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 그는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미국 예술계의 이단아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라식 수술로 잘 알려진 엄승룡(47·눈&아이안과) 원장도 대한민국 안과계의 '이단아'로 불릴 만하다. 의학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겠다고 소장 미술품을 병원에 잔뜩 걸어놨으니 말이다. 그 가치만 무려 20억원 정도라고 한다.
그 중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은 '행복한 콧물'이다. '행복한 눈물'이 아니다. 독특한 작품 세계로 유명한 이화백(본명 이기섭)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패러디한 '걸작'이다. 엄 원장이 '앤디 워홀의 다른 생각'을 간판으로 걸고 있는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popart)를 통해 '행복한 콧물'이어야 한다고 '진단'한 이유 또한 흥미롭다.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의 젊은 여자 분은 누도관 폐쇄(눈물길 막힘) 환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눈물길이 막힌 것입니다. 원래 눈과 코는 비루관이라는 작은 관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뻐서 울던, 슬퍼서 울던 눈물이 코를 통해서 콧물로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그런데 '행복한 눈물'의 여자 분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콧물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 누도관 폐쇄는 나이 드신 분에게 많답니다. 젊은 사람에게 아주 드문 누도관 폐쇄라는 진단명을 '행복한 눈물'의 주인공에게 붙이는 것은 너무 잔혹한 것 같습니다. '행복한 눈물'이 '행복한 콧물'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동네 "미쳤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지만…"25일 강남역 코앞에 있는 그의 병원을 찾아가 봤다. 우선 지나치게 넓었다. 갤러리로 꾸며놓은, 방문객이 대기하는 공간 넓이가 그랬다. '행복한 콧물'을 비롯한 15개의 팝아트 작품이 곳곳에서 다양한 '주제'를 뽐내고 있었다. 일단은, 대한민국에서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곳과 어울리지 않는 무모한 '투자'로 보였다.
엄승룡 원장도 인정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왜 그렇게 넓은 공간을 할애하느냐고, 미친 짓 아니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의술만 주고받는,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갈증"과 "내가 일하는 공간을 일부 할애해서 예술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고 말했다.
허나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강남역 개원의'에 대한 선입관이 컸다. '그런 취지를 살리기에는 동숭동이 더 낫지 않은가'란 질문을 던지자 엄 원장은 "문화다운 문화가 없고 소비만 있는 불모지에서 새로운 개척자가 되고 싶어서"라 답했고, '병원 홍보를 위한 전략 아니냐'는 까칠한 질문에는 "김태희, 보아 등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들 수술로 지명도도 높였고, 금전적으로도 많은 부를 얻었다"고 응수했다.
엄 원장은 "의사는 도네이션(기부)할 수 있는 기회나 여유가 많은 직업"이라고 강조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도네이션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앞으로도 "그림 몇 점 놓고 갤러리 흉내만 내고 싶지 않다"면서 "주기적으로 전시품을 교체하고 신예 작가들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나아가 '문학의 밤' 등 행사를 위해서도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단순히 의술만, 테크닉만 전달하는 것이 의사?"- 먼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20년 가까이 안과 전문의로 일하면서, 단순히 의술만, 테크닉만 주고받는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그 이상을 병원에서 줄 수는 없을까, 또 다른 뭔가를 환자와 주고받고 싶다는 갈증이 항상 있었다."
- 또 다른 '뭔가'가 왜 미술이 됐나."기본적으로 나에게 예술적 성향이 있는 것 같다.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고,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있다. 그러다 2년 전부터 미술 쪽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침 작년이 안식년이어서 새로운 안과 컨셉을 잡기 위해 고민하다 미술로 확정했다. 미술이라는 것, 결국은 보고 느끼고 감동 받는 것 아닌가. 수술 후 맨 눈으로 좋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광명의 기쁨을 더욱 크게 느껴보시라는 뜻을 담기로 했다. 우리 병원에서 안과와 문화가 실질적으로 접목되는 부분이다."
- 병원은 언제 개원했나. 현재 직원 규모는?"올해 6월에 개원했다. 직원은 간호사, 검안사, 상담사 등 6명이다. 수술이나 진료는 나 혼자 하고 있다."
"예술은 공유하는 즐거움" "문화 불모지 강남역에 아쉬움"
- 갤러리 역할을 하고 있는 환자 대기 공간이 상당히 넓더라. 알다시피 강남역 앞은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동네다. 거기다 수술도 혼자 한다고 하니, 금전적 손해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사실 지인들이 많이 말렸다. 병원 면적이 330㎡(100평)쯤 되는데, 그림들이 걸려 있는 공간이 절반 정도 된다. 임대료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동네에서 왜 그렇게 넓은 공간을 할애 하냐고, 미친 짓 아니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비싼 그림 혼자 보면서 좋아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보다 예술은 공유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공간을 일부 할애해서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더 행복하지 않겠나."
