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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꼭 숨은 제주의 여성성을 살려낸 제주 여성, 서명숙

 

서명숙은 내가 아는 제주 여성 중에서 우리 엄마 다음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여성이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시사저널> 파업기자들을 돕기 위해 싸움판 한복판으로 들어가던 때다.

 

"'짝퉁' <시사저널>을 고발합니다"로 필화에 연루된 상황을 가볍게 떨쳐버리고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떠나는 먼발치에서 위태롭게 지켜보던 때가 생각난다. 한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 후로 소송에 말미암은 사람들이 늘어났고 기자들은 회사와 결별수순을 밟고 있었다. 마침내 먼 순례길을 마치고 그가 돌아올 때는 기자들과 독자들이 세상의 온갖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새 매체를 일으켰을 시점이었다.

 

와인과 현지의 치즈를 한아름 들고 나타난 티없이 맑은 자태의 거무스름한 아줌마는 과연 이국의 정취를 한껏 안고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아줌마가 스트레스가 많아서 좀 풀려고 갔구나' 정도만 생각했지, '제주 자연길'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들고 온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제주는 '여성'의 섬이다. 모든 자연 경관과 사람들의 마음이 섬세하고 온화하다. 하지만 제주를 방문해서 '여성'의 이미지를 찾기는 매우 힘이 든데, 그것은 남성적인 힘에 지배를 많이 당해서 '보이는 부분'은 이미 남성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탑동 부근에 이마트가 생겨난 이후로 제주 동문시장과 재래시장 등 상권이 거의 붕괴되었는데, 얼마 전 신제주에 이마트 2호점이 생겼고 롯데마트도 생겼다. 성산일출봉의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있는 신양리 해수욕장에는 삼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보광이라는 회사에서 대규모 호텔단지를 조성해서 순식간에 '인스턴트 관광지'가 되고 말았다. 이 외에도 제주는 '패키지'라는 치밀한 괴물에 산채로 잡혀 여성성은 아주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그것을 서명숙이 찾아낸 것이다.

 

서명숙은 서귀포 바당(바다) 출신, 나는 성산포 바당 출신

 

 낮은 구름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는 오름 한켠에 앉아서 제주의 격정적인 바람을 맞고 있는 소녀는 서명숙의 분신으로 보인다.
낮은 구름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는 오름 한켠에 앉아서 제주의 격정적인 바람을 맞고 있는 소녀는 서명숙의 분신으로 보인다. ⓒ 북하우스

 

서명숙과 나는 유년이 겹친다. 비록 사회적 경력으로 따지자면 내가 '삼촌'(제주에서는 부모 외에 어른을 모두 '삼촌'이라고 부른다)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이 책에서 '소녀 서명숙'을 만나면 왠지 맘먹고 싶어진다는 거다.

 

'서명숙의 유년'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와랑와랑(이글이글)한 햇볕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흙길을 팬티와 수건이 담긴 세숫대야를 옆구리에 끼고 걸어가던 여름날이, 바닷속 날카로운 돌멩이가 여린 발바닥을 찢어놓는데도 우린 아랑곳하지 않았다. 짠물을 너무 들이켜 목이 다 쉬고 귀가 멍멍해질 때까지, 우린 몇 번이고 물속에 들락거렸다.

 

입술이 새파래지고 으슬으슬 몸이 떨려오면 내팡돌에 엎드려서 꼬치처럼 몸을 굴려가며 햇볕에 말리곤 했다. 그러다 몸이 덥혀지면 다시 바닷물에 뛰어들고, 운동신경이 젬병인 나는 개헤엄이 고작이었지만, 내 또래인데도 자맥질을 해서 미역이랑 소라 따위를 건져 올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여태껏 내가 먹어본 가장 맛난 성게는, 소낭머리 맞은편 너럭바위에서 몸을 말리고 있을 때 친구가 잡아와서 나눠먹은 것이었다. 새까만 성게를 돌멩이로 내리치는 순간 터져나온 노오란 속살! 갯내음 물씬한 그 맛을 어찌 잊을까.

 

지치도록 놀다가 타박타박 돌아오는 길, 그제야 지구리로 오던 동무들이 다시 돌아가자고 붙든다. "맹숙아, 자구리 가게." 집에 서둘러 가야 하는 날에는 도리질치지만, 대부분은 동무를 따라 바다로 되돌아가곤 했다. 바다가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제야 "어멍(엄마)한테 욕들으키여" 하면서 서둘러 머리를 말리곤 했다. 제주 바당은 그렇게 우리의 어린 영혼을 살찌우고, 여린 근육을 다져주었다.

 

- <제주 걷기 여행>, 본문(23~25쪽) 중에서

 

'승주나무의 유년'

 

 성산포와 서귀포는 형제다. 그 구비치는 주상절리는 서귀포의 전매특허지만, 주상절리보다 높게 솟구치는 파도는 성산포가 일품이다. 이것은 서명숙도 인정해야 한다. ('승주나무'는 기자의 블로그 필명)
성산포와 서귀포는 형제다. 그 구비치는 주상절리는 서귀포의 전매특허지만, 주상절리보다 높게 솟구치는 파도는 성산포가 일품이다. 이것은 서명숙도 인정해야 한다. ('승주나무'는 기자의 블로그 필명) ⓒ 오승주

바닷가에서 태어난 나는 방학이 되면 아침 먹고 바닷가로 뛰어갔다. 해변에서 잘 생긴 짱돌을 하나 쥐고 썰물이 만들어놓은 신천지를 걸어서 갔다. 신천지에는 언제나 소라며 성게, 굴 같은 것이 가득했는데 점심은 그걸 깨먹으면서 해결하고 해가 빨갛게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바다의 이름이 세 개 있었는데 각각 오정께, 통밭알, 수메밑이었다. 수메밑과 오정께는 일출봉을 빙 둘렀다. 일출봉은 나에게 미지의 세계였는데, 수메밑으로 해서 일출봉을 삥 둘러서 걸어봐야겠다는 나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출봉 뒤쪽에는 돌고래들이 둥지를 틀었다는데, 직접 보고 싶었다.

