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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헌책방에서 몸소 찾아가 책을 사는 뜻

가지 잘린 나무 앞 헌책방 나무가 나무답게 자랄 수 없는 이 나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가지치기가 되는 사회가 아니냐 싶습니다. 그래도, 그런 가지 잘린 나무 앞 헌책방은 오늘도 반가운 책손 하나 기다립니다.
가지 잘린 나무 앞 헌책방나무가 나무답게 자랄 수 없는 이 나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가지치기가 되는 사회가 아니냐 싶습니다. 그래도, 그런 가지 잘린 나무 앞 헌책방은 오늘도 반가운 책손 하나 기다립니다. ⓒ 최종규
혜화동에 한 곳 남아 있는 헌책방 '혜성서점'에는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거나 두 다리로 골목길을 거닐며 찾아갑니다. 혼자 찾아갈 때는 으레 자전거를 타고, 두엇이 찾아갈 때는 걸어서 찾아갑니다. 명륜동에 자리한 인문사회과학 책방인 <풀무질>에 들러서, 미리 전화를 걸어 주문한 책을 사면서 요사이 나온 책을 구경한 다음에 찾아가기도 하며, 혜화동 골목 안쪽에 자리한 또다른 인문사회과학 책방 '이음책방'에 들러 두툼한 사진책 몇 권을 고른 다음 찾아가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삼선교에 있던 헌책방 '삼선서림'까지 함께 나들이를 했으나 삼선교 헌책방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자전거로 찾아온 날이며, '혜성서점'에서 고른 책이 그리 많지 않으면 성신여대역 둘레까지 달려서 '그린북스'며 '이오서점'이며 '간판없는 헌책방'을 둘러보곤 했는데, '그린북스'와 '이오서점'은 문을 닫았습니다. '간판없는 헌책방' 하나만 남았는데, 이곳은 용문중고등학교 가는 길목으로 자리를 옮기며 '신광헌책'이란 간판을 처음으로 올렸습니다.

'신광헌책'에 들른 뒤에도 가방이 덜 찼다면, 헉헉거리며 고가도로를 넘어서 길음동으로 넘어가서 '문화서점'까지 찾아갑니다. 예전에 미아리 둘레에 헌책방이 무척 많아서 여기에도 가고 저기에도 갔으나, 지금 미아리 둘레에는 헌책방 두 곳만 남아서 고이 자리를 지킵니다. 헌책방이라는 곳은 아파트가 아닌 골목길하고 어울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헌책방이라는 데는 빠르기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넉넉한 마음품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따뜻한 마음을 바랄 때 헌책방이 동네방네 문을 열게 되지만, 세상이 더 빠르고 더 높고 더 비싼 구름 위를 바랄 때 헌책방은 돈벌이와 매출에 붙잡혀서 인터넷매장으로만 바뀌면서 하나둘 사라지게 됩니다.

헌책방도 인터넷으로 하는 곳이 퍽 늘고, ‘인터넷 헌책방은 나날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인터넷이란 도움이 되고 쓸모가 있습니다. 섬마을이라든지 산골짜기 마을에서는 인터넷 헌책방이 크게 도움이 되고 이바지를 합니다. 그러나 부쩍부쩍 늘어나는 인터넷 헌책방에서 책을 사는 사람은 섬마을이나 외딴 시골마을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인터넷 헌책방에서도 비슷한데, 90∼95퍼센트를 서울·경기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책을 삽니다. 이 가운데 서울 강남 독자가 가장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두 다리로 걸어 보아야 30분이면 넉넉한 곳에 헌책방이 있는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전철로 가면 1시간 거리에 헌책방이 수십 군데, 아니 백 군데가 넘는 서울과 경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몸소 다리품을 팔며’ 헌책방 나들이를 하는 일이란 자꾸 줄어듭니다. 처음부터 인터넷으로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헌책방 맛이 어떠한 줄 모르고, 헌책방 느낌이 어떠한지 받아들이지 못하며, 헌책방 냄새가 어떠한가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값싼 책, 좀더 적은 돈을 치르며 장만할 책에만 눈길을 돌리고 맙니다.

