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업계에서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투자은행 붐이 일었다. 제조업의 시대는 끝나고 금융이 미래를 이끌어갈 핵심산업이기에 많은 역량을 금융에 쏟아야 하고 그 중에 첨단 금융공학으로 무장해 엄청난 수익을 내는 투자은행을 집중 육성하는 것이 선진국 도약의 유일한 길인 듯 했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일해서 돈을 번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들이 즐비한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지고 투자은행의 잇단 추락과 투자은행 모델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까지 일면서 한국판 골드만삭스, 메릴린치를 꿈꾸며 투자은행 전환을 야심차게 준비해온 국내 금융회사들의 당황하는 모습들이 역력하다.
더구나 앞으로 대형 투자은행 몇 개가 더 문 닫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아 지금의 금융위기가 어떻게 번져갈지 이젠 예측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왜 투자은행이었나? 투자은행은 일반은행에 비해 금융당국의 규제가 적고 자본금 의무 기준도 훨씬 약하다. 그래서 투자은행은 적은 자본을 가지고 레버리지 투자를 통해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국내 금융회사들은 이러한 투자은행의 높은 수익성에 주목한 것이었다.
불과 몇 명의 금융공학 전문인력만으로 한두 가지의 큰 건만 잘 해내도 웬만한 금융회사의 1년치 수익을 낼 수 있으니 군침이 도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고객의 예금없이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으니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고수익에는 항상 고위험이 따른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동안 첨단 금융기법에 의한 파생상품 투자의 달콤한 고수익에 현혹되어 위험을 망각했기에 오늘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첨단 금융공학이 새로운 수익모델을 만들어주었는지는 몰라도 투자의 위험을 제거해주지는 못 했던 것이다.
예대마진에 의해 돈을 버는 상업은행과 달리 투자은행의 주수입원은 유가증권 분야이다. 자신의 투자로 수익을 직접 만들어 내는 구조이다. 투자은행들은 최근 수년간 고도의 금융기법으로 파생상품을 활용해 큰 돈을 벌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부채를 자산으로 삼아 새로운 신용을 만들어 레버리지를 극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채를 자산으로 새로운 증권을 발생해서 투자자들한테 팔아 넘기고 이렇게 모은 돈으로 새로 대출을 해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증권을 발행하고…. 이렇게 끊임 없이 대출은 다시 증권화되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퍼져나간 것이다.
문제는 이것들이 끊임없이 엮여 있어 최초 대출자가 돈을 갚지 못 하는 상황이 되면 도미노처럼 무너져 연쇄적으로 지급 불능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금융위기 또한 주택담보 대출자들이 빚을 연체하기 시작한 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대형투자은행들의 몰락까지 가져온 것이다.
투자위험과 구조상 결함의 합작 높은 레버리지를 통한 파생상품 투자는 어쩔 수 없이 높은 위험을 지니고 있다. 투자위험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아무리 고도의 금융기법이라고해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파생상품 자체도 고위험 상품군에 속하는데 그 파생상품을 레버리지를 활용해 위험을 수십배로 부풀려 놓은 것이다.
여기에 투자은행의 속성상 오로지 고수익만을 추구하는 문화도 한몫했다. 안정자산을 운용하면 수천명의 직원이 달려들어도 고작 3~4% 수익을 내는데 반해 파생상품투자는 몇 명의 인원이 초단기에 30~40%의 수익쯤은 거뜬히 거두기에 리스크를 알면서도 외면해버린 것이다.
위험을 인지해도 내부통제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돈이 되는 곳에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었지만 정작 위험한 투자를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었다. 투자은행은 높은 수익을 거둔 직원들에게 엄청난 인센티브를 지급하면서 독려한다. 하지만 손실이 났다고 해서 결코 직원에게 손실 부담을 지우지는 않는다. 직원은 그냥 다른 투자회사로 옮겨가면 그만인 것이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스티글리츠 교수는 "복잡한 금융상품의 거래는 위험을 전가하고 자산가치 하락을 감추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고수익만을 좇는 투자은행의 속성상 치열한 머니게임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주력한 파생상품은 근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인 상품이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위험을 떠넘기는 상품인 것이다.