 

오정께는 아침의 바다였다. 물질하는 우리 엄마는 수메밑에서는 해삼물을 캐다가 오정께 옆에 있는 우뭇개에서 관광객들에게 파는 일을 했다. 엄마가 바다에 갔다가 벗어놓은 몸빼바지에서 나는 바다내음이 너무 좋아서 밤새 그것만 붙잡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바다 냄새와 엄마의 살내음이 땀내음이 함께 전해져 왔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혀지기도 하고 야릇한 구석도 있을 테지만, 어렸을 때는 그것을 어찌 알겠느냐.

 

수메밑으로는 멸치떼 같은 것들이 모래사장까지 밀려오기도 하는데, 그때는 잔치라도 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 멸치떼를 잡아갔다. 가끔 밀물에 밀려왔다가 바위 웅덩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어린 고기떼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서너 시간은 족히 재미를 볼 수 있었다. 고기떼들은 쪼로롱 쪼로롱 떼를 지어 가다가 가끔 한번씩 몸을 비틀어서 은빛 비늘을 뽐냈다. 한번은 새끼 복어가 걸린 적이 있었는데, 뜰채로 홱 낚아채니 화가 단단히 난 듯 삐익~ 소리를 내며 몸을 한껏 부풀리는 거다. 나는 겁이 몹시 나서 물가에 던져 버렸는데,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우습기 그지 없었다.

 

- 5월 5일, 어른에게 더 절실한 어린이날

 

이처럼 느리고 게으르고 낭만적인 소녀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수십 년을 굴렀다. 서울사람보다 더 깍쟁이가 되었고, 서울 기자보다 더 날카롭고 빠르고 까칠했다. 그를 물가에, 아니 서울 한복판에 보낸 제주의 바다는 그가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맑은 바람을 어김없이 선사해 주었다.

 

나도 언젠가는 제주로 돌아갈 것이다. 서명숙은 가슴속에서 청순한 소녀를 귀환시키고 연륜과 인맥을 이용해 제주의 길을 되살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큰 빚을 진 느낌이다. 나의 '제주'는 제주 올레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여행서, 아포리즘, 자서전, 에세이의 종합판이다

 

<제주 걷기 여행>이라는 제목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다. 얼핏 보면 '여행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오랜 세월 감정의 앙금이 쌓인 동생과의 재회 과정과 서명숙의 유년을 살지게 했던 '길'이 주는 성찰적 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림들에 대한 회상이 저널리스트의 대중적인 문체로 기록돼 있다. 가끔 서명숙과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기는데, 동향 출신이라 그런지 금방 마음이 통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카페에서 작가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좀 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이고 사유가 듬뿍 담긴 문체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이 책이 다소 유치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 책의 한줄 한줄은 모두 돌담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듯 신천지를 펼쳐낸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무게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슬로우'라는 개념을 환기할 수 있었다. 속독과 속보에 익숙한 나에게 '게으른 독서'를 선사해준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처음 쓴 기사는 '엄마를 인터뷰하다'이다.

 

서명숙은 어떤 사람인가?

<시사저널> 창간 멤버 서명숙은 1989년 6월부터 2003년 4월까지 15년 동안 정치부 기자·정치부장·취재1부장·편집장을 역임했다. 금창태 사장이 신임 사장으로 부임하던 당시 사장과 한 차례의 면담 후에 '떠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의 불길한 예감은 100% 적중돼 <시사저널>은 매체가치보다는 '돈'으로 급격하게 방향추가 쏠리더니 2006년 6월 16일 '기사삭제 사태'를 계기로 시사저널 기자들의 길거리 생활이 시작됐다.

 

서명숙은 2007년 1월 9일 오마이뉴스에 올린 칼럼 "'짝퉁' <시사저널>을 고발합니다"로 인해 사측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

단순히 제주를 '패키지'로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읽는 것은 시간낭비일 것이다. 하지만 제주가 주는 비유와 은유의 '와랑와랑'(이글이글)한 땡볕을 한껏 쬐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권할 만하다.

 

걷기는 온몸으로 하는 기도요, 두 발로 추구하는 선(禪)이다.(143쪽) 두 발은 인간의 철학적 스승이자, 걷기는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제주올레를 걸음으로써 당신은 비로소 당신도 모르는 무엇인가가 치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당신이 얼마나 약하고 여리고 아파 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른 데다 소녀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왼쪽의 아줌마가 바로 서명숙.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른 데다 소녀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왼쪽의 아줌마가 바로 서명숙. ⓒ 오승주

덧붙이는 글 | 블로거뉴스에도 올렸습니다


제주 걷기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북하우스(2008)


#서명숙#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걷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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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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