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드디어 가을이 찾아왔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 떨어지는 단풍잎에 왠지 눈물 한번 흘려야 할 것 같은 계절, 그리고 손에 책 한 권 들고 읽어야 할 것 같은 계절, 가을.

 

'그래, 가을이니깐 책 한번 읽어보자'라는 결심으로 도서관 책꽂이에서 책을 꺼낸다. 그런데 글자가 너무 빽빽하다. 그래도 참고 읽어본다. 아, 하지만 도저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 읽고 나서도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여백이라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아, 정말 나와 책은 인연이 아닌 것일까. 나도 책 좀 읽고 싶은데 말이야.

 

우당탕탕 좌충우돌 가족이야기, <비빔툰>

 
 <비빔툰> 7권 책 표지
<비빔툰> 7권 책 표지 ⓒ 문학과지성사

그런 내가 책꽂이에서 꺼낸 책은 <비빔툰>, 2001년부터 만화가 홍승우씨가 <한겨레>에 연재하고 있는 바로 그 만화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아주 평범하다. 30대 가장 정보통이 아내 생활미를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으며, 첫째 다운이와 둘째 겨운이를 낳으며 정신없지만 알콩달콩하게 사는 모습이 전부다.

 

독특한 성격을 지닌 인물도 없다. 상사 눈치를 보며 IMF 위기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장 정보통.

 

결혼 전에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음반편집기사였지만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이며 전업주부이고 아이들이 어질러놓은 집안을 청소하는 게 하루 일과인 생활미.

 

여느 아이들처럼 호기심 많고 장난 잘 치고 서로 토닥거리며 잘 싸우는 남매, 다운이와 겨운이. 그리고 정보통의 부모나 생활미의 부모, 다운이의 유치원 선생님 등등 이 모든 인물이 우리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모습으로 책에 녹아나 있다.

 

드라마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생 역전도 없다. 아이들이 머리가 좋아서 영재교육을 받는 것도 아니다. 재벌집 식구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너무 평범해서 시시할 수도 있는 그런 인물들이다.

 

평범함 속에서 찾는 따뜻함, <비빔툰>의 매력

 

그러나 <비빔툰>의 매력은 이 '평범함', 즉 '다르지 않음' 속에 있다.

 

정보통의 누나 정보란이 늦게 결혼한 후 빨리 아이를 갖지 못한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도, 결혼 전 생활을 떠올리며 일본어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생활미의 모습도, 회사 생활로 힘들어하는 아빠 정보통에게 힘내라는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는 다운이의 모습도, 식탁 위에 올라가고 싶어서 잘 되지도 않는 걸음마로 한발 한발 의자를 향해 거어가는 겨운이의 모습도….

 

'다르지 않음'이 어떻게 매력적인 글감이 될 수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의 매력은 분명 크다.

 

다운이가 태어나서 하루하루 자라가는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대견함을 느낀다. 양수가 빨리 터져서 수술로 겨운이를 낳고 힘들어하면서도 다운이의 점심을 챙기는 생활미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다.

 

식탁 앞 아기 의자에 앉아 손에는 초콜릿을 들고 꼬박꼬박 조는 겨운이의 모습을 보면 그저 귀엽기만 하다. 겨운이가 태어난 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회사에서 박카스를 마시며 겨우겨우 견디는 정보통의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마치 이 책 속에 나오는 가족이 내 가족인 것만 같다. 그것이 바로 '다르지 않음'의 매력이다. 드라마나 다른 책에 나오는 주인공보다 훨씬 가까워지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이 매력이 페이지마다 녹아나는 것이 바로 이 책, <비빔툰>이다.

 

혹시 나처럼 수많은 글자들에 눈이 아프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른 채 무의미하게 책장을 넘기는 사람이 있다면, 책장도 쉽게 넘어가면서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만화책 한 권을 보는 건 어떨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지, '어려운 책이나 작은 글자가 가득한 책만 읽어야 하는 계절'은 아니니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YES블로그(http://blog.yes24.com/existsea)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비빔툰 1~9 세트 - 전9권

홍승우 글 그림, 문학과지성사(2012)


#비빔툰#홍승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