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틀째 아침, 우울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외형상 큰 문제는 없어보였지만, 찬영이가 밤새 보채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아침을 먹고 정형외과에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여유로운 호텔 조식을 특별히 좋아하는 나는 이번 여행에서는 그 사치를 포기해야 했다.
호텔에서도 상황이 상황인만큼 병원을 소개해주고 전용 미니버스도 내주었다. 찬영이를 병원에 데리고 간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애가 탔다. 다행히도 찬영이 다리 뼈는 이상이 없단다. 타박상 통증인 모양이다. 엑스레이도 찍었고, 정형외과 전문의 소견이니 다소 안심이 됐다. 하지만 아직 걷는 건 무리여서 찬영이는 호텔에서 빌려준 휠체어를 타고 하우스텐보스 여행에 나섰다. 큰아들은 휠체어에, 작은아들은 유모차에 태우고 햇빛 맑은 하우스텐보스를 누비기 시작했다.
하우스텐보스는 여러 존(zone)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뉴 스텃드 존'으로 향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대형 화면이 삼면에 펼쳐져 있고, 화면을 반사시키는 유리 천장과 바닥으로 둘러싸인 키라라 상영관이었다. 지구와 달의 관계를 설명하며 시작한 영화는 그래픽으로 만든 화려한 영상으로 지구의 역사를 짧은 시간 안에 보여준다. 꽃잎이 흩날리고 별들이 빛나던 장면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무대에서 실제 물이 폭우처럼 쏟아지던 극장이나, 미리 자기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 애니메이션 주인공이 되어볼 수 있는 상영관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몸이 불편한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였다. 찬영이는 휠체어를 탔다는 이유만으로 줄도 서지 않고 가장 먼저 입장해 가장 좋은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관람석이 2층일 경우에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했다.
이렇게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도 찬영이의 찡그린 얼굴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해적선(유람선)은 언제 타냐'며 성화다. 몸이 불편한 찬영이를 위해 유람선에 올랐다. 배가 천천히 바다를 유영하자, 마치 내가 짐을 가득 실은 네덜란드 무역선에 올라 일본으로 향하고 있는 느낌이다.
17세기부터 일본과 네덜란드는 활발한 교역을 펼쳤다. 그 흔적이 큐슈에 많이 남아있는데, 나가사키의 명물 카스테라도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들어왔다. 하우스텐보스가 이 곳에 세워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둘째 유찬이가 잘 먹고 잘 자고 구경도 잘하는 게 큰 위안이 됐다. 걱정했던 콧물 기침도 자취를 감추었다.
맑은 공기 덕택일까, 아니면 끼니 때마다 먹고 있는 차완무시와 연두부 덕분일까? 배가 부르니 칭얼대지도 않고, 사진기 앞에서 이쁜 표정도 잘 짓는다. 잔뜩 뿔이 난 형과는 반대다.
1박2일에 걸쳐 하우스텐보스를 천천히 둘러보고, 오후에 두번째 행선지 코라손 호텔로 향했다. 하우스텐보스를 떠나며, 젠니쿠 호텔에서 위로용으로 준 피카츄 인형을 받고서야 찬영이는 조금 마음이 풀린 듯 했다.
하우스텐보스와 사세보 중간쯤에 위치한 코라손 호텔은 신혼여행용 리조트처럼 보였다. 사전에 연락을 취한 덕분에 찬영이는 그 곳에서도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지중해풍으로 지어진 낮은 건물에 야외 수영장이 있었고, 잘 다듬어진 잔디밭도 보기 좋았다.
한 방에 침대와 다다미방이 절반씩 꾸며져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다다미 특유의 냄새만 빼면 만족스러웠다. 료칸(일본 전통여관)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딱이었다. 게다가 한적한 바닷가 어촌 마을과 잔잔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밖 전망이라니!
해가 저물기 전에 찬영이를 데리고 수영장에 갔지만, 다친 다리 때문에 눈물만 쏙 빼고 말았다. 옷을 갈아입히고 저녁식사를 했다. 호텔 요금에 포함된 저녁식사는 료칸에서 맛볼 수 있는 일본 전통요리인 가이세키였다. 역시 눈으로 먹는 일본 음식답게 예쁘고 정갈하고 맛도 좋았다. 유찬이는 여기서도 차완무시와 두부, 따뜻한 두부 계란탕을 훌륭히 소화했다. 단백질 과잉 아닌가 모르겠다.