헌책방은 새책방과 견주어 ‘요즈음 나도는 책은 반값이나 2/3 값, 운이 닿으면 1/3이나 1/4 값으로 살 수 있어서 주머니 짐을 덜 수 있는’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헌책방은 책을 값싸게 사도록 해 주는 곳만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값싸게 사는 맛에 헌책방에 간다지만, 한 번 두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을 거듭하는 동안, 헌책방에 깃드는 책과 헌책방에서 팔려나가는 책에 서려 있는 얼과 넋이 무엇인가를 고즈넉하게 받아먹게 됩니다. 헌책방 일꾼들 두툼하고 시커먼 손을 보면서, 사람들이 마구 다뤄서 많이 다친 책들이 헌책방에서 어떻게 손질이 되어서 되살아나는가를 지켜보면서, 더 높은 값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제 임자를 만났을 때 알맞는 값보다 조금 낮게 치러 주어도 된다’는 말을 하면서 ‘아무쪼록 잘 읽어 주면 나(헌책방 일꾼)도 좋지 않느냐’면서 웃는 모습을 숱하게 보는 동안, 헌책방이 새책방하고 다른 자리임을, 또 우리 나라에서 헌책방이란 어떤 몫을 맡아 왔는가를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새기게 됩니다. 지식이 아닌 가슴으로 얻게 됩니다.

이리하여, 헌책방 나들이를 두 다리로 걸어서 즐기지 못한다고 한다면, 또는 자전거를 타고 마실을 해 보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대중교통을 타고 느긋하게 오가지 못한다면, 책 하나에 스며 있는 우주를 못 보기 일쑤입니다. 시간을 아껴서 빨리빨리 찾아보려고 하는 책에서는, 남보다 빠르게 정보를 얻기는 할 테지만, 이 정보 하나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를 곱씹는 마음결까지는 얻지 못합니다. 여러 인터넷 헌책방 책값을 견주는 검색기에서 더 싸게 매겨진 책을 살피느라 시간을 보내어 돈 천 원이나 이천 원을 아끼게 된다면 주머니가 홀가분해질는지 모르지만, 그처럼 아낀 돈 천 원이나 이천 원을 자기 스스로 얼마나 알뜰하게 쓰느냐를 돌아본다면, 우리가 아낄 대목은 무엇이고 우리가 쓸 대목은 무엇인가를 놓치게 됩니다.

책방 앞 들어오는 사람보다 지나치는 사람이 더 많지만, 그래도 늘 열려 있는 책방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책이 수북히 쌓여 있습니다.
책방 앞들어오는 사람보다 지나치는 사람이 더 많지만, 그래도 늘 열려 있는 책방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책이 수북히 쌓여 있습니다. ⓒ 최종규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책방 일꾼이 조금 눅게 주어서 몇 천 원 싸게 장만한 날은, 길거리에서 동냥하는 이가 보이면 스스럼없이 천 원이나 이천 원씩 손에 쥐어 드리게 됩니다. 서울 나들이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가는 전철길에서 마주치는 동냥꾼을 보면, 한 사람 앞에 천 원씩 나누어 드리게 됩니다(동냥꾼을 으레 서넛씩은 만나니). 이렇게 되면, 동냥꾼한테 돈을 준 사람은 저입니다만, 알고 보면 헌책방 일꾼이 그네들한테 나누어 준 셈입니다. 그리고 좀더 값싸게 얻어서 아껴진 제 살림살이로 몇 군데 시민단체에 뒷배할 돈이 생기게 되니, 헌책방 일꾼은 저희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시민단체에 보탬이 되는 셈이에요.

줄기가 퍽 우람하지만 늘 가지가 잘리고야 마는 방울나무가 두 갈래 거님길에서 애처롭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혜성서점'을 찾아갑니다.

(2) 헌책방에서 만난 천상병

헌책방 나들이를 하다 보면, 천상병 님 시모음을 곧잘 만납니다. 많이 팔리고 많이 읽히고 많이 버려지고 많이 되읽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읽히고 지금도 읽히니 천상병 님 시모음은 헌책방에 많습니다. 젊은 날 읽고 나서 나이들어 책을 버리는 분들이 많아, 천상병 님 시모음은 헌책방에 많이 들어옵니다. 이와 맞물려,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판 끊어진’ 천상병 님 시모음을 찾아 읽으려는 손길도 많아서, 들어오기 무섭게 팔려나가곤 하는 천상병 님 시모음입니다.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당신 시모음이 이렇게 수없이 되읽히고 또 읽히는 모습을 굽어살피고 있겠지요.

천상병 님 자국 시인 천상병 님 자국이 남아 있는 책.
천상병 님 자국시인 천상병 님 자국이 남아 있는 책. ⓒ 최종규
수필책 <천상병-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지상,1988)가 보입니다. 수필책 하나. 뜻밖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펼칩니다. 천상병 님도 수필책을 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책 좀 읽었다고 깝죽대는 깜냥에 천상병 님 수필책은 처음. 책 앞쪽 빈종이에 천상병 님 꼬불꼬불 글씨가 남겨져 있습니다. 1989년 어느 날, 어떤 이한테 선물로 드린 발자국.

