조카는 나라를 찾으려고 사선을 넘나들고 있는데 강의마저도 제대로 못 해서야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어떻게 다른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일본은 전통 신앙의 파괴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종교 시설이 즐비합니다. 불교와 신도(神道)를 함께 믿는 사람이 전체의 97%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일본인의 국민 정서는 철저히 종교적입니다.

게다가 일본 종교는 국수적이고 배타적입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종교는 국수적인 게 거의 없습니다. 이는 유교의 친화력 때문입니다. 동학이나 대종교는 종교이기에 앞서 구국이나 나라의 독립을 찾겠다는 수단으로 출현된 측면이 강합니다. 한국인은 충효 관념이 강하고 평화 공존 의식이 높습니다. 종교 성향의 차이는 두 나라의 민족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인의 절제력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그들은 예의 바르고 겸손해 보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종교 때문이거나 지진이나 해일 등 자연 재해에서 느끼는 공포감 때문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사무라이 정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장인정신은 높이 살 만합니다. 그들은 이미 임진왜란 시기 이전부터 천하제일로 물건을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도 혼을 불어 넣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추어탕이나 우동집을 200년 이상씩이나 대물림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 서민들에게는 신분 상승의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조선도 신분 차별이 있었지만 학문만 높으면 서얼이나 상민도 인정을 해 주고 그에 맞는 일을 맡겼습니다. 이것은 일본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조선인의 신분 상승 수단은 학문이었지만 일본인의 그것은 칼솜씨였습니다. 일본인의 겸손과 절제력과 장인정신 중에서 장인정신은 사실은 한국인에게서 배워 간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일본인 이상 가는 장인정신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조선이 유교 때문에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은 속설입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조선인의 과학기술은 일본보다 앞섰습니다. 문제는 서양의 과학기술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전통적 교양이 부족했고 그런 나머지 우리 것을 부정하는 태도로 나왔기 때문에 빚어졌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해 배타적 태도로 과학기술 도입을 주장했습니다.

일부 실학파의 무리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인문적 교양이 부족했던 만큼 콤플렉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타성과 공격성을 띠었습니다. 일본인과 기질이 비슷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문적 교양과 전인적 사고력은 일본을 능가할 만한 자원입니다. 이것은 결코 짧은 시간에 축적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배울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한 겸손이나 절제력 같은 것들은 배울 만한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본보다 열등하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총독부와 계몽주의자들이 합작으로 벌이고 있는 20세기 최대의 사기극입니다.

콤플렉스는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콤플렉스를 지닌 사람은 배타성과 공격성을 띠게 됩니다. 정약용을 비롯한 일부 실학자들, 김옥균·  박영효 등의 친일 개화 쿠데타 세력, 그들의 추종 그룹에 불과한 독립협회 세력, 그리고 이광수 등의 무지한 민족개조론자들이 실질적으로 나라를 망하게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일본은 조선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콤플렉스를 가진 서양이 동양을 공격했듯이 일본도 조선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까놓고 말해서 무력 공격에는 무력으로 대처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근거 없는 자기 비하나 서양 동경은 우리를 영원히 노예로 만들 뿐입니다. 여러분 개화· 계몽주의자들에게 더 이상 속지 말고 조선인의 자부심으로 독립 투쟁 대열에 동참합시다."

마침내 김영세는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사직을 요구받았고, 그는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사직서를 즉각 내 놓아 교사 생활은 끝을 맺게 되었다.

조순호의 병원에 나타난 나민혜

어느 날 조순호의 병원에는 중년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찾아왔다. 헐렁한 양장 차림의 그녀는 서양식 트레머리에 분홍색 리본을 달고 있었고 말쑥한 통치마에 굽 달린 뾰족구두를 신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에 걸맞지 않는 행색이었다. 게다가 유달리 진한 화장은 누가 보아도 그녀를 여염집 여자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내력을 알고 보면 그녀의 헐렁해 보이는 양장은 옷이 커서가 아니라 최근 들어 몸이 부쩍 줄었기 때문이고, 진하게 발라진 화장은 거칠어진 병색의 피부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이혼 당한 직후였다. 그로 인한 심리적 안달과 분노는 그녀의 외모를 10년 정도는 더 들어 보이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순호는 사람 얼굴을 알아보는 데에는 남다른 눈이 있었다. 조순호는 진료실에 들어와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말했다.
"민혜 아니니?"
나민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민혜가 조순호를 찾아가게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1년 남짓 해외순방을 마치고 온 그녀는 남편과 함께 부산 영도에 있는 시집으로 들어갔다. 시집 식구들과의 갈등은 그녀가 짐 보따리를 푸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돌아온 그녀는 가방 하나와 대형 궤짝 두 개를 가져왔는데, 그 궤짝에는 서양화가가 그린 그림과 자신이 그린 그림, 화구, 포스터, 그림엽서와 구두, 옷가지 등이 들어 있었다. 시집 가족을 위한 선물은커녕 제 아기에게 필요한 육아용품마저도 없었다.