방으로 돌아와 씻고 피곤한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호텔 1층 온천으로 갔다. 시에스타(siesta), 온천 이름 한 번 맘에 든다. 전날 젠니쿠 호텔보다 시설은 좀 떨어졌지만, 노천탕에서 밤 바다를 바라보며 즐기는 온천욕은 노곤한 행복으로 다가왔다.
다음날 아침 식사. 양식과 화식(일본식)이 함께 나온 뷔페였다. 가짓수가 많지는 않지만, 정성스런 음식이었다. 이날은 얼른 두부와 김, 생선구이로 유찬이의 아침을 먹이고 나서 남편에게 30분 간 나만의 아침식사 시간을 부탁했다. 내가 여행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호텔 조식 먹는 때다. 오랜만에 혼자 앉아 아침을 먹으니 세상이 평온하다. 일본식 진한 커피로 마무리하고 아쉬운 시간을 마감했다. 찬영이도 다리가 많이 좋아져 약간 절긴 하지만 잘 걷는다. 이제 휠체어와도 안녕이다.
다시 하우스텐보스역으로 가 후쿠오카로 향했다. 대도시 후쿠오카는 내게 별다른 매력이 없다. 도시 여행은 뭐니뭐니해도 쇼핑과 밤거리 산책인데, 애가 둘이나 딸린 엄마가 그런 걸 바랄 수는 없지.
크루아상 냄새가 진동하는 하카다역에 내려 숙소인 컴포트 호텔로 갔다. 여느 비즈니스 호텔처럼 분명히 작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웬걸, 우리가 묵을 방은 가족 4명이 묵기에 넉넉했다. 침대도 셋이나 되고, 아기침대도 별도로 분지돼 있었다.
짐을 방에 들여놓고는 호텔을 나섰다. 여행사에서 우리를 위해 미리 호텔에 맡겨둔 유모차에 유찬이를 태웠다. 인천공항에 아기 멜빵을 두고온 탓에 잠시 이동할 때는 불편했지만, 숙소에 짐을 풀고 움직일 때는 준비된 유모차 덕분에 큰 불편이 없었다.
귀국 전날, 다양한 아기 용품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유아용품 백화점 '아가짱 혼포'에 들렀다. 이름만 들어봤지 그 규모를 알 수 없었는데, 가 보니 4층짜리 대형빌딩에 아기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임신복부터 시작해서 아이들의 옷과 신발, 유모차, 기저귀, 이유식, 각종 용품들…. 없는 것이 없었다. 값도 저렴하고 기발한 아이디어 상품들이 많아서 자꾸만 손이 간다. "어머, 맞어. 나도 이런 거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를 연발하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재미있었다.
옷은 신생아용부터 130 사이즈까지 있다. 기저귀를 하나씩 비닐로 감싸 버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전용 쓰레기통, 분유에 가장 적절한 온도인 70도씨까지만 끓는 전기 포트, 흰 쌀죽부터 스파게티·팔보채까지 있는 이유식, 빨대 달린 생수병 뚜껑, 직접 착용해볼 수 있게 진열해둔 30가지가 넘는 아기띠…. 다 사고 싶었으나 갑자기 오른 환율에 주저하다가 찬영이를 위해 장난감 기차를 하나 사고, 유찬이 모자와 옷, 이유식과 과자를 몇 개 샀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저녁식사 시간이 됐다.