..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기쁘지만,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대로 마주치면 그래도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살아 있기에 만나는 얼굴이다 ..  (19쪽)

오늘 하루도 고맙게 깨어났기에, 힘차게 걸어서 헌책방까지 왔습니다. 오늘 하루도 가방 가득 책을 얻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또 내일 아침도 기쁘게 깨어나서 맞이할 수 있으면, 이 책들을 마음껏 받아먹으며 또 하루치만큼 새로워지게 됩니다.

익히 이름을 들어온 책을 처음 만날 때에도 반갑고, 아직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책을 처음 만날 때에도 반갑습니다. 미처 모르던 책을 만나면서도 배우고, 익히 알던 책을 되읽고 거듭 읽으면서도 배웁니다.

.. 내가 얼마나 열심히 (도서관을) 다녔는가 하면, 그 관장 겸 관원이 그 시립도서관 전체의 열쇠를 내게 맡길 정도였으니까. 왜냐하면 온 가족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기 위해서였다. 내게 열쇠를 맡길 만큼 내가 매일같이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책을 읽었다는 증거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벌써 《아라비안 나이트》를 독파했으니 알조다. 이런 문학 서적보다도 내가 평소에 제일 즐긴 것은 역사였고 지리였다. 하여튼 이 독서병이 발전하여 나를 오늘의 문인으로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 ..  (25쪽)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무엇을 쓰든, 글쓰기로 한삶을 보내며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신 분들 어린 날 돌아보는 이야기를 살피면, 한결같이 ‘어렸을 때 신나게 뛰어놀았던 한편, 온마음 바쳐서 도서관이고 책방이고 책 우물을 팠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가 좋은 스승이라면서 섬기거나 우러르거나 모셔야 한다는 분들이 어떻게 젊은 날을 보내왔는가를 듣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내 어릴 적에 돈이 없어서 책을 살 수는 없었고 눈치 보아 가며 책 하나 빌려 읽으려고 무던히 마음을 썼다’는 대목에 코끝이 찡하곤 합니다.

천상병 님은 문학이 아닌 역사를 좋아한 분이었군요.

.. 이렇게 허술하게 말할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술을 좋아하는지 말해야겠다. 우선 우리하고 가까이 있어서 좋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때 자동차를 탄다든가 하는 악조건은 없다. 우리 주위에 술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나는 술을 아주 조금만 마시니 취한다는 걸 모르고 살고 있다. 취한다는 건 악덕이다. 예수님이 이 취한다는 걸 경계했지 술을 금하시지는 아니했다 … 언제나 조용히 마시고, 많이는 들지 않고 고요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술자리야말로 으뜸인 술자리인 것이다 ..  (31쪽)

가까이 있어서 좋고, 알맞게 즐기니 좋은 술. 책 또한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알맞게 읽으니 좋지 않느냐 싶습니다. 술에만 지나치게 빠지지 않되 늘 곁에 두고 즐기고, 책에만 지나치게 홀리지 말되 언제나 곁에 놓고 즐기고.

즐기는 동안에는 온마음을 쏟아서 즐기지만, 제 기둥뿌리가 흔들리거나 뽑히지 않도록 추슬러야 할 테고, 즐기는 까닭은 제 기둥뿌리를 더 단단히 다스리거나 다독이게 되어 기쁘기 때문임을 잊지 말고.

조그마한 골마루 골마루는 조그맣습니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골마루에 쌓인 책 하나하나 온 우주가 깃들어 있습니다.
조그마한 골마루골마루는 조그맣습니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골마루에 쌓인 책 하나하나 온 우주가 깃들어 있습니다. ⓒ 최종규

.. 나는 팔팔년에 사회 참여시 〈이 세상은 왜〉라는 시를 쓰고 팔구년에 출판하려고 하고 있읍니다.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서정시만 치중하여 왔읍니다. 52년에 추천을 마친 나는 줄곧 서정시만 써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이도 들고 했으니 사회에 대한 눈도 뜨이고 생각도 많으니 이제는 사회 비판 시를 써 볼까 하고 생각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의 희로애락보다 사회 전반의 회로애락도 중대하지 않읍니까 ..  (35쪽)

수필을 읽으면서 여태 읽어 온 시를 다시 헤아립니다. 수필책을 시모음 옆에 놓으면서, 어떤 마음으로 써 내려 왔던 시인가를 곱씹습니다. 시는 시대로 좋고 수필은 수필대로 좋은데, 시를 쓰는 사람은 수필도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시도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이 드러나는 시요 소설이라면, 삶을 드러내는 수필이거든요. 꿈을 담아내는 시요 소설이라면, 발자국이 새겨지고 발자취를 남기는 수필이거든요.