남편 박우진은 예상했던 대로 총독부 관리직을 조기 퇴직했고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정 수입은 없는데다 들어가는 돈만 많았는데, 와서 손을 벌리는 시집 친척들은 줄을 이었다. 게다가 시부모는 며느리의 성향을 간파했음인지 경제적 지원을 아예 끊어 버렸다. 그녀는 시집 식구들에게 일찍부터 들뜬 신여성으로 인식되었었는데, 이제는 이기적이고 인색하면서도 제 할 일을 전혀 하지 않는 며느리로 낙인찍히기에 이른 것이었다.

나민혜는 시집 식구들이 자기를 부당하게 냉대하고 구박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남편도 예전과 달리 그녀의 입장을 옹호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스칸디나비아의 노라를 생각했다.
'나는 인형이었네. 나는 인형이었네.'

아니다. 나는 인간이다. 어느 날 그녀는 벌떡 일어나 붓을 쥐고 그림에 매달렸다. 그녀는 영도의 해변과 태종대의 절벽과 해운대의 백사장과 동백섬의 소나무 숲 등을 쏘다니다가 범어사에 들러서는 경건한 불자가 된 양 합장하고 배례하기도 했다.

그녀는 서울에 있는 최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용건만 적은 아주 짤막한 내용이었다.
"교외 바닷가에 있는 송정 언덕길에서 함께 달맞이를 하고 싶어요."

최린이 필요로 했던 것은 시골에서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 아낙네가 아니었다. 그가 좋아했던 나민혜는 파리에 혼자 살며 그림을 그리는 여인이었다. 나민혜의 편지를 읽으며 최린은 달맞이는 경성 남산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나민혜는 신여성 화가로 세속적인 남성들의 관심권에 있었다. 최린은 나민혜가 시집에 가서도 자기만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나민혜가 최린에게 보낸 달맞이 초청장은 호사가들의 입에 회자되었고 그것이 불과 서너 사람의 입을 거쳐 박우진에까지 전달될 때에는 약간 각색되어 있었다.
"달빛 아래서 그대의 품에 안기고 싶어요."

이미 박우진은 파리에서 벌어진 자기 아내의 부정(不貞)을 알고 있었다. 다시는 최린을 안 만나겠다는 약속까지 아내에게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 아내가 또다시 남자에게 꼬리를 치고 있는 것이었다.

박우진은 오랫동안 쫓아다니며 그녀에게 구애했던 일, 결혼을 전제로 각서를 써 주었던 일, 부정을 용서했던 일 등이 한꺼번에 씻을 수 없는 굴욕으로 느껴졌다. 이제 그는 모든 게 다 번거롭고 구차하게 생각 들었다. 그는 조용히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때 열정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믿었던 한 여자를 뇌리에서 지워 버리기로 작심했다.

나민혜에 대한 친정 식구들의 눈길 역시 시집 식구 못지않았다. 그녀는 보따리 하나를 달랑 들고 친정에서 나와 친구 집을 전전했다. 가끔 그녀는 그녀의 스캔들을 추적하는 기자들과 식사를 하거나 교외 나들이를 하기도 했다.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어김없이 부풀려지거나 극적인 내용으로 탈바꿈되어서 신문· 잡지에 게재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터뷰나 원고 쓰기를 중단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경제적 수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옷과 구두를 중시하다 보니 생활비가 많이 들었다. 사실 옛날에 삿포로까지 가서 조순호에게 돈을 빌렸던 것도 처음으로 나온 신식 바바리 코트를 사 입기 위해서였다.

박우진 역시 아내 때문에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끊겨 생활이 어려웠다. 그가 서울로 올라와 여관에 장기 투숙하며 겨우 변호사 사무실을 냈을 때였다. 투숙비도 서너 달 밀려 있었고 사건이 들어와도 착수금이 없어 못 맡을 지경이었는데, 아내가 최린 따위의 늙은이에게 연서를 띄웠다는 소식은 그를 분격하게 만들었다.

그는 변호사답게 나민혜에게 정식 이혼을 요구했다. 그는 나민혜의 말을 길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나민혜는 갑자기 아이 걱정을 했다. 그녀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 이혼만은 하지 말자고 말했다. 박우진은 장마에 웬 토담 무너지는 소리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박우진의 마음은 완전히 돌아서 있었다.

박우진은 변호사답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는 독촉장을 하루가 멀다고 그녀에게 보냈다. 그때마다 나민혜는 아이를 생각해 그럴 수 없으니 번의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잊혀진 여자의 말이 남자에게 영향을 끼칠 리는 없었다.

그녀는 돈을 요구했다. 박우진은 이혼 전에는 어떠한 돈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할 수 없이 그녀는 두 장의 서약서를 만들어 박우진에게 보냈다. 서약서에는 '박우진과 나민혜는 향후 2년 간 재가 또는 재취 않기로 약속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박우진은 도장을 찍어 속달로 보냈다. 나민혜는 여관방에서 자기가 작성한 이혼 서류에 찍힌 박우진의 빨간 인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덧붙이는 글 |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과 사랑이 펼쳐집니다.
- 작자 김갑수는 최근 조선 성종 때의 유학자 최부가 쓴 <표해록>을 바탕으로 한 장편소설 <오백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신도#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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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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