언제 또 오겠냐는 마음에 첫날 들렀던 100엔 스시집에 다시가서 저녁을 먹었다. 이번에는 남편과 생맥주까지 한 잔씩 마셨다. 호텔로 돌아와 찬영이와 유찬이를 씻기고 침대에서 뛰고 놀고 있는데, 남편이 슬쩍 '저녁에 밖에 좀 나갔다 오겠다'며 허락을 구한다. 간만에 일본에 왔으니 후배와 이자카야(선술집)에서 사케 한 잔을 하겠다는 것이다. '어허,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냐? 나는 뭐 안 가고 싶냐구? 자기만 나가 밤을 즐기고 오겠다는 거야? 이거 가족여행 맞냐?' 억울한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 하나 못하는 것도 슬픈데, 남편까지 끌어들일 필요 뭐 있나'. 흔쾌히 윤허를 내렸다. 남편은 밖에 나가기 전에 찬영이를 데리고 나가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밤참거리를 사들고 왔다. 남편이 나간 뒤 좀 놀다보니 아들들이 졸립다고 난리다. 침대에 하나씩 눕혀 재우고 나도 곯아 떨어졌다. 놀러나간 남편은 언제나 오려나…. 다음 번에 오면 내가 나가 놀아야지 하다 잠이 들었다.
여행 마지막 날 아침. 눈도 뜨기 싫고, 집에는 더욱 가기 싫고. 찬영이는 좋아하는 토스트와 삶은 달걀, 유찬이는 전날 산 이유식을 데워 아침을 먹었다. 이렇게 여행에 잘 적응하다니, 너희들과 나는 아무래도 천생연분 모자지간인가 보다.
아침엔 전날 아쉬웠던 아가짱 혼포에 다시 가서 몇 가지 물건들을 더 샀다. 그리고는 하카다항에 가서 전망대에도 올라가보고, 유명한 모모치 해변에도 갔다. 모모치 해변은 지중해풍 교회가 아름답게 자리잡고 넓은 백사장이 펼쳐진 곳. 가는 길에 택시 기사가 내내 야구 이야기를 하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 소프트뱅크의 야후 돔구장이 근처에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인상적인 활약상을 보여준 '이승엽상' 이야기가 태반이었다.
찬영이는 바다를 무지 좋아한다. 요즘 한창 물고기 잡는 법을 연구하고 있고, 장래 희망은 어부로 굳어지고 있었는데, 마침 바다에 왔으니 가슴이 설레나 보다. 그런데 비행기 시간 때문에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또다시 뿔이 났다.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신발을 벗고 모래사장으로 들어가 조개를 줍기 시작했다. 처음 다섯 개로 시작한 조개껍질은 금방 엄마 운동화 한 짝을 가득 채웠고, 그제서야 맘이 풀린 큰아들이 돌아가잖다.
잠든 유찬이와 찬영이를 앞세우고 나폴리 피자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다. 이번 일본여행에서의 마지막 식사였다. 바닷가 야외 좌석에 앉아 맛난 피자와 스파게티로 점심을 해결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하카다역에서 유명한 크루아상을 사서 맛을 봤다. 아가짱 홈포 쇼핑 덕분에 늘어난 짐을 바리바리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이코노미석 맨 앞좌석을 배정받았다. 일본에 올 때처럼 아기침대도 달았다. 유찬이가 마침 잠이 들어 침대에 재우니 잘도 잔다. 미리 부탁했던, 아기용 기내식은 안타깝게도 아기용이 아니라 어린이용이었다. 달콤한 과일과 크림샌드 비스킷이 나왔다. 아마도 어린이 간식용이 아닌가 싶다. 유찬이 덕분에 찬영이만 수지 맞았다. 돌아오는 길은 왜 이리 짧은지…. 금세 인천공항이다.
머릿 속으로만 꿈꿔왔던 가족여행, 그것도 해외로 나가는 여행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꿈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남편이 자기
블로그에 여행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써놨다.
"여행은 드넓은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뱃속의 아기를 위해서 태교에 쏟는 정성이라면, 오감으로 만물과 소통하는 아이에게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어리다도 못 느끼는 게 아니다. 느끼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 우리 가족은 4인4색의 경험을 한 것이다. 이 여행기는 그 경험 가운데 1/4인 엄마의 느낌이다.
덧붙이는 글 | 나와 남편, 그리고 찬영이와 유찬이 4명의 일본행 가족여행은 우연찮은 행운처럼 다가왔다. '값싸고 친절한' 가족여행 상품을 찾다 지친 남편이 여행박사쪽에 가족여행 상품 개발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 뒤 여행박사는 그 아이디어를 현장에 접목시켜보려고 했고,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우리 가족에게 직접 '모델'이 돼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좌충우돌 가족여행'은 여행박사(www.tourbaksa.com)의 도움으로 이뤄졌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