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정말 그럴까? 세상이 생기기 전에는 태양도 없었을 터이니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이 두 쪽 나도 변하지 않는 것을 진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우주)이 두 쪽 나면 태양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세상이 두 쪽 나도 변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어머니가 계신다는 대명제이다. 그렇다. 세상에는 어머니가 계신다. 어머니가 있었고, 그리고 지금 내가 있다. 이것은 세상이 두 쪽 나도 변할 수 없는 진리요, 사실이다.
내게도 어머니가 계셨다. '계신다'라고 하지 않고 '계셨다'라는 과거형의 말을 사용한 것은 물론 지금 어머니가 생존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비교적 일찍 어머니는 여의었다. 그런 까닭인지 몰라도 장성한 어른이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어딘지 낯설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전교조와 순천청소년축제 등을 인연으로 알게 된 박종선(순천금당고 미술교사) 선생님이 어머니와 함께 모자(母子) 개인전을 열게 되었노라고 모자의 프로필과 전시될 그림이 실린 두 권의 작은 책자를 내게 전해주었을 때도 그런 묘한 감정이 일었다.
"어머니가 작년에 칠순이셨는데 사실은 그때 모자 개인전을 할까 하고 전시회장 예약까지 했었어요. 그런데 어머님이 좀 더 준비해서 열자고 하셔서 올 해 하게 되었지요. 어머니 성품이 워낙 올곧고 고고하셔서 다른 분들에게 폐가 되어선 안 된다고 오픈행사나 언론에 적극 알리는 것을 마다하셨지요. 그림만 좋으면 된다면서요."조경자. 박 교사가 내민 작은 그림 책자에는 어머니의 존함이 그렇게 적혀 있었다. 사진으로 찍혀 나온 조경자 화백의 빼어난 수묵채색 그림을 몇 편 감상하다가 나는 문득 화가에게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그림에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좋다' '아름답다'라는 원색적인 탄성만을 자아냈을 뿐, 그 좋고 아름다움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죄송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책상 앞에 놓인 달력에 큰 글씨로 '박종선 선생님 모자 개인전이 있는 날'이라고 표시를 해두었다. 그리고 며칠 뒤인 9월 25일, 함께 근무하는 동료교사 몇 분을 선동(?)하여 모자 개인전이 열리는 순천문화예술회관으로 향했다. 시를 자주 읽으면 시가 보이듯이 그림도 자주 보다보면 그림이 보이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순천문화예술회관 제 1전시실에서는 어머니 조경자 여사의 개인전이, 제 2전시실에서는 아들 박종선 선생의 개인전이 나란히 열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어머니 조경자 화백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전시된 작품을 둘러보았다. 이미 책자를 통해 익숙해진 그림들이 마치 친근한 누이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문득 그날 박 교사가 내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 그림을 보면 늘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어머니는 그림을 시작한지 30년이 넘으셨는데도 인내와 집중력이 대단하셔서 한 번 붓을 잡으면 식사도 거르고 온종일 그림에 몰두할 때도 있습니다. 그림은 표현력뿐 아니라, 얼마만큼 성실하게 많은 시간을 화지와 대면하였는가가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그 끈기와 인내심이 존경스럽고 많은 자극이 됩니다."드디어 어머니 조경자 화백을 만났다. 박 교사가 나를 동료교사이자, 오마이뉴스 기자로 소개했지만 내 손에는 기자 수첩이 들려 있지 않았다. 그냥 아들 친구처럼 편하게 앉아 어머니 조경자 여사가 들려주시는 옛이야기를 편하게 듣고 있었다. 그 시간이 당신에게도 편하게 느껴지셨던지 다음날 아침 박 교사에게 이런 내용의 메일이 왔다.
'어제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효산고 선생님들이 많이 오셔서 축하의 말씀을 해주시고, 특히 선생님과 편안하게 격의 없이 즐거운 대화를 나누셨다고 어머님도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그 편지를 보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기자처럼 행동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너무 '편안하게 격의 없이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보니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것이었다. 그 기억의 편린들을 대강 짜 맞추고 박 교사가 전해준 이야기를 일부 참고하니 대강 이런 스토리가 잡힌다.
조경자 화백의 외가는 광주 송정리이다. 박 교사에게는 외조부가 되시는 조 화백의 부친은 박 교사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에 돌아가신다. 박 교사는 초등학교 시절, 부산이나 영암 등에 사시는 외삼촌과 이모 댁에 외조부님과 함께 여행을 다니곤 했다. 그때 외조부께서 작은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연필로 산 능선이며 바닷가 바위들을 스케치하셨다고 한다.
박 교사가 먼 그림으로 화가이신 외조부님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의 모친 조경자 여사는 가까운 거리에서 부친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뿐만 아니라, 박 교사의 작은 외조부, 외삼촌, 이모들 중에도 화가가 몇 분 계신다고 한다.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던 조경자 화백이 본격적으로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전주에서 연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그때부터이다. 1958년에 광주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17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였고, 그 후 10년 남짓 피아노교습소를 운영하고 난 뒤의 일이다.
조 화백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후세에 이름을 알리고 싶은 화가로서의 성취욕보다는 완성된 한 편의 그림 그 자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순수한 예술가로서의 열정을 담금질하기 위해 조경자 여사는 회갑을 눈앞에 둔 1996년 우석대 부설 사회교육원(한국화)에 입학하여 1998년까지 2년 과정을 수료하기에 이른다.
조 화백의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1994년 아주국제수묵화전과 한․중교류전 등 국제전에도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1997년에는 우화회 창립전을 전북삼양문화공간에서 개최하였고, 올해는 제 6회 우화회전을 전북예술회관에서 개최했다. 현재 조 화백은 우화회원으로 활동 중이시다.
한편, 제 2전시실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박 교사는 자신보다는 모친의 개인전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도 개인전은 처음이지만 1994년 민중미술 15년 전(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2007년 여순사건 57주년 역사적재조명전(여수, 순천, 보성), 2008여수국제아트페스티벌 특별전(여수여문공원, 거북공원, 복촌갤러리)등에 이르기까지 민중미술가로서 활발할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박 교사는 내년쯤 순천지역에 민예총 지부를 함께 만들어 활동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번 전시회는 풍경과 꽃을 많이 그렸는데 다음 전시회에는 교육현실과 학교아이들 모습이며 주변의 소외받는 사람들이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민중미술가 다운 말을 하기도 했다.
박 교사는 순천청소년축제위원으로 10년째 일하고 있다. 그가 그린 어떤 빼어난 그림보다도 어린 제자들과 함께 순천동천에 남긴 벽화를 나는 사랑한다. 조경자·박종선 모자 개인전은 9월 25일부터 9월 30일까지 순천문화회관에서 전시되고, 10월 12일부터 11월 1일까지 복촌갤러리에서 전시된다. 그가 쓴 초대의 글을 대신 전하며 부족한 글을 갈무리할까 한다.
첫 개인전.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마음속 이야기를 다 못하는 첫사랑처럼, 수줍은 얼굴이 먼저 나서서 인사할 거라 보여집니다. 메시지보다는 이미지의 언어로 말하는 그림의 세계이지만, 함께 자리해주셔서 우리 사는 세상의 한 풍경과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웠으면 좋겠습니다. 꽃 한 송이 챙겨들고 당신과의 만남을 기다립니다. 참 아름답고 소중한 당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