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를 강타한 문제작 <88만원 세대>(레디앙)를 내주겠다는 출판사를 만나지 못해 원고를 안고 '출판사 삼고초려'를 했던 우석훈이 자신의 경제대안시리즈(4부작) 최종 작품에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꺼내놨다.
천하삼분지계란 후한 말기에 군사 제갈량이 유비에게 설파한 비책이다. 적벽대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유비가 형주, 익주를 얻음으로써 조조의 위국(魏國), 손권의 오국(吳國), 유비의 촉국(蜀國)으로 천하가 삼분되어 수십년간 천하는 정족지세(鼎足之勢: 다리가 세개 달린 화로에 빗대어, 삼국이 균형을 이루어 나간다는 형세를 말함)의 형세를 유지하게 된다.
비록 정사(正史)에서는 조조의 위국과 손권의 오국이 사실상 이파전을 벌였고 유비의 촉나라의 존재감이 유명무실했다는 지적은 있지만, 유비의 촉나라가 의미 있는 균형감을 제공해준 것은 주지하는 바다.
우석훈에 따르면 제1부문은 시장주의를 따라 작동하는 시스템, 우리의 경우는 재벌/대기업 부문을 말한다. 제1부문의 기업들이 독점기업으로 전환되면서 시장의 폐해가 나타났고, 1929년 대공황 이후 재정/금융정책 또는 제도로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도래하자 이 문제를 정부 또는 국가라는 '공공 부문'으로 통제하는 흐름이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국가개입이나 공공부문이 주도적으로 시장을 통제하는 일련의 흐름을 제2부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전두환 등이 재벌을 휘어잡고 경제정책을 통제하며 '국가독점주의'를 유지하던 시절이 제1부문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개입은 선진국들이 쏠쏠한 재미를 본 정책이며 개발도상국들도 국가개입으로 인해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한국의 경제적 성공은 제3세계 국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나 대체로 '독재'를 통한 경제성장을 하고자 하는 국가들에서 '한국식 경제발전 모델'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사항이다.
최근 외국의 사례를 보면 리먼브라더스 등 미국의 대규모 투자기업이 정부의 통제 없이 파생상품을 남용하면서 한창 대박을 터뜨리던 시기는 제1부문이 강성했던 시점이며, 부동산 위기에 이어 파생상품의 위기가 폭발해서 대규모 구제금융 처방으로 국유화되는 최근의 과정은 제2부문의 활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개의 부문은 경제시스템의 주된 주체이지만, 우석훈은 두 축만으로는 안정적인 경제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결국 신자유주의의 폐해(비정규직의 대규모화, 금융사태 등)와 개발독재의 전횡(경제규모의 수 배에 달하는 부동산 과잉성장(우리나라의 경우 2008년 1월 1일 기준 공시지가는 GDP의 3.6배,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과 제3세계의 독재 등)을 빈번하게 노출시키며 경제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3부문이라는 조정자가 필요한데, 이는 '가공'의 기구가 아니라 3~4만 달러 이상의 국민경제를 실현하고 있는 국가(스위스, 스웨덴, 네덜란드 등)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논증하며 실제 사례를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다.
왜 제3부문이 필요한가 - 스위스 성공사례 분석우석훈을 몇 번 만나고 인터뷰를 해본 바에 의하면 그는 매우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다. 사회적 모순을 가장 먼저 체감하며, 위험한 경제정책이 가져올 폐해의 쓴맛을 가장 먼저 본다. <괴물의 탄생>(개마고원)에서 그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정신분열증적 국민경제'라고 평가하며 "그야말로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몇 달을 보냈는데, 아마 저의 이런 심정을 공감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고 썼다.(256쪽)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가지고 인터뷰할 때 그는 "전쟁이 일어나면 내가 가장 먼저 희생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쟁이 과연 멀리 있지 않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프랑스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이래 유엔 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 의장 등을 맡으며 인생의 4분의 1을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에서 지냈는데 그 기간 동안 우리나라에 적합한 경제모델의 사례를 면밀히 검토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중앙형 시스템이 가장 두드러지는 나라인데, 좌파들이 국가기구를 장악하면서 중앙시스템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갖게 된 나라가 되었다. 수도가 비대해진 점이 대표적 증거다. 우석훈은 프랑스가 우리나라에게는 대안적 모델 같이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스웨덴의 '대타협 모델' 혹은 '사민주의 모델' 역시 한국에서 현실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부수립 당시부터 극우 혹은 우파가 정권을 장악해 장기간 국민들을 세뇌한 상황에서 사민주의 모델이 무슨 수로 정권을 장악하겠는가.
김대중과 노무현이 우파 정권에 대해서 정권교체를 이뤄내지 않았느냐고?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지도자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나 화려한 투쟁경력이 기업카르텔의 콧대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잘라말했다.