(3) 시읽기와 책읽기

<알프레드 레이니/조응천,기종석 옮김-수학의 발견>(청아출판사,1986)이라는 책 하나, <리처드 바크/정현종 옮김-어디인들 멀랴>(나남,1979)라는 책 하나, <권정생(글)/정승각(그림)-황소 아저씨>(길벗어린이,2001)라는 그림책 하나, <Sam McBratney(글)/Jennifer Eachus(그림)-I'm sorry>(HarperCollins,2000)라는 나라밖 어린이책 하나, <이시우-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인간사랑,1999)이라는 사진책 하나를 봅니다. <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은 2007년에 2쇄를 찍었네요. 참 더디 걸려 2쇄를 찍었지만, 판끊김이 아닌 더딘 2쇄이기에 더 반갑습니다.

<손성자-사람들>(명성인쇄사,1982)이라는 시모음을 하나 들춥니다.

 매일 / 아침 일찍 / 타인으로 나가 //
 밤늦게 / 취인으로 들어오는 / 아빠를 맞이하는 엄마 //
 그뿐이랴 / 매주 / 한번은 / 외박하며 //
 굶기지 않는 것을 / 자랑 삼는 / 아빠를 섬기는 엄마 //
 그래도 / 아해들에겐 / 가끔 / 과자봉지 / 안겨주고 //
 이따금 / 외출도 함께 해 주는 / 아빠가 //
 아해들에겐 / 좋고 / 고마운지 //
 헤어져 사는 것보다 / 없이 사는 것보다 / 훨씬 낫다고 말하는 아해들. //
 엄마는 / 아해들보다 / 속좁은 탓일까 //
 헤어져 사는 엄마보다 / 홀로 사는 엄마보다 / 더 외로운 / 이 엄마는 //
 허상의 아빠에게 매달려 / 울고 웃는 엄마가 / 너무너무 불상해 보인단다. /
 너무너무 조그맣게 보인단다.  (엄마)

꽂힌 책들 사람들이 참고서를 찾으니 참고서를 갖추고, 사전을 찾으니 사전을 갖추며, 고전을 찾으니 고전을 갖춥니다. 우리가 찾는 책에 따라서 책방 책꽂이가 달라집니다.
꽂힌 책들사람들이 참고서를 찾으니 참고서를 갖추고, 사전을 찾으니 사전을 갖추며, 고전을 찾으니 고전을 갖춥니다. 우리가 찾는 책에 따라서 책방 책꽂이가 달라집니다. ⓒ 최종규

내 어린 날, 시를 읽으면서 ‘어떤 목소리를 내는가’에 눈길이 많이 머물렀습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시에는 눈길을 안 두었습니다.

요즈음, 목소리 내는 시도 읽지만, 어딘가 힘알이가 없다는 느낌이 많이 드는데, 목소리보다 ‘삶이 묻어난 시’를 읽으면 눈이 한참 멎습니다. 눈길을 오래오래 두게 됩니다. 어쩌면, 지난날 즐기던 ‘목소리 내는 시’들은, 목소리만이 아닌 ‘삶이 담긴 목소리’였고, ‘목소리로 그치는 목소리가 아니라 삶으로 이어지는 목소리’가 되도록 애쓰던 시였기 때문에 즐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남주, 고정희, 문익환, 신동엽 같은 이름마디를 해마다 한 차례씩 더듬으면서 꼭 한 번씩은 다시 읽는 까닭도 이들 시는 목소리로 그치지 않아서일 테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시 하나에 삶 하나 담기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 하나에 삶 하나 담기가 어렵다면, 자기 스스로 시와 삶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냐 싶어요. 시와 삶이 하나라면, 시처럼 살고, 사는 대로 시를 쓴다면, 내 시가 내 마음밭에서 나오는 시이지만, 내 삶터에 뿌리내리는 내 몸짓대로 뽑혀나오고 솟구쳐나오는 시라면, 시 하나에 삶 하나 담기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느낍니다. 삶에서 솟구칠 때 뜻이 있고, 삶에서 용솟음칠 때 가슴을 미어지게 하며, 삶에서 뱉어질 때 눈물 한 방울과 웃음 한 모금을 선사한다고 느낍니다.

