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일요일, 무작정 자전거를 타고 안양천변으로 향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고 목적지도 없었다.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모처럼 한가했다는 것뿐.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어디론가 떠나보고 싶었다. 우선 올봄에 가보았던 서울 여의도 방면으로 방향을 잡았다. 늘 그렇듯 카메라 가방만 둘러맸다.
안양시 석수동에서 출발, 연현마을을 지나 서울시 금천구로 접어들었다. 바로 옆 동네인데도 서울과 경기도는 달랐다. 안양 길은 중간 중간 움푹움푹 패인 곳이 많았지만 금천구에 접어들고부터는 비교적 매끈했다.
왼편 개천에는 물오리가 '유유자적'하듯 '유영'을 하고 있다. 부러울만큼 한가한 모습이다. 사실, 이날 '유유자적'하듯 자전거를 타려고 했었다. 한가하게 경치를 즐기며 최대한 느릿느릿.
예전에 그랬다. 중학교 때 자전거 통학을 할 적에. 울퉁불퉁한 신작로 길을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며 느릿느릿 다녔었다.
안양천변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씽씽 내달리는 자전거들 사이에서 혼자만 느릿느릿 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 이었다. 일단, 마음이 바빴다. 분명 바쁜 일은 없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바쁜 듯했다. 남들이 모두 바빠 보였기에 덩달아 바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도 병이다. 알면서도 고칠 수 없는 병. 바쁘지 않으면 어쩐지 불안해지는.
여의도 선착장에 다다랐다. 등에서 땀이 흘렀다. 얼굴을 두건으로 가려서 나이를 알 수 없는 한 여성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하느라 기운이 다 빠져 버렸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는데 성가실 정도로 뒤에서 종을 울려댔다. 비켜 달라는 신호다. 비켜 줬다. '쌩'하고 지나가는 자전거는 내 자전거 절 반 정도 크기의 미니벨로였다.
순간 기분이 언짢았다. 그때부터 페달을 힘껏 밟았다. 고물 자전거는 '그륵 그륵' 소리를 내며 속도를 줄이라고 아우성을 쳤다.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미니벨로를 앞질렀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속도가 떨어지기만 하면 미니벨로가 내 자전거를 앞질렀다. 우린 이런 식으로 구로동에서 여의도 선착장까지 쉬지 않고 내 달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소리 없는 경쟁을 벌였던 것.
여의도 선착장에서 맥주를 건네주며 "자전거 잘 타네요. 이것도 인연인데 얼굴 좀 한번 봅시다"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불손한 마음으로 작업을 건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그런 것이 아니라 주머니를 뒤져보니 달랑 이천원밖에 없었다. 캔 맥주 한 개 값이다.
이천원으로 맥주 산 것 '후회막급'
서울 강남 양재천 부근에 다다랐을 때 기운이 거의 다 빠졌다는 것을 느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페달을 밟았다. 전 재산 이천원으로 물을 사지 않고 맥주를 사서 마신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갈증이 더 났다.
여의도 선착장에서 잠시 망설였었다. 안양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지 내친김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갈 것인지를. 가보기로 했다. 시원한 한강변 풍경이 잡아끄는 대로 몸을 맡기기로 했다.
양재 천변에서는 벼가 익어가고 있었다. 농촌 출신인지라 늘상 보아왔던 터지만 양재천변에서 보니 더 반가웠다. 제법 잘 만들어 놓은 허수아비도 있었다. 사물놀이패 복장이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진짜인 줄 착각했을 정도로 잘 만들어 놓았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니 무엇인가 먹고 있는 사람들이 유난히 눈에 잘 띄었다. "저… 물 한 모금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라는 말이 입안에서 빙빙 돌았지만 좀처럼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삶은 계란과 김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가족들 옆에서 잠시 휴식할 때는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모처럼 느껴보는 진한 배고픔이었다. 또다시 이천원으로 맥주 산 것이 후회됐다. 그 돈으로 물과 김밥을 사야 했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체력이 바닥나고 보니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앉고 싶고 눕고 싶었다.
양재 화훼단지를 지나올 때쯤에는 누군가 물을 마시고 있으면 염치 불구하고 한 모금 얻어 마시리라 작심을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곳에서부터는 그렇게 자주 눈에 띄던 '먹고 마시던 사람'들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과천에서 '구세주' 같은 팻말을 보았다. '화장실&음료대 있음'이란 팻말이다. 하천 둑 위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깨끗한 상수도니 안심하고 드세요'란 글귀가 음료대 위에 적혀 있었다. 아마 저런 글귀가 없어도 개의치 않고 마셨을 것이다.
수돗물을 이렇게 맛있게 마신 적이 또 있을까! 꿀맛이었다.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 몇 번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논산 훈련소에서 행군하다가 마신 논 물 다음으로 맛있는 물이었다. 행군 중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철모로 논물을 퍼서 마셨을 때도 꿀맛이었다.
수돗물 힘으로 안양까지 왔다. 아마 수돗물이 없었다면 개천 물이라도 퍼마셨을 것이다. 과천에서 안양 인덕원까지는 개천길이 끊겨서 찻길을 타고 달렸다. 집에 돌아와 뻗어버렸다. 배가 고팠지만 밥 먹을 힘이 없었다. 물 한 컵 들이키고 그대로…!
물과 음식이 소중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하루였다.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보다 더 귀중한 물건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구하다 보니 소중함을 모를 뿐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날 코스는 약80km 거리였다. 시간은 6시간 소요됐다. 밥 먹기 싫어하는 네살배기 아들이 10살 정도 되면 4천원 들고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은 자전거 여행 코스다.
평소 밥 맛없는 분들에게 안양에서 여의도를 거쳐 양재천을 지나는 약 80km 자전거 여행 코스를 권한다. 단, 주머니에 2000원만 넣고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