야당에서 정부 쪽으로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또는 이른바 좌파라는 사람들이 정권창출의 깃발을 손에 잡는 순간 갖가지 위협, 특히 그 중에서도 어떤 정부든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위협, 즉 '자본이탈'이라는 위협의 볼모가 된다. 브라질의 룰라와 남아공의 만델라가 그러하다.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 168쪽)
그러면 우파들이 숭앙해 마지않는 '미국식 모델'은 어떤가? 우석훈은 미국식 모델을 한국에 적용한다면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처럼 전형적인 중남미형으로 급속히 양극화되기 쉽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미국식 모델의 주된 구호는 '대기업의 고성장을 이룬 후 국민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이지만, 언제 한 번 고른 분배가 이루어진 적이 있을까? 재벌들은 항상 배고플 뿐이다. 기업의 수익이 극대화되도 직원들의 연봉은 올라가지 않는다.
우석훈이 주목하는 것은 '스위스 모델'이다. 스위스는 이렇다 할 지하자원이 없고 겨울도 6개월이나 되고 유럽에서 가난하기로 유명한 나라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사정이 비슷하다. 게다가 세 지역의 언어가 달라 지역분쟁이 적지 않으며 극우파가 득세하고 있는 상황마저 비슷하다. 1971년에야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었을 정도니 말 다한 셈 아닌가.(우리나라는 1948년, <대한민국 선거이야기>(역사비평사))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독일이나 프랑스의 위성경제 정도로 간주되던 스위스가 잘 살게 된 것은 불과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스위스의 잠재력은 노동에 대한 전혀 다른 가치관 위에서 경제활동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며, 생태나 환경의 문제가 국민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정규직 체제가 정착된 것도 주요한 특징이다.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나 충전이 필요한 직장인의 경우 봉급을 낮추는 대신 일주일에 이틀만 출근하는 시스템이 현실화된 것이다. 일주일에 5일 동안 이들은 식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독서하고 사색하고 전문성을 강화한다.
대학등록금은 연간 50만 원밖에 안 하는데, 그것도 갑자기 올랐다며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나섰다. 대학진학률 역시 18~20% 정도밖에 안 된다. '학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스위스의 경제 특징들이 일견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목을 조르는 내부 모순들(비정규직, 등록금 1000만원, 일중독증 등)에 대한 완충장치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는가를 보면 전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스위스는 직접민주주의의 가치에 기반한 분산형 구조이며 지역공동체 혹은 지자체의 힘으로 만들어낸 제3부문이 경제의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복지국가의 모델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에 기반한 자치의 힘으로 제3부문을 일궈냈다는 게 매우 중요하다.
전쟁과 파시즘 얼마나 가까이 왔나 - 괴물과의 혈투우석훈은 기회가 날 때마다 '전쟁'과 '파시즘'의 발생가능성을 경고해 왔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는 나치의 독일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경제상황이 급속히 악화된 몇 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로, 인접국 프랑스는 독일이 침공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경계'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석훈은 '파시즘'의 징후를 분석하며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는 현재를 '파시즘 전 상황'으로 규정했다. 파시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대중들이 지도자를 거부하기 어려운 하나 이상의 미덕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명박에게는 반감만을 갖기 때문에 그가 파시즘의 주인공이 되기는 힘들다는 분석이다. 즉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포퓰리즘 단계가 극우파와 결합되면 일반적으로 파시즘이 발동할 조건이 만들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정도가 파시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물 정치'와 '지역 정치' 같은 후진적 정치 성향이 대중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파시즘의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명박에게 환멸을 느낀 대중들을 황홀하게 홀릴 수 있는 지도자가 갑자기 나타나 '시스템'이 아니라 '카리스마'로만 권력을 이어나가려고 한다면 파시즘적 상황이 꿈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가 목도한 '허경영 신드롬'은 우리가 파시즘 위험도에 노출돼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석훈은 한국에서 파시즘이 일어난다면 '건설자본+성장주의'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 있으며, 우파나 좌파 모두에게서 나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의 우파는 시장 절대주의자들이고, 좌파는 공공성 절대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 극단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우석훈이 '괴물'이라고 부르는 한국의 현상들을 보면 건설자본/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과 극단적인 중앙형 시스템(경기/서울 수도권 인구가 전국 인구의 절반), 토호형 경제를 들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는 완충장치가 없다는 것이 괴물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승자독식사회이자 패자멸망사회인 한국에서는 게임을 할수록 선수가 줄어들어 나중에는 단 한 명의 게이머만 남는 극단적인 '배틀로얄' 시스템이다. 패자는 일단 게임에서 지면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다음 경기는 승자들로만 이루어지며 이런 구조가 반복된다.