 딸로 태어나
 딸로 자라나

 엄마 곁을 떠나
 엄마가 되어

 또
 딸을 낳아
 딸을 키워
 딸을 떠나 보낸다

 그리고
 할멈이 되어
 늙어간다
 죽어간다  (딸)

이럭저럭 책 구경을 거의 마칩니다. 눈에 뜨이고 마음으로 스며드는 책은 더 있지만, 그만 고르기로 합니다. 주머니를 헤아리니 ‘보인다고 더 집었다’가는 큰일이 나겠습니다.

그러나, 책값을 셈하고 밖으로 나와 가방에 고른 책을 챙겨 넣을 무렵, 처음 '혜성서점'에 닿을 때부터 자꾸 눈길이 가던 꾸러미를 안 끌러 볼 수 없습니다. 안 사더라도 구경이라도 하자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 ‘안 사더라도 구경’이라는 마음은 금세 무너져내리건만, 그래도 구경을 하고 자리를 털어야 뒤끝이 없습니다.

꾸러미로 담긴 큰 상자 하나 가득 담긴 옛 졸업사진책. 그리고 졸업사진책 사이사이 끼워져 있던 졸업장과 상장과 옛날 신분증과 증명서 들...
꾸러미로 담긴큰 상자 하나 가득 담긴 옛 졸업사진책. 그리고 졸업사진책 사이사이 끼워져 있던 졸업장과 상장과 옛날 신분증과 증명서 들... ⓒ 최종규
졸업사진책 세 묶음. 혜화동 둘레에 깃들던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사진책이 잔뜩 모여 있습니다. 허허. 녀석들 참, 보기 좋구나, 아름답구나. 그러나 이 가운데 한두 권만 빼갈 수 없는 노릇이고, 가져가려면 모조리 사들어야 하는데, 권수가 얼추 쉰 권은 넘어설 듯하니.

구경만 하자던 처음 생각은 어느덧 사라집니다. 사진책 도서관을 꾸리는 사람으로서 이 소중한 자료를 안 챙기고 돌아서면, 도서관을 한다는 뜻이 없을 뿐더러, 한 번 뒤돌아서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인연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이럴 때 옆지기는 으레 이렇게 말합니다. “사야 하는 책이라면 사 둬요. 나중에 꿍얼꿍얼대지 말고.”

눈을 질끈 감습니다. 사기로 합니다. 책값은 없어서, 집에 닿아 은행계좌로 넣어 드리기로 합니다. 이십만 원이 넘는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갑니다. 이제 이달은 책 구경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느냐 싶습니다. 좋아하는 술 한잔, 기껏해야 동네 구멍가게에서 병맥주 한두 병 사다 마시는 술 한잔도 제대로 못 즐기게 되느냐 싶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술이야 여러 날 안 마셔도 나중에 몰아서 마실 수 있지만, 또 언제 구멍가게에 가더라도 술은 똑같이 쟁여져 있지만, 묵은 졸업사진책은 오늘 지나가 버리면 또다시 나올 일이 없는데. 오늘 보았으니 인연이고, 오늘 가져가게 되니 인연이며, 오늘 껴안아 주머니를 털게 되니 또 인연입니다. 주머니가 텅 비고 살림돈도 한동안 쪼들리게 되지만 깊은 인연입니다. 저는 저대로 이 인연을 고이 붙잡으면서 제 마음을 북돋우고, 우리 동네 도서관을 찾아오는 이들한테는 ‘와, 예전에는 졸업사진책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옛날 사람들 얼굴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네요.’ 하면서 넘겨볼 수 있다면, 이만한 피흘림이란 아무것도 아닌 일이 아니랴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상자로 하나 넉넉히 나올 책꾸러미를 골랐기 때문에, 가방에 담을 책짐을 덜어 놓습니다. 가방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돌아가는 전철길에 읽을 책만 몇 권 남깁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혜화동 〈혜성서점〉 / 02) 741-0143
: 4호선 혜화역에서 나와 혜화로터리에서 주유소를 오른쪽으로 끼고 2분 남짓 걸어가면 찾을 수 있습니다. 문이 열었는가, 그리고 가는 길을 물을 때에는 전화를 하시고, 이런 책 있느냐 저런 책 있느냐 하고 물으려면 전화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헌책방#혜성서점#책읽기#시집#천상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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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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