- 그런데 왜 하필 강남이었나. 그런 취지를 살리기에는 동숭동이나 홍대 앞 같은 동네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여기가 쉽게 얘기하면 시력교정술의 메카다. 강남역에서 안과를 여는 것이 많은 안과의사들의 꿈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만 한 8년 정도 일하다 보니까, 그런 실질적인 면도 고려했던 것이 사실이다. 자연스럽게 강남역 주위 속성도 알게 됐는데, 이곳은 문화다운 문화가 없다. 소비만 있다.
그 소비도 어떤 패턴이나 색깔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명동 뒷골목 하면 아주 오래된 음식점이나 먹을거리 문화의 정취, 청담동 하면 무슨 럭셔리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 소비에도 문화가 있다고 보는데, 여기는 사람 많고 왕래도 많은데 문화가 없다. 근방에 갤러리도 하나 없는 걸로 안다.
이런 것을 어떤 이들은 다양성이라고도 하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각각의 색깔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다양성 아닌가. 여기는 색깔 자체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소비만 있을 뿐이다. 문화의 불모지인 셈이다. 그래서 어떤 도전의식이 생기더라. 자만 또는 교만일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개척자가 되고 싶다."
김태희·보아도 수술했지만..."의사는 도네이션해야"- 병원 홍보를 위한 또 다른 전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솔직히 든다."색안경을 끼고 볼 수도 있겠다. 글쎄… 김태희, 보아 등 유명 연예인이나 정치인 수술 경력이 많다. 안과계에서 시력교정 수술로는 몇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한다. 시력교정 분야에서는 속된 말로 각을 세운 것이다. 지명도도 높아졌고, 금전적으로 많은 부를 얻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해 볼 건 다 해봤다는 이야기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만 생각한다면, 그만큼 홍보비를 더 투입하면 그만이다. 굳이 이렇게 그림을 전시할 이유가 없다. 기업도 메세나 운동하지 않나. 이제는 병원도 이익 창출 이상의 공익을 선도해야 할 때라고 본다."
- 이익만 쫓는 의사들이 많다는 인식이 넓게 퍼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런 인식을 깨고 싶은 것이다. 환자들이 가장 정확히 안다. 이 사람이 나를 위해 진료하는가, 아니면 돈벌이로 여기는가를. 이 부분에 많은 의사들이 소홀히 하는 것 같다. 당사자로서 의사들 책임이 많다고 생각한다. 사실 의사 스스로 공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한 달에 한 번 외국인 노동자 진료하러 가는데, 의사는 도네이션(기부) 할 수 있는 기회나 여유가 많은 직업이다. 무엇보다 의사 본인 마인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예 작가의 전시공간으로, 문학의 밤 행사에도 오픈"
- 블로그를 연 것도 그래서인가."그렇다. 글쓰기 실력은 부족하지만, 얼마든지 의학과 문화가 접목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 평소 안과 진료와 관련하여 궁금증을 갖고 있는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넓히고 싶었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소개해달라."그림 몇 점 놓고 갤러리 흉내만 내고 싶지 않다. 좋은 그림을 빌려줄 분들이 꽤 있다. 메인 작품은 그대로 가되, 주기적으로 그림을 교체할 생각이다. 또 이 공간을 역량 있는 신예 작가들에게 오픈 해주고 싶다. 대가들이야 전시할 곳 많지 않나. 그런 식으로 활성화되면 전문 큐레이터를 상주시킬 생각이다.
또 진료 없는 밤에는 시간과 공간 활용이 자유롭다. 30∼40명 정도는 충분히 수용 가능한 공간이니까, 문학 동호회 같은 곳에서 '문학의 밤' 장소로 활용하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오픈할 생각이다. 비록 커피믹스 정도밖에 없지만, 젊은이들, 여기서 약속 잡고 만나는 것도 환영한다.
어차피 진료와 관계없이 오픈한 문화 공간이다. 모쪼록 우리 병원이 문화의 불모지 강남역 부근에서 문화적 명소가 됐으면 한다. 다소 선정적으로 표현하자면, 20억짜리 문화 공간을 오픈했다. 의술 뿐 아니라 예술과 문화도 있는 공간, 그래서 여기서 일하는 우리나 찾아오는 사람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공간, 그것이 내가 꿈꾸는 병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