우리나라는 현재 약자들이 죽어가는 단계가 매우 발전(?)돼 있다. 우석훈은 '개미지옥'이라고 불렀는데,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다는 점에서 이 비유는 무시무시할 만큼 적절하다고 하겠다. 일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비정규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미 1000만에 육박했다. 이쯤 되면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정규직 역시 '영혼'을 팔지 않을 수 없다. 직장만 준다면 몸도 마음도 영혼도 다 내다 버릴 수 있다는 정서가 매우 강력한 것이 한국사회다. 반대로 이들을 채용하는 기업들은 '너 말고도 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운동장 한 바퀴야'라며 직원을 기계 다루듯 할 수 있다. 그 아래에는 무시무시한 비공식 경제(informal economy, '지하경제'라고도 부른다)가 도사리고 있는데 '다단계'와 '사채시장'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지하경제의 규모는 2005년 집계 당시 160조 안팎으로 GDP의 20%로 추정됐는데 지금은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근의 뉴스에 의하면 사채이자가 3000%에 달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만약 제3부문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약자들은 지하경제의 먹잇감이 되거나 파시즘 전체주의가 되어 내부모순을 '전쟁'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해소하려 할지도 모른다.
실패에 대한 경쟁력과 완충장치물론 우석훈은 우리나라에서 제3부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모델도 몇 가지 제시해 놓았다. 그 부분은 책의 내용을 참조하는 게 좋겠다(이미 많은 내용을 발설해 버려서). 여기서는 마지막으로 우석훈이 시원하게 제시해놓지 않은 제3부문의 '실패에 대한 경쟁력'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
우석훈은 제3부문이 추구하는 지상가치는 '공공선'이라고 규정하였다.(258쪽) 공공선이란 쉽게 말해서 사라들이 아끼고 사랑해서 없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게 만드는 가치를 말한다. 예컨대 'org'라는 공공기관의 도메인을 가지고 있는 위키피디아는 제아무리 이해관계자들이 집단적으로 '삭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1시간도 되지 않아 복구된다.
그것은 위키피디아의 키워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애정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의 말미에서 우석훈은 "평화의 맛을 한 번 본 사람은 이를 잊을 수가 없다"고 썼는데, '평화'라는 말을 제3부문으로 고쳐 써도 틀리지 않다.
제1부문과 제2부문은 모두 '절대강자'를 주요한 역할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를 보면 장수의 목이 날라가면 군대는 와해되고 전멸되는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제1부문과 제2부문 역시 절대강자가 사라지면 모든 부문의 구성원들이 위태롭게 된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3부문의 경우 직접민주주의와 풀뿌리 자치주의에 기반한 공동체들의 연대이기 때문에 포트폴리오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포트폴리오 효과와 실패 경쟁력은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갤리온)의 저자 클레이 서키에게 들을 수 있는데 그 책에서 저자는 오픈 소스(제3부문의 약자공동체와 비교할 수 있다)와 상용 소프트웨어 업계(대기업과 국가 중심의 제1부문, 제2부문과 비교할 수 있다)가 실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며 얼마나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증명하였다.
클레이 서키에 의하면 오픈소스 프로젝트 중 상당수는 실패하고 그나마 성공작들도 대부분 평범한 수준이지만, 오픈소스는 상용 소프트웨어보다 많은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위력적인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위협적인 경쟁자이다. 즉 오픈소스의 실패는 공유가 되고 집단학습이 이루어지지만 상용소프트웨어의 실패란 곧 '시장 퇴출'을 의미하므로 '실패비용'이 상당히 높은 편이며, 그만큼 실패비용에 대한 공포심도 높다.
그리고 이 실패는 좀처럼 공유되고 학습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제3부문(오픈소스)의 개방적인 사회 시스템 전반은 동등계층의 생산에 의존하므로 어느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실험적이면서도 비용은 훨씬 더 줄일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스템 자체가 실패로 인한 비용을 낮춰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새로운 발견과 인식의 증진이 생겼다면 '저작권'이나 '특허'를 걸어서 보호하는 게 아니라 공유하기 때문에 이런 자산은 금방 불어날 수 있다.
이를 우리나라의 상황에 적용한다면 약자들을 위한 '완충장치'가 생기는 셈이며, 우석훈이 말한 '개미지옥'은 '그물 보호대'로 바뀌므로 빠지더라도 곧 나올 수 있고 뒤에 오는 사람에게 이곳에 함정이 있다고 알려줄 수도 있다.
봉준호가 한강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듯이, 우석훈은 우리 사회 전체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괴물을 어떻게 가두는지에 대한 매우 유력한 해법도 제시했다. 저자의 진단에 대해 한국사회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