누군가는 파산하거나 큰 손해를 봐야 돈을 벌도록 설계된 구조 속에서 그들은 최신 금융기법을 통해서 자신들만은 위험에서 자유로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다가 너무 복잡해져버린 구조 속에서 전가한 위험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스스로 자기함정에 빠져버린 것이다.
투자은행 몰락은 우리들의 이야기지금의 금융위기는 빚을 내서 위험성이 높은 파생상품과 모기지증권을 사들인 금융회사들의 과욕이 부른 참극이다. 미국의 투자은행들의 몰락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분명하다. 리먼브러더스나 메릴린치의 이야기는 어느 특별한 사람들의, 나와 상관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빚내서 투자했다가 망한 이야기", "고수익만 좇다가 쪽박 찬 이야기"는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치열한 머니게임의 함정에 빠져있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몇 년간 불어닥친 부동산 열풍으로 인해 가계 부채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강남 부자들을 동경하며 그들처럼 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대형 투자은행들이 무너지고 나서야 투자은행 회의론이 등장하는 것처럼 강남 부자들이 망해야 강남 부자 회의론이 등장하게 될까?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도 머니게임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물론 3~5위의 투자은행이 무너지기 이전에 우리가 알지 못 하는 수많은 중소형사들이 무너지고 수많은 중산층 가정이 파산했다.
그나마 3, 4, 5위 정도 되니깐 언론에서 떠들어주는 것이다. 앞으로의 전망 또한 마찬가지다. 수개월 내에 이름 들어서 알 만한 대형사는 몇 개 정도 더 문닫을 가능성이 있는데 반해 우리가 알지 못 하는 1000개의 은행이 문 닫을 예정이라고 한다. 아마 이런 이치 또한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남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기 훨씬 이전에 이미 지방엔 미분양이 속출했다.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강남 부자들이 무너지기 전에 수많은 중산층, 서민 가정들부터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수익에 대한 욕심으로 필패할 수밖에 없는 머니게임에 뛰어들기보다는 자산의 건전성을 확립할 때이다. 세계 3위의 투자은행을 덥석 집어삼킨 것은 수십%씩 고수익을 내던 투자은행이 아닌 3~4%씩 차근 차근 수익을 쌓아올리면서 자산 건전성을 점검 받던 일반은행이었음을 기억하자.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금융위기라는 말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나도는 상황에서 지금의 금융위기는 사실 어디가 끝일지 알 수 없다. 물론 일부 전문가들은 리먼이 파산하고 메릴린치는 인수되고 AIG는 자금지원을 받기에 이젠 불확실성이 제거되어 금융시장이 안정될 거라고도 한다.
하지만 작년 8월 모기지 업체가 무너져서 긴급자금을 투입할 때도, 올 초 무너진 베어스턴스를 JP모건이 인수했을 때도, 불과 1주일 전 패니매와 프레디맥에 대한 지원을 결정했을 때도 늘 "이젠 괜찮다, 위기는 진정됐다"는 말이 나왔었다. 그렇기에 앞으로 금융시장과 세계경제가 정말 괜찮을 거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 앞으로도 한동안 세계경제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떤 외부 충격에도 견딜 수 있는 가정경제 구조를 만들어 놓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가정의 재무구조와 현금흐름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우선되어야 한다.
가정 내에 부채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면 금리와 물가가 오르고 자산가치가 하락할 때 미국 사람들이 그랬듯이 몰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펀드에 들어가 있는 자금 또한 수익률이 안 좋다고 무조건 환매하거나 손해라고 무조건 기다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3년 내에 필요한 자금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꼼꼼히 따져보고 그만큼의 자금을 안전자산으로 확보해서 인내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