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티푸스에 걸려 죽음 앞까지 갔던 친구'깨복쟁이' 친구. 혹은 소위 'XX친구'라 부르는 그를 9월초 30년 만에 뉴욕에서 만났다. 원래 소탈한 성격에 사업이 잘 풀려서 그런지 임신한 배 같다. 친구와는 그동안 고향 동창 카페에서만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아무도 찾아주는 친구가 없어 외로웠다"는 친구는, 내가 뉴욕에 간다는 소식에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려고 한다"고 썼다.
1960년대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그랬지만 너무 가난했다. 시골에서 중학교 진학한 사람은 그래도 형편이 약간 나아 굶지는 않던지, 아니면 부모가 자식만은 이 지독한 가난을 면케 하겠다는 일념으로 당신들은 굶으면서도 학교에 보낸 집안 출신이다.
절반이 여학생인 6학년 2반 우리 반 학생 36명 중 여학생은 단 한명도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서울로 시집살이를 가던지 집안일을 도왔다. 나는 중학교 1학년쯤에 집에 오신 손님이 두고 간 빵(시골 상점에서 파는 롤케익처럼 둘둘 말린 빵)을 생전 처음 먹어보고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있구나!"하고 며칠간 입속에서 그 맛을 잊지 못했다.
이 친구는 초등학교 때 몇 달을 결석했다. 아프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냥 형편이 어려워서 그랬겠지 하고 상상했었는데 이번에 결석한 사유를 실토했다. 친구가 들려준 얘기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장티프스에 걸려 머리가 다 빠지고 힘이 없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죽은 줄 알고 자신을 멍석에 말아 산에 묻으러 가려는데 꿈틀거려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 할아버지가 쥐를 잡아서 먹였다. 시골에서 구전으로 돌아다니는 대증요법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게 영양 보충이 됐으리라는 친구의 말이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된 그 친구는 1년 동안 날마다 십리 길을 걸어 다니며 나무를 하다가 "이대로 내 인생을 시골에서 썩힐 수 없다"고 결심하여 쌀 한 자루를 메고 서울로 향했다.
철공소에서 일하며 고등학교 졸업, 결국 MBA 과정까지 마쳐
서울 신당동 철공소에 들어가 열심히 일을 하며 기술을 연마했다. 성실하게 일을 잘하는 모습을 본 철공소 주인은 "내가 너를 공부시켜 주마"라고 하며 오후 2시까지만 일하게 하고 야간학교에 보내줬다. 1970년대 당시 먹고 자고 월급 1300원을 받던 시절이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그는 야간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4개의 자격증을 땄다. 졸업 후 77년에 엔지니어로 쿠웨이트와 사우디에서 일하다 82년에 돌아와 서울에서 건설업을 시작했다.
그 후 남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공장을 짓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원주에서 홍천까지 17공구 토목공사를 마치고 세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했다. 외국생활에 대한 동경을 꿈꾸던 그에게 때마침 담당 교수가 UCLA의 MBA과정을 추천해 미국으로 건너와 월·수·금 3일은 학교에 가고 나머지는 건설 현장에서 돈을 벌며 학업을 마쳤다.
다시 서울에 돌아와 건설업을 하던 그는 좀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뉴욕에 건너와 금방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대부분의 명문대 출신들이 할 일이 없어 세탁소를 경영하는 것과는 비할 바가 못된다. 친구는 "미국에 이민 오려면 기술을 배워 오는 것이 가장 빠르게 자리 잡는 길이다"고 했다.
호사다마던가! 잘 나가던 그에게 암초가 나타났다. 자신만 믿고 따라와 살던 부인이 유방암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았다. 3개월밖에 못살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한국인 의사에게 무릎 꿇고 "살려 달라"고 울며 빌자, 최후로 수술을 한번 받아 보자고 하여 수술 후 완쾌됐다.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도 임파선 암에 걸렸지만 완치됐다. 자신의 노력이면 다 이뤄질 줄 알았던 그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어 종교에 의지하게 됐다.
우연히 흑인에게 한국말로 놀리다 망신, 이후 말조심 해
어느 날 건설현장에서 작업 감독을 하는데 유난히도 새까만 흑인이 이층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옆에서 일하는 한국인에게 "저 친구는 완전히 연탄이네"하고 웃으며 말했다. 잠시 후 그 친구가 이층에서 내려와 "그래 연탄이다. 어쩔래?"하며 험상궂은 표정을 해 곤혹스러웠다. 알고 보니 그는 주한미군으로 8년간이나 근무했다.
미국에는 한국과 관계된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그 후론 항상 말조심을 하게 됐다. 가까이 사는 사람들과 의형제처럼 지내며 한국 친구로는 내가 처음으로 방문했다고 삼겹살파티를 벌여줬다.
만나본 한국 남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미국 생활은 여자들에게는 천국이다. 시댁에 안가고 경조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 밤이면 불안한 치안이며 불량 흑인과 싸웠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또 미국에서는 의료보험에 안든 사람은 아프면 살림이 거덜나는데 한국은 전국민 의료보험이 해당돼 부럽단다.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니 우리나라 드라마가 실시간으로 방영된다. 심지어 운전하다 한국 소식이 궁금해 라디오를 틀면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 TV나 라디오에서 한국의 암담한 소식을 들으면 답답해진단다.
월드컵과 올림픽 때는 교민들도 어깨가 으쓱해졌다는 친구는 한국이 잘 되기를 비는 건 해외교포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제발 고국에서 좋은 소식만 들려 왔으면 좋겠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